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산악계에 살아있는 전설 보닝턴 *-

paxlee 2008. 2. 21. 21:39

 

     영국 산악계 살아있는 전설 보닝턴

 

        [이용대의 나는 오늘도 산에 오른다] <2>

오그레에 오른 더그 스콧이 발목이 부러진 채 기어서 산을 내려가고 있다. 앞에서 보닝턴이 로프를 이용해 그를 끌어주고 있다. Chrisbonington Picture Library 제공

산쟁이 사이에 ‘산 좋아 출세한 사람 없다’는 비웃음 섞인 농담이 있지만, 이 말이 무색하리만치 산을 잘 타 출세한 사람도 있다. 프랑스의 모리스 에르조그는 8,000m급 산 안나푸르나, 처음 오른 것을 발판 삼아 엔진니어에서 신분 상승의 가도를 달린다. 네팔 국왕으로부터 ‘쿠르카 무사훈장’과 용자(勇者) 칭호를 받았으며 프랑스 국립스키등산학교 교장, 샤모니시장, 국제올림픽위원, 체육부 장관을 차례로 역임했다.

 

머머리 같은 걸출한 등산가조차 이단자로 내몰아, 권위의 상징인 알파인클럽 입회를 거절한 보수적인 영국사회에서는 산 잘 타는 보통사람이 기사작위를 받고 출세한 일이 흔치 않다. 영국에서 산 잘 타 작위 받은 사람은 에베레스트를 초등한 존 헌트와 에드먼드 힐러리 그리고 데이빗 스털링과 크리스 보닝턴 정도다. 이들 중 생존자는 보닝턴 뿐이니 그를 살아있는 전설이라 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그는 1996년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보닝턴은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한 굵직한 등반을 감행, 세계 등반사에 한 획을 그었다. 70년 안나푸르나 남벽을 올라 히말라야 최초로 거벽등반시대의 문을 열었다. 75년에는 세계 최난(最難)의 장벽이라는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올라 고산거벽등반의 탁월한 전술가로 인정받는다. 산에서 능숙한 전략을 구사하는 그의 저력은 영국 로열밀러터리아카데미에서 군사학을 배우고 졸업 후 왕립탱크연대 장교로 근무한 경력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는 “등산에서 필연적인 요소는 자기 만족감이며, 남이 오른 정상과 같은 길은 가지 않는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여러 동료를 잃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사람 잡는 원정 대장’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다. 조 태스커, 피터 보드맨, 에스쿠트, 마이크 버크 등 쟁쟁한 산꾼이 보닝턴과 함께 등반하다 희생됐다.

 

영국은 히말라야 등반에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데 보닝턴이 그 많은 부분과 관련 있다. 그는 77년 아무도 오르지 않은 공포의 산 오그레(7,285m)를 더그 스콧과 함께 목숨을 걸고 등정했다. 영국 동화에 등장하는 오그레는 ‘사람 잡아먹는 괴물’이다. 1892년 카라코람에 처음 들어간 영국인 마틴 콘웨이경이 이런 이름을 붙였는데 그곳 원주민들은 바인타브락이라 했다. 지난 30년간 30개의 등반대가 도전했지만 두 팀만이 성공했으며 초등 후 재등에 성공하기까지 25년이 걸렸다.

 

인수봉 25배 높이를 지닌 화강암 절벽만 2,500m에 이른다. 당시 보닝턴과 스콧은 해질녘 정상에 올라 로프 하강을 했다. 아이젠을 벗은 채 내려오던 스콧은 얇은 얼음을 밟고 미끄러지면서 바위와 충돌, 우지직 소리를 내며 두 발목이 부러졌고 보닝턴도 갈비뼈가 부러지고 폐렴증세를 보였다. 캄캄한 밤에 두 사람은 7,300m 고도에서 고립됐는데 이들과 전진캠프 사이에는 3,000m의 험악한 바위 지대가 막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기상마저 악화하여 5일 동안 폭풍을 뚫고 4일간 굶주린 채 땅을 향해 기어서 8일 만에 악몽 같은 하산을 끝내고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딱딱한 얼음 위를 짐승처럼 기어 내려온 스콧의 무릎은 찢겨지고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을 맞이한 베이스캠프는 텅 비어있었다. 대신 ‘한명이라도 돌아와 이 메모를 보기 바란다’는 쪽지만 있었다. 이들이 죽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원주민 마을로 구조에 필요한 사람을 구하러 철수했던 것이다.

 

그 후 영국의 한 스포츠 단체가 오그레 초등 공로를 높이 사 스콧에게 국제스포츠용맹상을 수여하려 했으나 그는 “등반은 개인적인 즐거움이나 성취감을 위한 것이지 영예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며 수상을 거절했다. 하지만 상금이 있다고 전해들은 스콧은 에베레스트재단에 상금을 기부하기위해 수상을 허락했으나 나중에 상금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수상을 거부, 돈만 아는 산악인이라며 구설수에 올랐다. 그러나 상금을 기부하려 한 진의가 알려지면서 그는 다시 세인의 칭송을 받는다.

 

내가 보닝턴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12월 그가 한국을 방한했을 때다. 그는 74세 노인답지 않은 날렵한 몸매와 소탈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가 강연을 시작하기 전 인사를 나누고 <나의 선택(I chose to climb)>, <안나푸르나 남벽(ANAPURNA South Face)>, <에베레스트 고난의 길(EVEREST The hard way)>의 초판본과 국내 번역서 <퀘스트(Quest)> 등 그의 저서에 서명을 부탁했더니 영국에서도 절판된 책을 내가 갖고 있는데 놀라움을 표하면서 즐겁게 사인해주었다. 그는 15권의 저서를 남긴 산악인이다.

 

북한산 영봉에 오른 보닝턴은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의 경관에 매료돼 “대도시에 이런 환상적인 산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감탄하면서 인수봉의 등반루트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한때 보도기자 겸 사진기자로 활동했고 지금은 영국을 대표하는 등산용품 제조업체 버그하우스의 명예 회장으로 있으면서 TV나 방송에 출연하고 잡지, 신문 등에 글을 기고하는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 글 /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

     - 폄 / 한국일보 2008, 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