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백수의 일상 - 704. <문화 예술 여행기, 영화 속 영국을 가다>

paxlee 2022. 8. 18. 07:01

영화 속 영국을 가다: 잉글랜드 편

 

감성 충만 잉글랜드 여행기

 

 

《영화 속 영국을 가다》는 영화의 한 장면을 장식한 ‘그곳’을 찾아 영화와 함께하는 영국 여행기다. 그 첫 번째 여행지는 잉글랜드이며, 이어서 웨일스ㆍ스코틀랜드ㆍ북아일랜드 편이 출간될 예정이다. 잉글랜드의 아름다운 장소가 배경이 된 영화를 중심으로 그곳에 얽힌 이야깃거리가 가볍게 어우러지며 감성 충만하고 유쾌한 여행기가 펼쳐진다.

윌리엄의 여행 책방이 있는 노팅 힐 거리부터 〈제5원소〉에서 소프라노 가수가 광란의 아리아를 부르던 아름다운 극장 로열 오페라 하우스, 〈미이라 2〉에서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미라들이 부활한 대영박물관, 〈골든 에이지〉에서 펠리페 2세가 전쟁을 선포하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과 정원 예술가들의 꿈의 무대인 첼시 플라워 쇼까지 영국의 대표 도시 런던을 먼저 찾아간다.

잉글랜드는 런던과 그 외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던가.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완전히 다른 영국의 시골 풍경이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저자는 영국의 진정한 매력은 시골에 있다고 말한다. 〈천일의 앤〉의 주인공 앤 불린이 살았던 히버성, 〈오만과 편견〉에서 비를 흠뻑 맞고 온 다아시가 엘리자베스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스투어헤드,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를 촬영한 도싯 지방, 〈제인 에어〉를 비롯해 로맨틱 영화의 촬영지로 사랑받은 저택 해던 홀, 〈미스 포터〉에서 화면 가득 펼쳐진 잉글랜드 풍광의 진수 레이크 디스트릭트까지 영화 속 잉글랜드를 거닌다.

저자가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에 더해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 이야기, 그곳에 얽힌 역사 문화적 이야기는 무겁지 않게 여행의 깊이를 더한다. 여행하며 겪은 유쾌하고 맛깔나는 에피소드는 읽는 재미를 더해 주며 영화의 배경이 된 장소들의 아름다운 사진은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낭만이 가득한 도시, 동화 속에 나올 듯한 시골 마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역사적인 건물들, 감동을 선사하는 더없이 평화롭고 경이로운 자연 풍광은 영국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나의 목적지는 피크 디스트릭트에 있는 스태니지 에지(Stanage Edge)였다.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가 온몸으로 바람을 맞는 장면에 나오는 바로 그 절벽이다. 스태니지 에지는 다크 피크에 있다. 다크 피크는 습지와 검은 토탄으로 이루어진 고원 지대다.


영화에서 엘리자베스가 기암절벽 위에 서 있는 장면을 보고 저기 올라가려면 고생깨나 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각오를 단단히 하고 길을 나섰다. 차를 타고 높고 낮은 구릉을 누비며 가다 보니 저 멀리 스태니지 에지가 보였다. 그다지 높지 않은 언덕에 검은 절벽이 병풍처럼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그 절벽에 접근하는 길이 싱거울 정도로 완만해서 놀랐다. 암벽등반에 버금가는 비장함을 장착하고 갔다가 밑에서 절벽 위까지 쭉 이어져 있는 오솔길(?)을 보니 맥이 풀렸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유모차도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완만한 평탄한 길이었다.


사실 피크 디스트릭트는 국립공원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 국립공원과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나라처럼 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선 높고 험준한 산이 거의 없다. 그래서 대체로 접근성이 좋은 편이다. 우리나라에서 스태니지 에지 같이 생긴 절벽을 보려면 아마 높고 험한 산길을 낑낑거리며 한참 올라가야 할 것이다. 이에 반해 피크 디스트릭트에는 그런 험한 산이 없다. 산이라기보다는 그냥 약간 높은 구릉으로 이루어진 이탄 성분의 습지에 불과하다.


