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의 삶의글

[124 : 삶의글] * 창덕궁 문화탐방을 다녀와서 *

paxlee 2004. 9. 25. 00:04
 

창덕궁 문화탐방을 다녀와서


일시 : 2004, 09, 24. 금요일 오전 10시-12:30

장소 : 창덕궁

비용 : 5,000원


신문을 보다가 창덕궁 문화탐방에 관한 글을 읽고 인터넷으로 참가신청을 하려고 들어가니 10월말까지 거의 예약이 끝나있었다. 다행이 9/24, 9/25, 9/26에 몇 장의 티켓이 남아있어 신청을 하였다.

10시 15분전까지 도착하라고 하여 전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를 나와서 약 5분정도 걸어서 창덕궁 앞에 도착하니 9시 40분이었다. 표를 사서 기다렸다가 10시에 안내를 받아 입장을 하였다.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5개의 궁이 있는데, 창덕궁이 UNESCO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궁의 모습이 가장 잘 꾸며져 있고 부속건물들의 배치와 후원의 정원이 아담한 산속의 수목들 사이에 연못과 정자가 아름답게 배치되어 있다. 그 중에서 소요정과 태극정, 청의정과 함께 옥류천은 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고 있다.


1. 돈화문(敦化門: 보물 383호)

창덕궁으로 들어가는 정문이다. 1412년 태종 12년에 지어졌으나 지금의 문은 1609년 광해군 원년에 중건된 것으로 이중의 지붕은 단청이 아름답다. 궁의 문중에는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인정전으로 들어가자면 금천교(錦川橋)를 지나 진선문(進善門)을 들어서면 좌측에 남향으로 인정전(仁政殿)이 있고 둘레에는 높은 담이 처져있다.


2. 인정전(仁政殿: 보물 225호)

임금의 공식 집무실이며 왕의 즉위식과 외국사신의 접견, 신하들의 하례를 받기도 하는 궁궐의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1405년에 건축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인정전 앞에는 1품에서부터 9품까지 우측에는 문관이 배열하고, 좌측에는 무관이 배열하여 왕을 알현하였다고 한다. .


바닥에는 넓은 네모난 돌이 일정하게 깔려있는데, 면이 반들반들하면 보기는 좋으나 햇빛이 비칠 때 눈이 부시고 비가 오면 미끄러움을 방지하기 위하여 약간의 요철의 모양으로 되어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돌들이 인정전 앞에서 정문 쪽으로 약간 기울기를 두어 물 빠짐을 좋게 하였으며 좌우로도 기울기를 주었다고 하였다.


그 올라가는 계단이 이중으로 되어있는데, 가운데는 왕이 오르내리는 길에는 암수의 봉황이 돌에 새겨져 있고 좌우에는 신하들이 오르내리는 길이 따로 나있었다. 왕의 용상 뒤에는 그림이 걸려있는데, 해와 달은 임금과 신하를 상징한다고 하였으며 5봉으로 이루어진 산이 있고 좌우에 폭포가 흐르고 소나무가 울창한 그림이었다.


3. 선정전(善政殿: 보물 814호)

왕이 평소에 국사를 논의 하는 집무실로 지붕이 유일하게 청기와로 되어 있어 눈에 확 들어온다. 문들이 특이하게도 위에서 고리를 만들어 문을 접어서 위로 올려놓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처마 안에는 부시라는 그물을 쳐 놓았는데, 새들이 집을 지어면 구렁이가 침입할 우려가 있어 그 방지책이로 하였다.


그리고 건물의 추녀에 새 모양의 형상이 조형되어 있었다. 이곳에도 굵은 철사로 새발 같은 모양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도 같은 방지책이라고 하였다. 그 좌측에는 임금님의 서재가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건물도 특이한 점이 햇빛을 가리기 위하여 처마에 높게 청동으로 막이를 만들어 놓았고 그 앞에는 문을 달아 놓았는데, 도르레로 올렸다 내렸다 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 이색적이었다.


4. 희정당(熙政堂: 보물 815호)

왕의 침전으로 어전회의실이 있어 이곳에서 신하들과 국사를 논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뒤에 자동차가 문 앞까지 드나들 수 있게 계단이 없이 평지로 되어있었다. 그 옆에는 대조전이 있는데, 이곳은 왕비의 침전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특이하게 지붕 꼭대기에 용마루가 없이 기와가 둥그렇게 되어있다.


용을 상징하는 왕이 잠을 자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침전이라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었다. 나무를 때면 그을음이 나서 건물을 더럽힌다고 숯으로 불을 피웠다고 한다. 그 꿀둑 높이가 지붕높이와 비슷한 것은 화력을 좋게 하기 위하여 그렇다고 하였다. 여기는 매화틀이라는 간이 화장실을 실내에 놓고 넣었다 빼었다 할 수 있게 사용하였다고 한다.


휘어진 추녀위에는 조각상이 있는데 장상으로 액상을 막기 위한 것으로 삼장법사와 사오정 등으로 홀수로 3, 5, 7, 9, 11개를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이곳에는 9개씩 배치가 되어있었다. 경희루에 가장 많은 11개가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왕실의 배치도를 따라 일별하고 천장문을 통하여 후원으로 나아갔다.


5. 후원(後苑: 정원)=(금원, 북원, 비원)

우측으로 창경궁의 담을 따라 후원으로 오르는 길은 나무가 우거진 넓은 길은 산책길로 그만이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가 빼어나게 설계되어 있다고 하였다. 조금 오르면 부용지(芙蓉池)에 이른다. 가운데 동그란 섬은 하늘을 뜻하고 연못의 네 기퉁이는 땅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연못에는 연꽃이 있었으나 아직 꽃은 피우지 않았다.


