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이 클라이머의 삶] 김기섭씨 *-

paxlee 2008. 2. 6. 15:28

  

             [이 클라이머의 삶] 김기섭씨

 
국내 최다 암릉·암벽 루트 개척한 김기섭씨
      "산 오른다 생각하며 장애 이겨내고 있어요"

               

                 ▲ <사진=허재성 기자>

 

           김기섭(金起燮·46)은 벌써 1년 넘게 병상에서 지내고 있다. 양팔을 얼굴 높이까지 치켜올릴 수 있다는 것 외에 그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한 해 전까지만 해도 암릉과 암벽에 새로운 길을 내겠다고 설악의 곳곳을 휘젓고 다니고, 북한산과 도봉산 바위 곳곳을 파고들던 그였다.

       2006년 11월19일 오전 당시 코오롱등산학교 강사였던 그는 졸업생들과
함께 북한산 인수봉을 올랐다. 대슬랩을 거쳐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B코스 초입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기섭은 망설이다 비교적 사람이 적은 아미동길로 코스를 틀기로 마음먹 었다. 그리곤 제1피치 등반에 나섰다.
인수봉서 10여m 추락 뒤 3,4번 경추 골절

완경사 슬랩을 오르고 역층 크랙을 올라선 다음 크랙 구간으로 접어들었다. 크랙 상단부가 불룩 튀어나온 항아리처럼 생겼다 하여 ‘항아리크랙’이라 불리는 크랙은 몸을 크랙에 집어넣고 팔과 다리로 바위를 밀면서 오르는 게 안전하기는 하지만 대개 그보다는 힘이 덜 드는 레이백 자세로 오른다. 기섭도 평소와 다름없이 레이백으로 올랐다.

그런데 5m쯤 오르다 오른쪽 발을 페이스에 대고 밀면서 일어서는 순간 쭉 미끄러지고 말았다. 바깥으로 몸이 나가면 수직벽으로 떨어진다는 생각에 침니 안쪽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추락은 멈춰지지 않았다. 게다가 추락을 멈출 수 있는 턱에서 튕겨 나가면서 몸이 뒤집힌 채 역층크랙 아래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10여m를 떨어진 뒤 슬랩 위에서 거꾸로 매달린 그는 머리에서 피가 나고 있다는 사실은 느낄 수 있었으나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 96년 개척 직후 경원대길을 등반하는 김기섭씨. <사진=정정현 부장>
급히 출동한 경찰구조대와 119구조대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옮겨진 기섭에게는 이후 모진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단 결과 3, 4번 경추 골절이었다. 1, 2번 골절을 피해 목숨을 잃는 일은 피했으나, 재활치료를 마친 뒤에도 하반신마비는 회복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후 기섭은 두 차례의 경추 수술을 받은 뒤 재활치료에 들어갔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욕창으로 5개월간 곤욕을 치르는가 하면, 하체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뼈가 석회화하는 희귀병인 이소성골화증으로 인해 대퇴부 골절상을 당하고 말았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피눈물 나던 시간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경추 골절 환자는 초기 재활운동이 가장 중요한데 초기에 무려 8개월간이나 꼼짝 못하고 누워 지냈으니 말이에요.”
                ▲ 설악을 유난히 좋아했던
        김기섭씨는 토왕골·노적봉·만경대·석화사골에 6개의
        루트를 개척했다.
기섭은 지난 12월9일부터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삼육재활병원에서 재활치료는 받고 있다. 아침 6시 일어나 밤 10시 다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재활운동에 전념한다. 현재 그는 양팔은 움직일 수 있으나 손목 이하로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손가락은 거의 사용하지 못한다.

“재활치료사에게 치료 받을 때는 정말 ‘죽음’이에요. 어찌나 아프고 힘든지-. 앞으로 1~2년은 더 병원에서 지내야할 것 같아요. 그래도 이만하면 많이 좋아진 거예요. 밥도 먹을 수 있으니까요.”

기섭은 어린 시절부터 바위와 함께 살아왔다.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7살 때 서울로 올라온 그는 한양중 3학년 때 산이라는 세계에 입문했다. 당시 독실한 크리스천을 꿈꾸며 교회 활동에 열중하던 그는 유아세례를 받는 등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닌 친구들과 자신과 뭔가 이질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종교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 싶었는데 끼리끼리 어울린다고나 할까요. 그런 것에 대한 서운함이었겠죠. 그래서 한동안 방황하다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면 속얘기를 털어놓은 친구와 둘이서 도봉산에 갔어요. 산에 가면 갑갑한 속이 풀릴까 싶어서였죠.”

