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백수의 일상 - 681. <베이컨의 귀납법과 베이컨의 회화>

paxlee 2022. 8. 15. 07:21

베이컨의 귀납법과 베이컨의 회화

 

혹시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보았는데,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위대한 화가다. 15세때 어머니의 속옷을 몰래 입어보다가 아버지에게 쫓겨난 이후,  그는 유럽 각지를 떠돌며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그럼에도 1975년 파리 리브 드루아트 갤러리에서 연 전시회 이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베이컨은 주로 초상화를 그렸다. 그의그림은 현대인의 분노, 공포, 위기를 독창적으로 형상화 했다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어긋나게 하기, 중심 잃게 하기, 비틀기, 겹치기, 지우기 같은 기법을 통해 기괴하게 표현된 그의 인물들은 감성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가까이 하기에 결코 쉬운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1981년에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a Deleuze)가 이 기괴한 인물들에 대해 『감각의 논리』라는 한 권의 책을 썼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이미 "20세기 최고의 초상화가"라고 불리는 베이컨을 '구상화가'가 아니라 '형상화가'로 부각했다. 들뢰즈는 역시 포스크모더니즘 철학자인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un Rancois lyoutard)의 개념을 빌려 '구상적인' 것과 '형상적인' 것을 구분했다. 

 

구상적인 것은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며, 설명하는 것이고 서술하는 것이다. 형상적인 것은 대상의 순수한 본질을 환기하는 것이며 드러내는 것이다. 베이컨이 극단의 혐오감을 갖고 피하고자 노력했던 것들이 구상적인 것이다. 

 

 

베이컨의 생각에는 현대 회화란 '제현할 모델'도 없고, '재현해야 할 스토리'도 없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사진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무신론 때문이다. 다음은 영국의 미술 비평가이자 큐레이터인 데이비드 실베스터와 나눈 대담에서 베이컨이 한 말이다. 

 

한편으로는 사진이 삽화와 문서의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에 현대 회화는 과거 회화에 주저졌던 이 기능을 더는 충족할 필요가 없다. 다음으로 과거 회화는 아직도 구상에 회화적 의미를 부여했던 몇몇 '종교적인 기능성들'에 의해 조건이 지어졌지만, 현대 회화는 무신론적이다. 

 

 

여기서 베이컨이 말한 '종교적인 가능성들'이란 무엇인가. 예컨대 엘 그레코(El Greco)의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에서 볼 수 있듯 그림 하나에는 장례식을 치르는 실제 인물들을 그리고, 상단에는 예수와 마리아, 이들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백작의 혼을 그리는 식으로 종교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무신론의 시대인 현대에는 회화가 그런 일을 맡을 필요가 없는 데다. 사진이 기록의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에 회화가 더는 구성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들레즈의 표현으로는 "아무튼 현대 회화는 종교적 감정을 포기해버렸고, 사진에 의해 포위됐기 때문에" 구상적일 수 없다. 그렇다면 현대화가들에게 남은 길은 무엇일까? 들뢰즈는 이렇게 대답했다. 

 

 

"회화가 구상적인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추상을 통해 순수한 형태를 지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추출 혹은 그림을 통해 순수한 형상으로 향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베이컨은 두 번째 길을 택했다. 그는 형상을 찾기 위해 마치 폴 세진(Paul Cezanne)이 그랬듯이 구상에서 '판에 박힌 것'들을 잡아 뜯어냈다. 물론 수법은 달랐다. 세잔은 원근법을 깨뜨리고 원통, 구, 원추 같은 기하학적 형체를 살리는 수법을 사용해 추상화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베이컨은 인물을 그의 배경에서 추울해내고 어긋나게 하기, 중심잃게 하기, 비틀기, 겹치기, 지우기 등의 수법을 사용해 형상화의 길을 닦았다. 이런 작업들을 통해 그들은 각각 대상 속에 숨어 있는 순수한 본질을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베이컨의 초상화에는 '얼굴' 대신 일그러진 어떤 '머리'가 하나 등장한다. 들뢰즈는 이렇게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