부용지 옆에는 부용정이란 정자와 어수문이 있고 그 뒤에는 1776년 정조가 세운 주합루(宙合樓)라는 2층 누각은 아래층은 규장각으로 중앙도서관이고 위층은 도서열람실이라고 하였다. 여기도 임금이 오르는 중앙길과 좌우에 계단길이 있다. 그리고 그 옆쪽에는 연화당 이라고 하는 임금의 휴게소  겸 연회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그 옆쪽 공터에서는 임금이 임시로 과거시험을 실시하던 춘당대라는 곳이 있다. 부용정은 이 시험에서 급제한 선비들을 접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앙부일구라는 해시계가 있었다. 해시계는 사발모양의 움푹파인 안쪽에 정북을 가르키는 뽀족한 끝부분이 해의 그림자로 내부에는 한 시간을 15분씩 나누어 표시하고 외부에는 동지에서 하지까지 24절기를 알려주고 있었다.


24절기는 추분과 한로의 중간지점에 있고, 시간은 10시 3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10시 52분이었다. 우리의 전통시간과 표준시간과의 차이라고 하였다. 해의 그림자로 이렇게 정확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장영실님의 과학적사고가 빛나고 있었다. 여기서 설명이 끝나니 10시 45분이었다. 화장실과 매점이 있어 이곳에서 10동안 휴식을 가졌다.


6. 애련지와 애련정

그곳에서 조금 떨어져 불로문을 지나면 애련지가 있는데 이곳 연못도 전통적인 네모 연못에는 연잎이 무성하였다. 연꽃은 번영과 다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애련정자에 비치는 낙영의 너울너울 춤추듯이 넘실거리는 그림자가 정자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율동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낙영 그 설명을 들으며 감상을 하여야 실감이 난다. 그리고 둥근형의 연못이 하나 더 있어 세개의 연못이 있다.


이 연못 주위에도 정자가 있다. 관람정은 배를 뛰워 놓고 구경하듯이 정자가 부채꼴로 배형상을 하고 있어 실제로 배를 탄 기분이 난다고 하엿다. 그 언덕위에는 소명세자의 독서청 승재정이 있어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뛰어나고, 존덕정은 특이하게 유일한 6각형정자이다. 정자 중앙 천장에는 청룡황룡이 그려져있고 정조의 현판 만수명월주인옹자서(萬水明月主人翁自序)라는 글이 걸려있다.

 

존덕정 정자옆에도 작은 연못이 있는데, 이곳의 물은 너무 맑고 투명하여 푸른빛이 비치고 있다. 파란 수초들이 가득히 자라고 있었으며 그 밑 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여 그 깨끗함이 우리를 유흑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곳은 유일하게 자연수가 나오고 다른곳은 모두 지하수를 이용한다고 하였다.


7. 소요암(逍遙岩)과 옥류천(玉流川)

1636년 인조 14년에 소요암 바위를 깎아 맑은 물이 바위둘레의 동그란 홈을 돌아 폭포처럼 떨어지게 만들어 놓은 것이 옥류천이다. 임금과 신하가 이곳에 둘러앉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어며 즐기던 곳이라고 하였다. 여기에도 주위에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 정자가 있으며, 농산정에는 벼를 심어 벼 이삭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곳에는 주방과 온돌방이 있는 집이 있어 왕이 이곳에서 신하들과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침수를 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왕실에서 사용하던 샘이 있는데, 무거운 돌로 사각지붕을 만들어 덮어놓았다. 그 주위 바위에는 파란이끼가 살아 숨쉬고 있어 들어가지 못하게 줄이 처져있었다. 여기는1976년부터 개방을 제한 하다가 올해 처음으로 관람특별코스로 개방하였다고 한다.


8. 연경당(演慶堂)

옥류천에서 산길을 내려오다 보면 장락문(長樂門)이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궁궐 안에 사대부 집을 모방하여 지은 120여칸 민가형식의 집이어서 단청이 없고 연꽃무의가 곳곳에 조각되어 있고 장양문은 사랑채를 들어가는 문이고 수인문은 안채로 연결되는 문이 분리되어 있는데, 가운데 쪽문이 있어 사랑채에 손님이 오면 됫돌 위에 신발의 수를 헤아려 손님접대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선향재는 서재로 이곳에서 독서를 하는 곳이 있는 것을 보면 그 옛날부터 우리들의 선조들은 책을 가까이 하고 학문을 즐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채에 와서 보니 방에 불을 피우고 가운데는 마루방이 무수히 많은 방이 연결되어 있다. 앞뒤 좌우에도 모두가 방들이다. 담 넘어 뛰 쪽에는 살림살이를 하는 곳간과 부엌 등이 별도로 되어있다.


기우제를 지내던 희우정(喜雨亭)이 있고, 내의원도 있으며 말기에 개화운동가 김옥균이 삼일천하의 개혁을 모의하던 관물원도 관리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외진 곳에 위치하고 창경궁과 후원으로 연결된 길이 일어 피신하기에도 좋은 장소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차고에는 임금의 어가와 고종이 타고 다녔다는 캐딜락과 다임슬러 자가용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여 창덕궁의 면모를 일별하고 후원의 연못과 정자들의 다양한 모양과 왕실의 정원이 인간과 자연의 조화 속에 우거진 수목들의 침묵에서 우리 선조들이 생활하던 문화의 단면들을 보면서 그들의 지혜가 지금도 빛나고 있음을 직접 보고 느끼고 감동하면서 자신을 한번 더 되돌아보게 하는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