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다양한 문화

-* 낮은 산의 깊은 울림 *-

paxlee 2007. 7. 21. 11:33

 

                낮은 산의 깊은 울림

 

김기덕 감독의 <수취인불명>이란 영화가 있었다. 미군병사가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산으로 막혀 있는 숨 막히는 이 땅이 지겨웠다고 절망감을 토로하던 대사를 들으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이방인에게는 숨 막히는 이질감일 수 있겠구나 싶었다. 태어나 뿌리 내리고 자라온 땅과의 일체감은 단지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을 구분하는 정도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산 아래서 태어나 산을 오르내리며 자랐고 산등성이에 지어진 학교를 다녔거나 숨 가쁘게 경사 급한 언덕 위 셋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기도 했고, 산을 깔아뭉개고 들어선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가 하면, 산을 관통한 터널을 달려 일터로 가고, 하물며 죽어서도 산으로 간다.

 

온 국민의 삶터가 모두 산이다. 우리 국토에는 산과 또 다른 산사이에 쉼표 같은 여백이 있을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산은 종종 일상의 저자와 구별된 공간으로 치부 되곤 한다. 일상에서 비껴난 공간, 쫓겨난 공간, 특별히 간직해놓은 공간. 산은 숨 가쁜 일상에서 벗어나 숨을 돌리는 곳이기도 하다. 

 

일상의 공간에서 터지고 깨진 패배자들이 몸을 의탁하러 가는 곳, 돈과 권력 같은 일상의 가치 따위와는 다른 무엇을 추구하며 수행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모여들곤 한다. 큰 산에서 흘러내린 야트막한 산줄기가 강장동물의 촉수처럼, 골목이 굽어보이는 일상의 공간에까지 뻗어와 저자거리의 우리들에게 선지자의 영감을 흘려보내는 게 우리 삶터의 흔한 풍경이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내 마음의 산은 언제나 갈급하게 그리워하던 설악산이나 지리산이 아니라 잘난 것 없이 야트막한 동네뒷산들이었음을 깨닫는다. 나고 자란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뻗어 내린 북악산 줄기는 걸음마를 떼고 난 뒤부터 아버지의 손을 잡고 무수히도 걸었다. 이른 새벽, 정릉 약수터로 가는 길에는 어둠과 정적에 휩싸인 가난한 이웃들이 저마다 감당키 버거운 삶의 무게를 침묵으로 끌어안고 수행자처럼 점점이 걸어가곤 했다.

 

학생운동 때문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 봉천동 달동네에 숨어살던 십오륙 년 전, 나는 틈만 나면 갑갑한 옥탑방을 빠져나와 봉천동과 상도동 경계에 있는 국사봉에 자주 올랐다. 그 시절은 암담했지만 봄이면 개나리가 화사했고, 진달래와 벗꽃이 한 차례 피고지면 신록이 번지는 산 아래 펼쳐진 달동네도 그럴듯해 보였다.

 

지금은 다 뭉개지고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섰지만, 당시 언덕아래로는 꼬불꼬불 실핏줄처럼 뻗어있는 골목길을 따라 초라한 집들이 낮은 지붕을 맞대고 수런수런 정담이라도 나누는 모습으로 들어차 있었다. 그 동네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던 내 인생에 대한 걱정이, 어수선하고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그 산동네의 풍경에 자연스럽게 이입 되면서 슬며시 어금니를 깨물게 되곤 했다. 잠시 경기도 안산에서 살 때도 틈만 나면 공단 옆, 여태도 이름을 알 길 없는 야트막한 산 위에 자주 올랐다. 콘크리트 팔각정이 있는 산꼭대기에 오르면 살풍경한 안산공단의 풍경과 철책 너머 시화호에 갇혀 질식할 것 같던 잿빛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잿빛 공단 하늘 위로도 노을이 곱게 물들곤 했는데 그럴 때면 소식을 끊고 살던 가족과 친구들 생각에 코 끝이 찡해지곤 했다. 아마도 내가 그 산을 오르는 심정과 실향민들이 명절 때 북녘과 가까운 임진각에 가서 시름을 달래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6년 전, 나는 경기도 광주의 시골마을로 이사를 했다.  