무작정 도봉산행 버스를 탔다. 그리곤 버스종점에 내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산으로 들어서는 이들을 좇아갔다. 그들이 배낭을 푼 곳이 석굴암 아래 야영장이었다. A형 텐트를 치고, 고체연료에 밥을 해먹고 자려는데 누군가 텐트를 두드렸다. 함께 야영하기로 약속한 동료가 올라오지 않는 바람에 잘 곳이 없는 용암산악회 회원이었다. 산과의 인연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튿날 아침 올라온 용암산악회 회원들은 산에 함께 다녀보지 않겠냐고 꼬드겼어요. 빠알간 배낭을 미끼로 내건 유혹에 안 넘어갈 수가 없었죠.”

▲ 별길 등반을 마치고 후배와 함께 만경대에 오른 김기섭씨(왼쪽).

안전벨트도 없이 바위를 타던 시절이었다. 암벽화도 되는대로 신고 바위를 탔다. 그래도 즐겁고 재미있었다. 78년 서울고에 입학하자 잠시 갈등이 생겼다. 서울고 산악부 OB 모임인 마운틴빌라는 꽤 잘 나가는 산악회였다. 그래도 선배들과 의리를 지켜보겠다는 생각에 용암산악회와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산악회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새로운 유혹은 또다시 찾아왔다. 악우회였다. 악우회 멤버들이 국내 최초로 알프스 3대 북벽 완등에 성공한 직후였다. 마침 악우회 회원이었던 친구 형은 산에 한창 빠져 지내던 기섭을 산악회로 끌어들였다.

이후 기섭은 열정이 더욱 뜨거워졌다. 윤대표, 허욱, 유한규, 임덕용 등 기라성 같은 선배 산악인들과 함께 줄을 묶는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사실 기섭은 스스로 생각해도 바위 체질은 아니었다. 단신에 팔다리가 짧다 보니 핸디캡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선천적으로 겁도 많아 중요한 크럭스에서는 발이 떨어지지 않고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곤욕을 치르곤 했다. 그런데도 선배들은 기섭을 아껴주고, 기섭은 그런 선배들이 너무도 좋았다.

         ▲ 98년 1월 두타산에

         서 폭설을 헤치고 나오는 김기섭씨.

 

술 좋아하고 사람 좋기로 이름난 산꾼

기라성 같은 선배 산악인들과 지낼 때는 뒤따르는 것으로도 등반이 가능했지만, 82년 경원대 산악부를 창립하곤 상황이 달라졌다. 악우회가 흐지부지되면서 파생된 요반구락부 회원으로 활동하다 그 산악회도 유명무실해지자 동년배끼리 다니자는 생각에 대학산악부를 창립했다. 새내기이자 창립멤버 10여 명 중 클라이밍을 해본 사람은 김기섭이 유일했다.

“산을 동경만 해왔지 실제로는 거의 다닌 적이 없는 친구들이었죠. 그렇다고 매일 워킹산행만 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요. 할 수 없이 제가 앞장서서 이끌었어요. 국산 자일에 확보물 등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등반하자니 힘이 많이 들기는 했죠. 그래도 즐거운 시절이었어요. 특히 동기 몇 명이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뒤로는 미친 듯이 바위를 찾아다녔으니까요.”

김기섭은 등반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루트파인딩에 관한 한 남다른 능력을 지녔다. 그가 원하는 등반선은 어렵거나 독특한 선이 아니다. 아름답고 자연스런 선이다. 대학 1학년 시절 설악동을 출발해 화채릉~대청봉~서북릉으로 이어지는 능선종주산행에 나섰던 그는 권금성을 오르던 중 노적봉에 매료된다. 피라밋 형상의 노적봉은 너무도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6년이 지난 88년 여름 그는 목적 달성에 나섰다. 그러나 길을 제대로 몰랐던 그는 엉뚱한 길로 접어들어 곤욕을 치르고 말았다. 그런데도 노적봉을 오르는 사이 너무도 가슴이 설레었다. 아름답고 자연스런 등반선이 눈에 띄었다.

“이듬해 여름 그 선을 따라 올랐어요. 손을 잡는 곳마다, 발을 딛는 곳마다 에델바이스가 피어 있었어요. 거의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뒤통수를 한 대 맞는 느낌이 들더군요. 눈앞에 토왕폭이 나타난 거예요.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물줄기가 거대한 폭포를 따라 쏟아지고, 그 물이 굽이지는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광경이 한눈에 들어온 거죠. 등반 도중 소낙비를 맞았어요. 그러고 나자 더 환상적인 광경이 이어지지 뭐예요. 달마봉쪽에서 쌍무지개가 떠올랐어요.”

