지평선

백수의 일상 - 621. <영원히 끝나지 않는 홀로코스트>

paxlee 2022. 7. 31. 05:39

영원히 끝나지 않는 홀로코스트

 

영화 '시스터 액트'의 포스터'


'시스터 액트'의 배우 우피 골드버그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 골드버그가 오랜만에 세계 언론에 등장했다. 어처구니없는 실언(失言)으로 인해서다. 골드버그는 지난 2월 미국 ABC 아침 토크쇼 '더 뷰'(The View)에서 이렇게 말했다.

"홀로코스트는 인종차별이 아니다. 홀로코스트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비인간성에 관한 문제이고 인종차별로 보면 문제를 오도하게 된다."

세계에서 어떤 비난이 쏟아졌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다. 골드버그는 세 번씩이나 사과했지만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고, 급기야 ABC는 2주간 출연 정지라는 징계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홀로코스트는 공식적으로 1945년 1월27일 종료되었다. 이날 아우슈비치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유대인, 장애인, 집시 등이 풀려났다. 2차세계대전 기간 중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유대인 600만명이 희생되었다.

1944년 5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유대인들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기독교인의 유대인 박해의 역사는 장구하다. 예수가 유대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날부터 유대인 박해의 역사가 잉태했다. 서구 역사는 유대인이라는 키워드로 들여다보면 상당 부분 의문이 풀리고 해석이 가능해진다. 어떤 국가의 흥망성쇠나 전쟁의 승패에도 그 이면을 들춰 보면 종종 유대인들이 깊숙이 관여한 경우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르놀트 쇤베르크(1874~1951). 오스트리아 빈 태생의 유대인 음악가. 12음계의 창시자. 화가로도 활동한 전천후 예술가. 경기고 시절의 백남준에게 영향을 미쳐 백남준으로 하여금 일본에서 독일 유학으로 이끈 사람.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21년 6월, 쇤베르크는 잘츠부르크 부근 호숫가 마을로 가족 휴가를 떠났다. 그런데 호숫가 마을에 도착해보니 마을 입구에 다음과 같은 구호를 적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유대인을 환영하지 않는다. 마을을 떠나라.'

쇤베르크는 1차 세계대전에 오스트리아군으로 참전했고, 개신교로 개종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시골 마을 사람들에게 쇤베르크는 여전히 유대인으로 인식되었고, 배척을 받아야 했다. 커다란 충격을 받은 쇤베르크는 유대백성의 출애급(出埃及)을 떠올렸고, 여기서 영감을 받아 오페라 '모세와 아론'을 작곡했다. 쇤베르크는 히틀러가 집권한 1년 뒤인 1934년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망명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3개월 뒤인 1938년 6월 빈에서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망명했다. 1년 뒤 망명지에서 눈을 감았다.

프로이트 아버지는 그가 네 살 때 현재의 체코에서 빈으로 이사 왔다. 프로이트 가계가 빈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유대인 박해사의 축쇄(縮刷)다. 부계는 기독교도의 핍박을 피해 쾰른, 리투아니아, 라이프치히, 프라이베르크 등을 유전(流轉)하다가 빈에 이르렀다. 빈에서 프로이트 가족은 상대적으로 가장 평온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나치 점령 후 프로이트는 78년을 산 빈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로이트가 나치에 비자 발급 비용을 내고 빈을 탈출하지 않았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빈에 남은 여동생 세 명의 비극이 증언한다. 여동생 세 명은 모두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희생되었다.

테오도르 헤르츨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프로이트가 런던에서 마지막으로 쓴 책이 '모세와 일신교'. 자신의 가족과 유대인이 기독교인들로부터 왜 박해를 받는가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홀로코스트의 예고편은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에서 터졌다. 1894년 프랑스 육군대위가 알프레드 드레퓌스(1859~1935)가 적국인 독일에 기밀을 넘겼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프랑스 사회가 반(反)유대주의와 유대주의로 두 동강이 났다. 권력을 등에 업은 반유대주의 광풍 속에서 재판은 졸속으로 이뤄져 드레퓌스 대위는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결백을 주장한 드레퓌스의 목소리는 산사태처럼 묻혀버렸다.