스태니지 에지 꼭대기에 올라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아주 쉬운 방법과 아주 어려운 방법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아주 쉬운 방법을 택한다. 주차장에서 내려 절벽 꼭대기까지 난 완만한 길을 따라 그냥 걸어 올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러 아주 어려운 방법을 택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절벽 바로 밑에서 밧줄을 타고 위로 올라간다. 이날도 이런 방식으로 절벽에 오르는 사람이 꽤 있었다. 이렇게 중력을 거스르는 행위에는 늘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그런 방식으로 절벽을 오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 같은 게으름뱅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어떤 역행의 성취감 같은 게 아닐까. 가까이 다가갈수록 절벽의 위용이 드러난다. 스태니지 에지는 검은색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옛날에는 이곳에 채석장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때 당시 돌 나르는 마차가 다녔던 길이 남아 있다. 절벽은 거대한 팬케이크를 한 장 한 장 켜켜이 쌓아 올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쌓여 있는 모양이 그야말로 기기묘묘하다.

 

그런데 절벽 위로 올라가니 반대편으로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초록의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 것이다. 밑에서 절벽을 바라보고 올라올 때는 초원이 안 보였는데, 그 초원의 끝, 즉 ‘에지(edge)’가 절벽이다. 피크 디스트릭트에는 스태니지 에지 말고도 이런 형태의 에지가 많다. 초원의 끝인 절벽 꼭대기에 서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아! 이 자유의 바람!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도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여기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번잡했던 마음에 평온을 찾았다. 영화에서 키이라 나이틀리가 서 있던 곳이 어딜까 이리저리 열심히 찾아다녔다.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거기 서서 인증샷 한번 찍어 보고 싶었다. 그런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바위가 다 그 바위 같고, 그 절벽이 다 그 절벽 같으니 알 수가 있나. 하는 수 없이 비슷해 보이는 곳을 찾아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보니 전혀 엉뚱한 곳을 찍었더라.  - ‘피크 디스트릭트 & 셔우드 숲’ 중에서

엘리자베스 1세를 비롯해 역대 영국 왕들의 대관식은 모두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치러졌다. 하지만 영화 〈엘리자베스〉의 대관식 장면은 다른 곳에서 촬영됐다. 런던보다 훨씬 북쪽에 있는 잉글랜드 노스요크셔 지방의 요크 민스터다. 요크 민스터는 유럽에서 가장 큰 성당이다. 얼마나 큰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성당 몇 개를 합쳐 놓은 것 같다. 행선지를 묻는 영국 사람에게 요크 민스터에 간다고 했더니 첫마디가 “크다.”였다.


영화 〈엘리자베스〉의 대관식 장면은 이런 요크 민스터의 위용을 그대로 보여 준다. 요크 민스터의 네이브(nave)는 영국에 있는 성당 중에서 가장 길이가 길다. 영화에서 장엄한 합창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엘리자베스 역을 맡은 케이트 블란쳇이 레드 카펫을 밟으며 행진했던 바로 그곳이다. 넓이가 22미터, 길이가 무려 63미터나 되니 정말 행진할 맛이 났을 것 같다. 배우인 케이트 블란쳇이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보다 더 크고 성대한 곳에서 대관식을 치른 셈이다.

 

케이트 블란쳇은 그로부터 9년 후에 나온 영화 〈골든 에이지〉에서도 엘리자베스 여왕 역을 맡았다. 이쯤 되면 가문의 영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영화라도 두 번씩이나 여왕이 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유럽의 성당에 들어가면 그 넓이보다는 높이에 위축된다. 천장이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지극히 높은 곳’에 있다. 그 드높은 천장 위로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청아한 성가대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영화의 대관식 장면은 요크 민스터의 드높은 천장을 보여 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곳 천장은 흰 바탕에 황금빛 보스(boss; 돋을새김 장식)로 장식되어 있는데, 여기에 예수의 생애나 성모 마리아, 아기 예수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다른 대형 성당과 마찬가지로 요크 민스터에서도 신도석과 성가대석이 분리되어 있다. 성가대석을 콰이어(quire)라고 하는데, 합창을 뜻하는 영어의 ‘choir’라는 단어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신도석과 성가대석을 구분하는 스크린에는 왕의 모습을 형상화한 15개의 석상이 서 있다. 영화에서 엘리자베스 여왕 역의 케이트 블란쳇이 바로 이 석상들 앞에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그녀가 입은 의상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초상화에 나온 것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처녀 여왕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머리를 길게 풀고 그 위에 왕관을 쓴 것이나 오른손에 왕홀(scepter)을, 왼손에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구체를 들고 있는 것도 똑같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실제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아니, 오히려 영화 속의 대관식 장면이 실제 대관식보다 더 크고 웅장했을지도 모른다. 요크 민스터의 위용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 ‘요크 민스터’ 중에서

말함 코브 왼쪽에 절벽 꼭대기로 오르는 돌계단이 있다. 이 계단을 올라가야 그 유명한 석회암 페이브먼트(Limestone Pavement)를 볼 수 있다. 영화 〈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사랑을 속삭이던 바로 그곳이다. 400개나 되는 돌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힘들어서 투덜거렸다.