▲ 경원대길 마지막 침봉을 오르는 김기섭씨.
 
경원대 국어국문과 출신인 기섭은 시인이기도 하다. 그 길을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이라 지었다. 그 이상 적절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곤 곧바로 한편의 시를 위한 길에 봉헌하는 시를 지었다. 제목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이다.

‘암벽화 끈을 조이며 / 이마에 붉은 스카프를 묶는다. / 피너클 아래 까마득한 / 소토왕골의 / 시퍼런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 우리가 가는 이 길은 / 동해 푸른 바다가 생기고 / 바람이 생기고 / 우리가 처음인지도 모른다…(중략)…우리는 / 인간의 언어를 다 동원해도 / 표현치 못할 / 한 편의 장엄한 서사시를 보았다. / 그리고 / 푸른 바다 / 동해가 밀려들고 /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리꽂는 / 저 까마득한 수직의 물줄기 / 우리가 구름 위에 서 있다는 것을 / 바람 가운데 있다는 것을 / 태어난 처음 비밀처럼 깨달았다.’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을 만든 뒤 그의 개척등반에 대한 열정이 나날이 뜨거워져갔다. 설악산과 북한산을 유독 좋아했던 그는 백운대에 ‘시인 김동엽길’(93년), ‘녹두장군길’(94년), ‘김개남장군길’(94년)을, 노적봉에 ‘경원대길’(96년)과 도봉산 자운봉에 ‘배추흰나비의 추억‘(98년)을 개척하고, 설악산 토왕골 경원대리지(96년)와 ’별을 따는 소년들‘(97년), 설악산 망경대 별길(99년)과 석황사골 몽유도원도(01년) 등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암릉이나 벽등반 루트를 개척해왔다.

“설악산 별길은 오련폭에서 망경대로 이어지는 루트에요. 경치가 죽여줘요. 오련폭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풍덩 뛰어들고 싶을 정도지요, 제주도 중문암장에도 개척한 게 있어요. ‘푸른 물결의 선율’, ‘어느 모델의 하루’ 두 코스예요. 해안 관광지다 보니 이름을 그렇게 짓게 되었어요. ‘배추흰나비의 추억’은 개척 당시 산에서는 보기 힘든 배추흰나비가 날아들었어요. 거기다 추억이란 단어만 덧붙인 거죠.”

▲ <상> 휠체어를 미는 연습을 하는 김기섭씨. / <하> 재활치료를 받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자칭 386세대라는 그는 안티 성향도 높다. ‘시인 신동엽길’, 녹두장군길, 2003년 설악산 장수대 석황사골에 개척한 ‘체 게바라길’ 루트 등에는 사회주의 성향이 높은 인물들의 이름을 루트명으로 삼았다.

그가 이렇듯 개척등반에 심혈을 기울여온 까닭은 무엇보다 남들이 안 가본 길을 가장 먼저 가고픈 마음 때문이었다. 그는 “자화자찬 같지만 제가 개척한 길은 대부분 아름답고, 특히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은 언제 가도 매력적이고 또다시 찾고픈 암릉”이라 말한다.

그는 사고 전까지 암릉과 암벽 루트 14개를 개척했다. 가히 국내 최다 개척등반가라는 평을 들을 만한 클라이머인 것이다. 그 사이 위험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거의 의식도 못한 채 넘겼다. ‘별을 따는 소년’의 첫 피치는 100~110도의 오버행이다.

“거기를 겁도 없이 확보가 없는 상태에서 넘어섰어요. 파트너가 없어 혼자 나섰던 적도 많았죠. 아무래도 직장 다니는 친구들과 시간 맞추기는 어려우니까요. 그럴 때는 매달아놓은 로프를 어센더로 확보해가면서 루트를 개척하죠. 설악산은 암질이 물러 볼트 하나 박는 데 10~20분이면 되지만 노적봉 같은 바위는 워낙 단단해 하루종일 망치질해봤자 한두 개 박으면 고작이에요. 당연히 힘들죠.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니까요.”

그는 산꾼들 사이에서 엉뚱하기로도 이름나 있다. 사실 그는 변변한 직업 한 번 못 갖고 젊은 날을 보냈다. 등산잡지사에 한두 해 지낸 게 전부다. 하지만 그는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지내왔다. 오히려 어느 자리이건 남들을 즐겁게 하는 데 애를 써왔다. 요리 솜씨도 뛰어나 야영장에 도착해 배낭을 풀어놓으면 앞장서 칼을 들고, 각종 야채를 썰어대기를 즐겼다. 