1898년, 유명 작가 에밀 졸라(1840~1902)가 프랑스 일간지 로로르 신문에 '나는 고발한다'를 기고한다. 드레퓌스 대위가 무죄라는 주장이다. 프랑스 군부와 반유대주의 권력층이 어떻게 증거를 날조하고 여론을 조작했는지를 낱낱이 고발했다. 프랑스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결국 재심이 이뤄져 드레퓌스 대위는 무죄를 선고받고 군에 복귀한다.

오스트리아 빈의 유력지 '신자유신문' 파리 통신원 테오도르 헤르츨(1860~1904). 유대인인 그는 드레퓌스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아무런 죄가 없는 프랑스 장교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반역죄인으로 몰려 남미로 유배당하는 과정을 기사로 썼다.

빈으로 돌아온 헤르츨은 1896년 작은 소책자 '유대인 국가'를 펴낸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 이 소책자는 빈의 유대인 지식인 그룹에서조차 주목받지 못했다. 내용이 황당하고 논리도 엉성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유대 지식인들의 시큰둥한 반응과는 달리 이 책자는 유대인 사회에 소리소문없이 퍼지기 시작했다. 시오니즘 운동이 유대인들의 가슴속에 바람을 탄 산불처럼 번져나갔다.

프라하 시절의 막스 브로트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프란츠 카프카(1883~1924)는 흔히 '경계인의 운명' '프라하의 이방인'으로 불린다. 체코사람이면서 온전히 체코인이 될 수 없었고,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으로 살 수 없는 그의 운명을 압축하는 형용 어귀다. 마흔한 살로 요절할 때까지 카프카를 소설가로 기억하는 체코인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의 여동생 세 명도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카프카 사후(死後) 그를 작가로 부활시킨 사람은 유명 작가이자 대학 친구인 막스 브로트(1882~1968)다. 브로트는 대학 시절부터 카프카의 재능을 알아보고 글을 쓰라고 독려했을 뿐 아니라 카프카가 죽자 뿔뿔이 흩어져 있는 그의 원고들을 모아 책으로 출간하는 작업을 책임졌다. 그는 카프카 전기를 두 권이나 써냈다.

1912년, 브로트는 프라하에서 시오니즘 지지를 공표했다. 시오니스트 커밍아웃!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선언이었다. 헤르츨의 '유대인 국가'의 메시지가 프라하의 유대인 작가 브로트까지 움직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브로트는 프라하의 유대인 단체에서 활동했다. 나치독일이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기 직전 그는 아내와 보헤미아를 탈출해 팔레스타인으로 갔다.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 건국 운동에 참여했다.

베를린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공원. 조성관 작가 제공


유럽의 주요 도시에는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 공간이 있다. 빈, 파리, 뮌헨, 프라하, 베를린, 키이우, 바르샤바…. 그중 규모와 조형미에서 압도적인 곳은 베를린이다.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에 있는 베를린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 공원. 이곳에 와서 10분만 거닐다 보면 누구라도 그날의 섬찟한 악몽이 전해져 소름이 끼친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전후 어떻게 세계제국이 되었나?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유대인 엑소더스에 문호를 개방하고 포용해서다. 프로이트는 최후의 저작 ‘모세와 일신교’에서 정답을 내놓았다.

"유대인들은 어떤 억압을 받든 억압에 저항한다. 가장 잔혹한 박해마저도 그들을 절멸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은 실제 삶에서 자신의 것을 지켜내는 능력을 보여주며, 그들을 받아들인 곳에서는 그들을 둘러싼 문명에 귀중한 기여를 한다."

매년 1월27일은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 전 세계 수도의 이스라엘 대사관과 독일 대사관은 공동으로 추모 행사를 연다. 이날 추모 행사에는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3중주 연주 음악이 울려 퍼진다.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 행사는 앞으로 50년의 세월이 흘러도 계속 진행될 것이다. 홀로코스트는 인류문명에 가해진 만행(蠻行)이기 때문이다

 

- [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조성관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