 

셋집살이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앞뒤 안 가리고 덜렁 작은 집을 지어 거처를 옮긴 것이다. 이사를 앞두고 아내와 나는 희망에 부풀었다. 뒤란 밖으로 곧장 산에 오를 수 있다는 점이 얼마나 좋았던지. 이사를 하기도 전에 종로의 중앙지도에 가서 우리 동네의 2만5천분 1, 5만분의 1 축척의 지형도를 사서 먼저 도상에서 지형을 익혔다.

 

가족들이 함께, 지형도에 표기된 작은 호수를 찾아가고, 길 표시도없는 능선 길을 따라, 어린 두 딸의 손을 잡고 야트막한 산들을 걸어 다녔다. 봄이면 겨우내 쌓여있던 낙엽을 뚫고 원추리가 솟아오르고, 희미한 안개처럼 진달래가 번져가는 광경을 얼마나 반겼는지 모른다. 인적이 드물었던 마을 산들은 능선을 따라 잡목과 풀들로 군데군데 지워지긴 했어도 희미하게나마 끝없이 길이 이어져 있었다.

 

거미줄을 걷어내 가며 주변 봉우리들을 하나씩 밟아가던 그 무렵, 마을에서 가장 높은, 이천과 광주의 경계에 있는 천덕봉에 오르면 멀리 남한강이 유장하게 흘러가는 모습이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었다. 현관문 앞에서 등산화 끈을 묶고 마을을 가로질러 천덕봉에 오른 뒤 능선을 타고 집 뒷산을 넘어 뒤란으로 돌아오는 길은 네 시간은 족히 걸리는 만만찮은 등산길이다.

 

게다가, 천덕봉 아래 8부 능선쯤에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선생의 묘가 있다. 서른 즈음까지도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일본군과 관에 의해 30만 명이나 살육을 당했다는 갑오년의 봉기를 반외세 반봉건 계급투쟁으로만 이해했던 것 같다. 게다가 처음부터 좀 더 화끈하게 봉기를 선동하지 않았던 해월선생에 대해서는 떨떠름한 반감마저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나이 마흔을 넘어 천덕봉을 오르내리며 생각한다. 한 순간 싸움에 자기를 내던지는 일은 어찌 보면 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수모와 굴욕을 오래 감수하면서 마음 속 깨달음을 일관되게 실천하는 일은 예사로이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해월 최시형 선생의 묘소 앞을 지날 때 마다 스스로 머리가 숙여지고, 나를 되 돌아보게 된다.

 

여자와 아이를 가축이나 다를 바 없이 천대하던 19세기 조선에서 아이를 치지 마시오. 아이도 한울님을 모신 귀한 존재이니 아이를 치는 일은 한울님을 치는 일이요 한 해월 선생의 말씀을 두고두고 되새기게 된다. 뿐만 아니라 양반과 상놈이 다른 세상 인종처럼 차별되던 세상에서, 그 완고한 상식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모든사람이 하늘이라고 한 말은 가히 천지개벽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무려 38년 동안이나 산길을 밟으며 관의 추적을 피해 다닌 도망자였고, 여느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죽어갔다. 어쩌면 그의 수많은 깨달음의 말씀보다 더 큰 울림을 주는 대목이다. 인생의 순간들마다 나와 함께 했던 기억조차 못하는 수많은 작은 산들이 있었을 것이다. 조금도 잘난 것 없는 우리와 닮은 모습으로 일상의 공간에 뒤섞여 있는 낮은 산들을 걷는 일은 알피니즘과 조금도 인연이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의 공간에서 몇 발자국만 벗어나도 전혀 새로운 시선으로 스스로와 주변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어 그 산을 걷는 일이 좋다. 그것이 명상이니 수행이니 하는 일들과 크게 다른 일도 아닐 것이다. 아무리 높은 산도 그 산 줄기의 끝 자락을 지키고 있는 낮고 얕은 산에서 시작하여 산을 오른다. 그래서 낮은 산의 깊은 울림은 능선과 계곡을 따라 정상으로 이어진다.  

 

 /글 김성희 모심과 살림 연구소· / [월간 마운틴 2005,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