많이 마시지는 못하지만 술을 마다해보지 않았을 만큼 술도 즐겼다. 10여 년간 인연을 맺어온 기자는 8년 전 두타산행에 나섰다 댓재 고갯마루 아래의 식당을 숙소로 잡았다. 소주 한 병씩 나눠 마신 뒤 잠자리를 펼 즈음 그는 식당 밖으로 나섰다. 딱 한 잔 술이 모자란다며-.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었다. 그는 딱 한 잔 담긴 소줏잔을 손에 들고 그 가을밤을 즐기다 스스르 잠이 들었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얼굴로 떨어지는데도 그의 잠든 얼굴에는 행복감이 넘쳤다.

‘소주잔에 무수히 아롱지는 달빛을 받아 마시면 / 소주 맛이 한결 좋을 거다. / 내 오래된 친구여. / 우리 술잔을 부딪칠 때마다 / 지상의 가장 높은 바람과 그 맑은 달빛으로 / 세상사에 찌든 삶의 때를 벗겨내며 / 그 동안 하고 싶었던 삶의 잔잔한 이야기로 / 세상살이 멍든 상처 씻어내고 / 그 빈 자리에 / 우리가 오랜 세월 함께 했던 산을, / 그리고 우리의 우정을 / 정갈하게 담아놓자.’ - ‘술 땡기는 날’(김기섭)

“멀리서 바라보면 제가 오르는 기분 들 거예요”

▲ 한편의 시를 위한 길 개척 직후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기섭씨.

 

2005년 홍천강에 ‘별과 바람과 시가 있는 풍경’이란 강변 리지도 개척한 그는 2006년에는 영월 서강에 ‘봄날은 간다’와 ‘내가 눈물처럼 사랑했던 여인’ 2개 루트를 개척하다 말았다.

“아마 완성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변 리지로 떠오를 거예요. 암릉을 오르며 유유히 흘러내리는 강물을 보는 감흥은 다른 데서는 맛볼 수 없죠. 사실 어떤 루트든 개척 중에 이름을 짓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서글픈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회한이 들기도 하고 불운한 앞날을 예측했기 때문인 듯싶어요.”

그는 다섯 살 때 뒷산이 무너져내리면서 묻혔다가 아버지가 급히 꺼내준 덕분에 목숨을 구한 일, 초등학교 2학년 때 행당동 집 부근의 축대에서 놀다가 10여m 아래로 떨어진 일 등등 그동안 위험했던 상황을 하나 하나 열거한 뒤 “그렇지만 이번에 사고를 당했을 때는 이제 끝났구나 싶었다”며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말한다.

그는 분명 지금 폭풍설 몰아치는 광야를 걷고 있을 것이다. 눈 덮인 병원 앞마당에서 휠체어를 미는 연습을 할 때 그의 얼굴에는 굳은 의지가 넘쳤다. 그는 자신이 시를 통해 말했듯이 지금 눈보라 몰아치는 설악의 토왕폭을 오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보라가 부른다. / 눈보라 끝에 그리운 설악산이 보이고 / 마음은 벌써 토왕폭을 오른다. / 우리는 한국대학산악연맹 동지들 / 달빛이 쏟아지는 설동(雪洞)에서 / 전설이 흐르는 술잔 위에 낯익은 노랫소리 부르며 / 내일 빙폭을 이야기한다. / 산악연맹 동지, 동지들이여. / 내일은 서로의 가슴속에 찬란히 빛나는 피켈을 잡고 / 더욱 더 높은 정상을 향해 / 불붙는 기상으로 토왕폭을 오르자. - ‘산이 우리를 부르거든’(김기섭)


그는 한두 해쯤이면 휠체어를 마음대로 밀고 다닐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며 재활치료에 매진하고 있다. 3년 전 그는 태국 프라낭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해안에 솟아오른 해벽들이 무척 매력적이었고, 주변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곳에다가도 루트를 하나 내는 게 꿈이었다.

“손가락 하나 꼼짝 못했는데 이제 소줏잔을 입에 갖다댈 정도로 회복했어요(웃음). 병원에서 퇴원하게 되면 영월 동강을 찾을 거예요. 제 힘으로 길을 완성시킬 수야 없겠지요. 그래도 후배들이 루트를 개척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나마 바라보면 제가 오르고 있다는 느낌을 찾을 수 있을 듯싶어요.”

병상에 누워 있는 그의 얼굴을 볼 때 멀쩡히 걸어다니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그는 장애를 담담하게 이겨내고 있었다. 그가 설악산 노적봉에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을 개척하고, 노적봉에 경원대길을 볼트를 박기 위해 망치를 휘둘러댈 때처럼-.

-/ 글 한필석 차장대우 / 월간 산[459호]20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