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백수의 일상 - 641. <여행은 生을 사랑으로 느끼는 일>

paxlee 2022. 8. 6. 07:35
여행은 生을 사랑으로 느끼는 일

여행길에서 마음의 섬 발견은
영원과 만나는 ‘현현’의 순간,

빈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볼 때
초절적 환희 같은 행복한 느낌,

여행은 삶을 사랑으로 안는 것
그 진정한 의미를 알고 떠나자.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이상향과 같은 가 보지 못한 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수많은 사람이 여행을 떠나는 것은 피서(避暑)를 하기 위함도 있겠지만, 그것 못지않게 그들의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섬에 가 보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유년 시절, 학교 앞 강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간이역(簡易驛)에서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오면 좋아하다가 그것이 곧 강 위로 뻗어 있는 붉은 철교를 지나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나면 슬퍼했던 일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또, 학교 수업을 마치고 하굣길에 철길을 따라 걸으면서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레일에 귀를 기울이던 일도 잊을 수가 없다.

여행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떤 사람은 여행을 현실 도피라고 말하겠지만, 많은 사람은 창조를 위한 휴식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여행은 우리의 삶과도 같은 신화적인 궤도를 밟아가는 것과도 같아 자아 발견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길을 나서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일상적인 생활의 억압에서 벗어나 순수한 인간으로 참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자유를 느낄 수 있음은 물론 사색과 함께하는 시원(始原)의 샘물을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투명하게 살펴보려면,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여행보다는 혼자서 하는 여행이 좋다. 일상을 떠나 혼자서 여행을 하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조용한 오솔길을 산책하듯이 혼자 여행을 하며 지난 일들을 회상하고 반성할 때보다 경건하게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순간이 또 어디 있을까. 퇴락한 객사(客舍)에 혼자 누워 지난날의 도덕적 잘못을 뉘우치는 것은 레몬 껍질을 씹는 것만큼이나 쓰라리지만, 거기에는 마른 국화 향기와도 같은 침전된 생의 진수(眞髓)가 있다.

여행길에서는 내면적인 자아를 발견하는 순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유리 벽 찻집에 앉아 거리의 군중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볼 때나, 에른스트 호프만의 ‘사촌 집의 구석 창문’에서처럼 장날의 풍경을 내려다보듯 고립된 위치에 앉아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볼 때도 그들 가운데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여행길에서 마음의 섬을 발견한다는 것은 아마도 영원의 세계와 만나는 현현(顯現·epiphany)의 순간이리라. 현현의 순간은 빈 마음으로 사물의 아름다움을 보았을 때 초절적인 환희와 같은 행복한 느낌으로 온다. 아름다운 도시의 낯선 거리를 거닐면서 테라스에 걸어놓은 꽃이나 등불, 또는 은빛 십자가가 있는 교회 검은 지붕을 바라보았을 때 순간적인 황홀감을 느낀다. 이 순간은 내가 나를 잊고 누구를 뜨겁게 사랑할 때와도 같은 것이다.

어찌 이뿐이랴!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분수대의 물기둥이 정지된 듯 뿜어 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또는 이름 모르는 텅 빈 광장을 서성이다가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나 대포 소리를 들을 때도 우리는 현현의 순간을 느끼게 된다. 그림자 없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길을 가다 보면, 현현의 순간은 언제든지 찾아온다. 열차에서 우연히 마주 앉아 부끄러움 속에 몇 마디 말을 나눴던 화사한 여인이 귀착지(歸着地)에 내려 길모퉁이로 사라지며 보이는 작별의 미소에서도 아픔과 함께하는 현현의 순간이 있다.

순수한 자기와의 만남은, 낯선 아름다운 사람과 아무런 목적 없이 만날 때 느끼는 행복의 순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말했듯이, 공포와 두려움의 순간에도 있다. 밤 바닷가에서 요람처럼 흔들리는 파도 소리를 들을 때, 또는 낯선 여관방에서 깊은 잠에서 깨어나 소나기와 천둥소리를 듣고 무서워할 때도 현현의 순간을 느낄 수 있다. 또, 석양에 옛 사원(寺院)의 종루에서 쏟아져 내리는 은빛 종소리를 들을 때는 어떠한가!

현현의 순간은 뉘 집 담 모퉁이를 돌다가 무리 지어 피어 시선을 끄는 장미나 능소화 같은 여름 꽃향내 속에서도 온다. 여름 밤공기와 함께 묻어오는 꽃향기는 시간의 벽을 뚫고 잃어버린 아름다운 과거의 풍경을 현재로 가져와서 빛을 발하게 한다. 회상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꽃향기가 감각의 문을 열어 현현의 바다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이다. 여름의 둔감한 상태에서 꽃 냄새가 회상의 눈물과 함께하는 순간에 느끼는 황홀감은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가 말하는 ‘교감’과도 같다. 보들레르는 여인의 머리카락이나 젖가슴의 향내 속에서 ‘거대한 돔(dome) 모양을 한 하늘의 푸른 빛’과 ‘황홀한 불꽃과 돛대로 가득 찬 항구’ 등과 같은 시구(詩句)를 발견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집을 떠나 길 위에서 순수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영원한 존재로 이어지는 신비스러운 마음의 섬을 성숙하게 포옹하는 것과도 같다. 아니, 그것은 성숙한 삶을 의미하는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의 눈을 뜨고 마음의 섬을 찾아 멀리멀리 여행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풍요로운 여행의 편력은 곧 풍요로운 정신의 편력을 의미한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사람들은 산과 바다로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생에 있어 여행이 지니는 진정한 의미를 알고 떠나는 것과 모르고 떠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여행은 인간의 그리움이 담긴 꽃과 고향을 사랑하는 것과도 같다. 아니, 여행은 생(生) 그 자체를 사랑으로 느끼고 끌어안는 것과도 같다.

- 이태동 문학평론가, 서강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