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백수의 일상 - 622. <예술적 충격에 대하여>

paxlee 2022. 7. 31. 08:27

예술적 충격에 대하여 

 

"로스코 색채는 뼛속까지 저려"
관람자들 절절한 감동 털어놔
그 감각들 섬광처럼 왔다 증발
언어 영역서 표현하기엔 한계

 

대학원 제자들과 차를 마시다가 예술적 충격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열여덟의 임윤찬이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을 영상으로 감상하며, 음악 애호가가 아닌데도, 팔에 소름이 돋고 코끝이 찡했다는 것이 대화의 출발점이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그가 한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감동한 거라고 처음엔 생각했죠.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100년을 한결같이 연습해도 저런 경지에 결코 오를 수 없으리라는, 천재성에 대한 추앙 때문일 거라고 믿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래도 이상했어요.” 털이 숭숭 나고 다리 많은 벌레를 보면 의지와는 상관없이 징그러워서 몸이 자동으로 움츠러들지만, 자신의 무의식이 설마 음악에 반응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음악은 나도 잘 모르니, 미술의 문외한마저도 눈물을 흘리게 했다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그림을 다른 사례로 들어봤다. 그의 그림 앞에 서 있던 관람자들이 “이것은 단순히 색채가 아니라 뼛속까지 저리는 아주 절절한 색채였다”고 말했다. 그림이 마치 사람처럼 호흡을 하는 듯 느껴졌다고 털어놓는 이도 있었다. 로스코는 인물 그림을 그려오다가 어느 날 문득, 그림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색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색채가 어떤 모양을 위해 사용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스스로 생명력을 갖는다는 특성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거대한 화면에 한두 종류의 색채를 퍼지듯 칠했다. 그러자 색들이 화면에서 살아나더니 천천히 숨을 쉬기 시작했다.

이주은 건국대 교수 미술사

 

색은 보는 이의 감정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원래 있던 감정의 상태를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다. 로스코는 자신이 칠하는 색채를 배우라 불렀다. 색채는 배우이지만 무대 위에서 아무런 대사도 하지 않는다. 정적 속에서 오직 스스로를 펼쳐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그런 식으로 작품 앞의 관람자를 물들이고, 그 사람의 감정을 색 안으로 스며들게 만든다. 자기 안으로 번진 색을 통해 관람자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예술적 충격이란 마치 섬광처럼 우리의 감각에 균열을 일으킨 후, 경험이라는 데이터 속으로 영구 저장되지 않은 채 급히 휘발된다. 그러므로, 어떤 작품에 자기도 모르게 사로잡힌 이유가 무엇인지, 왜 마음의 울림통이 공명했는지, 그리고 어느 순간에 눈물이 솟았는지,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감각적인 접촉과 찰나의 깨달음은 종종 언어의 영역을 비껴가기 때문이다. 언어는 이것과 저것으로 구획 가능한 현상들을 정리하기엔 좋지만, 그 외에는 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다.

 

60년이 넘도록 색채를 인문학적으로 연구해 온 프랑스의 미셸 파스투로는 그림을 다루는 미술사학자들이 화단의 특성과 시대적 경향에 대해 수십 쪽을 할애하면서도 작품의 색채에 대해서는 몇 줄밖에 쓰지 않는다고 아쉬워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작품을 실견조차 하지 않고, 인쇄본 도록만 들여다보며 글을 쓰고 있단다. 미술사학자는 이미지와 이미지 주변의 맥락들을 언어로 바꾸어 논의하는 사람이다. 그들이 색채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아니 둘 수 없는 이유는 언어의 한계 때문 아닐까. 색채는 감각적인 표현력과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도저히 단어로 일대일 대응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화학도 출신의 젊은 소설가 김초엽의 단행본 속에 있는 ‘스펙트럼’이라는 단편에 색채언어에 대한 상상이 나온다. 우주 탐사를 떠났다가 실종되어 외계 지성 생명체와 함께 지낸 생물학자의 이야기인데, 지구인은 읽을 수 없는 외계 언어가 바로 색채이다. 지구의 학자가 보기에는 그저 수많은 종류의 색들이고, 겹치지 않는 복잡한 배색 중에 간간이 동일 패턴이 반복될 뿐이다. 하지만 외계인은 그 미묘한 색상의 차이를 일일이 의미 단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만일 우리에게 피아노의 음이 혹은 종이 위의 색채가 언어처럼 의미 단위로 다가온다면, 작품 앞에서 울컥하는 까닭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지금은 외계인의 언어처럼, 오직 충격을 받아 섬광처럼 번쩍이는 그 순간에만 알아듣고는 곧 잊어버리는 모양이다.

 

[삶과문화] 이주은 건국대 교수 미술사. 세계일보 / 2022. 07.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