“아니, 얘네들은 사랑을 속삭이려면 지네 동네에서 속삭일 것이지 왜 여기까지 와서 속삭이고 난리야? 힘들어 죽겠네.”
이렇게 투덜대기는 했지만 사실 이 정도는 우리나라 등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계단만 올라가면 되는데 뭐. 정상에 도달하는 순간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인간의 뇌와 비슷한 모습의 울퉁불퉁한 석회암 페이브먼트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정말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풍경이었다. 높은 데서 보면 더 멋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옆에서 한 청년이 드론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 지역은 빙하기에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빙하기가 끝나면서 빙하와 함께 토양과 바위들이 쓸려 내려갔다. 그 결과 밑에 있던 넓은 석회암이 밖으로 드러났다. 석회암은 물, 그중에서도 특히 산성에 약하다. 시간이 지나며 산성을 띤 빗물이 석회암의 갈라진 틈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면서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용해가 진행될수록 틈이 더 넓고 깊어지면서 지금과 같은 특이한 형태의 석회암 페이브먼트가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그 형태에 어떤 패턴이 있다. 인공물처럼 정확하고 규칙적인 패턴은 아니지만 그냥 마구잡이로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 용해 과정을 거쳤기 때문인지 바위 사이의 틈이 상당히 넓다. 발이 푹푹 빠질 정도다. 여기서 로맨틱 영화의 단골 장면인 “나 잡아 봐라”를 찍는 것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풀밭이나 바닷가 모래밭이면 몰라도 이렇게 바닥이 울퉁불퉁한 데서 어떻게 모양 나는 러브 신을 찍을 수 있을까. 그런데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바로 여기서 그런 장면을 연출했다. 영화를 보면 캐서린 역의 쥘리에트 비노슈가 울퉁불퉁한 석회암 페이브먼트 위를 용케도 잘 뛰어다니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를 보고 히스클리프가 말한다.


“눈을 감아 봐. 만약 눈을 떴을 때 날이 화창하게 맑으면 앞으로 네 운명도 그렇게 화창할 거야. 하지만 날이 흐리면 네 운명도 그렇게 되겠지.” 캐서린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다. 그런데 바로 그때 화창했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진다. 검은 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밝았던 캐서린의 얼굴에도 먹구름이 낀다. 울퉁불퉁한 석회암 페이브먼트의 깊은 틈을 용케도 잘 피해 다녔던 캐서린. 그러나 자신의 불길한 운명은 피할 수 없었다. 말함 코브 위의 하늘을 덮었던 먹구름은 그 운명에 대한 예언이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19는 우리 일상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았다. 예전엔 자유롭게 누렸던 것들도 멈춰야만 하고 포기해야 할 게 많아졌다. 해외여행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 여행 아니, 집 근처 나들이조차 어려워진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힘은 굉장하다. 일상을 벗어나 오감을 통해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일은 크나큰 설렘과 즐거움, 활력을 선사한다. 그런데 떠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집콕해야만 하는 현실이 계속되자 무력감과 우울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시 자유롭게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여행의 즐거움을 맛보며 지친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저자가 바라본 풍경과 느꼈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져 지나간 여행을 추억하고 훗날의 여행을 기대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며 더없이 좋았던 그때의 이야기를 전한다.

 

저자 진회숙은 평론가, 칼럼니스트로 저자로 활략하고 있다. 

1956년 서울 출생. 음악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열정에 힘입어 어릴 적부터 음악 하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여기며 자랐다. 이화여대 음대와 서울대 음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월간 '객석'이 공모하는 예술평론상을 수상하면서 음악평론가로 등단했다. 그 후로는 음악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글 쓰기를 즐기는 특기를 살려 방송에서, 강의실에서, 책에서 말과 글로 음악을 하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KBS 클래식 FM을 비롯한 여러 클래식 프로그램의 진행과 구성을 맡아 치열하게 클래식 음악을 알렸다.

 

지금은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장으로, 서울시립교향악단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 강사로, 평화방송 FM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 진행자로 활동 중이다. 더 많은 사람이 클래식 음악이 주는 위로와 기쁨을 느끼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저서로 '클래식 오딧세이', '나비야 청산가자', '영화로 만나는 클래식', '보면서 즐기는 클래식 감상실',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