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백수의 일상 - 743. <슬픔과 분노>

paxlee 2022. 8. 28. 07:24
슬픔과 분노

슬픔보다 분노가 많은 세태
증오는 더 큰 증오 낳을 뿐

슬픔은 인간의 숭고한 감정
함께 나눌 때 더 아름다워

한국사회 증오 갈등 위험수위
방치하면 모든 것 잃고 파국



근년에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은 “슬픔은 없고 분노만 있다”고 말한다. 삶의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어두운 곳은 물론 생을 마감하는 장례식에 가더라도 눈물보다는 차가운 증오와 분노의 불길이 무섭게 타오르는 일이 많은 탓일 것이다.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증오심으로 분노한 사람들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 죽은 자를 외면하거나 또는 무슨 거래나 흥정의 대상(對象)으로 삼는 경우까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불행한 반인륜적인 현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이것은 분노한 사람들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어, 사랑과 연민 같은 고귀한 인간 경험의 영역 밖으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사회적 요인으로 볼 때 이것은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물질문명의 지배적인 현상으로 과거 인간이 갖고 있던 죽음의 권위가 박탈된 탓일지도 모른다.

유대계 독일 철학자이자 평론가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과거 정신문화가 굳건하던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한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의 실제적인 삶이 죽음의 순간에 처음으로 전달될 수 있는 형태”를 띠는 것이 특색이었다. 노벨상 수상 작가 솔 벨로의 소설 ‘허조그’의 주인공, 고독한 퇴직 교수는 어머니의 임종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아름다운 미인이었던 어머니가 임종의 침상에서 불꽃처럼 산화하며 보여주셨던 슬픈 눈빛과 우수에 찬 표정은…행복과 죽음의 반영이었다.” “그 인간적인 우울, 그 검은 피부, 인간이 된 운명에 순종하는 굳어진 주름살, 그리고 눈부신 얼굴은 섬세하고 고운 마음이 슬픔과 죽음으로 가득 찬 위대한 인생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선량한 사람의 죽음과 같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조선조 오백 년 동안 당파싸움이 심하게 벌어지던 때 어느 한쪽이 득세(得勢)하게 되면, 반대파 가문의 삼족(三族)을 멸하는 잔혹한 행위를 자행했는가 하면 죽은 자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剖棺斬屍)와 같은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질렀던 역사는 이해할 수 없이 슬픈 일이다.

그러나 과거 인간적인 위엄을 가졌던 지혜로운 사람들은 아무리 분노에 가득 찬 일이 있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다 같이 슬퍼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경우도 그랬다. 이 작품에 나오는 캐풀렛가(家)와 몬터규가(家)는 오랫동안 원수(怨讐)로 지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이 사랑했던 아들·딸, 로미오와 줄리엣을 죽음의 함정으로 몰아넣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자녀들의 죽음을 깊이 슬퍼한 나머지 서로에 대한 증오심을 버리고 화해의 손을 잡고 그들이 살고 있던 고장에 평화를 가져온다.

증오는 언제나 더 큰 증오를 낳고 인간적인 모든 것을 파멸로 끝나버리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슬픔은 어느 측면에서 보나 분노보다 나약하고 감상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슬픔은 웃음과 더불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가장 숭고한 감정이다. 아무리 힘센 장수(將帥)라도 ‘여인의 눈물 앞에 약하다’라는 말은 인간의 약점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인간의 감정이 얼마나 소중하고 큰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리라.

우리가 길 위에서 무덤으로 가는 영구차를 본다든지, 조화로 둘러싸인 상가(喪家)의 담 너머로 곡(哭)소리를 듣게 되면, 그곳으로 달려가서 상을 당한 사람들과 함께 울어주고 싶은 마음이 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앞서 말한 미국 작가 벨로는 작품 ‘오늘을 잡아라’에서 주인공이 심한 좌절로 질식할 것 같았지만, 군중에 의해 어느 장례식장으로 밀려 들어가 ‘명상적인 시신’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열림을 느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썼다.

‘윌헬름의 몽롱하고 젖은 눈에 장례식장의 조화들과 불빛이 황홀하게 어울려 녹아내렸다. 바다와 같은 장중한 음악이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 그 음악은 숭고하고 행복한 눈물의 망각이라는 힘을 빌려 군중의 한복판에서 자신을 숨기고 있던 그의 마음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간간이 들리는 흐느낌과 오열 속에서 울려 나오는 음악을 들으면서 마음의 궁극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슬픔보다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인간은 비극적 상황에서 다른 사람과 슬픔을 함께할 때, 아름다운 시(詩)를 생산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가진 자들과 못 가진 자들’ 사이의 증오에서 비롯되는 갈등이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 이 같은 비극적인 현상이 계속된다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빼앗고 빼앗기기’ 싸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게 되는 파국(破局)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증오와 분노로 눈이 멀어 인간의 고귀한 감정을 버리는 일은 없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가진 자’는 ‘못 가진 자’의 어려움을 슬픔으로 이해하고, ‘못 가진 자’는 가진 자를 증오할 것이 아니라, 가진 자의 노력을 생각해야 한다. 만일 부당하게 부(富)를 축적한 자가 부끄러움을 모르고 자기 과시욕을 보인다면, 증오하기보다 함께 슬퍼하자.

지금 우리 주변에서는 너무나 많은 희비극적인 현상이 일어나 우리의 의식을 마비시킴으로써 아름다운 인간 감정을 완전히 고갈시켜 버리고 있다. 타인의 슬픔과 어리석음을 증오하고 분노하기보다 함께 슬퍼할 줄 아는 것만이 닫혀 있는 우리의 마음을 열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이태동 문학평론가, 서강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