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온고지신 설악산 *-

paxlee 2008. 1. 25. 08:39

 

          -온고지신 설악산 / Reportage -


           노산 이은상의 '설악행각'을 좇아서…

           백담사에서 신흥사까지


            영겁의 세월에도 마르지 않는다

◇ 운무가 드리운 설악의 아침빛. 사진 성동규

인간이란 존재로서 설악을 마주하고 있으면 어떤 어구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다만 “억!”하는 외마디 비명만 머리를 스쳐갈 뿐,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그 절경을 표현해낼 수 있겠습니까. 시대의 걸출한 문장가가 그 준엄한 산세와 장쾌한 광경을 아무리 잘 표현해낸다 해도, 그것은 인간의 머리를 거친 문장일 뿐. 설악을 표현하는 데는 여전히 부족할 것입니다. 그만큼 설악은 특별하고 이름만으로도 대단한 산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설악을 이야기함에 있어 일제강점기 시절의 시조시인인 노산 이은상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67년, '산악인은 대자연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산악인의 100자 선서' 제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만큼, 그는 산을 사랑하고 즐긴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1930년대에 설악을 기행하고 남긴 기행문이 있으니, <노산문선> 중에 수록된 '설악행각'이 그것입니다. 이 '설악행각'과 비교하여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것만한 설악유람기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설악행각'은 설악에 관한 문학적 표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노산도 설악에 관하여 어떤 문구를 만들어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허나 그러면서도 그가 굳이 '설악행각'이라는 유람기를 남긴 이유는 다음 문장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저렇듯한 영구 명승으로서 사람마다의 근참은 그만두고라도, 조그마한 유기 일편조차 우리에게 없음을 깨달을 때, '우리네의 산악 순례에 대한 열성이 이렇게도 엷구나, 우리네의 산악 순례를 위한 여유가 이렇게도 없구나'하는 장탄과 아울러 얼른 이 '기회'에 대답하고 나선 것도 한 까닭입니다.'

바로 이것이 있기에 우리는 그가 걸었던 유람길을 따라가보고자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최고 중의 최고로 삼는 산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선인의 발자취를 좇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노산 행각, 세월은 길을 막았다


마음 같아서는 노산이 설악을 유람한 10일 간의 여정을 다 따라가고 싶지만 우리의 사정이 허락지 않습니다. 그 사정이란 것이 그가 설악 행각을 시작한 십이선녀탕계곡과 장수대 부근이 지난 수해로 인해 교통이 원활하지 않은 것이 첫째요, 대승령에서 흑선동계곡을 지나는 구간이 국립공원특별보호구라 하여 출입이 불가함이 둘째입니다.

 

그러나 실상 이러저러한 사정은 핑계일 뿐, 지금을 사는 우리네의 바쁜 일상이 걸림돌인 것도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여하튼 우리가 기점으로 삼은 곳은 노산의 설악 행각 6일째 코스에 해당하는 백담사입니다.

노산의 '설악행각'에 따르면 백담사의 전신은 지금의 장수대 부근에 있었던 한계사였다고 합니다. 그 사찰이 세월을 거치며, 무수히 명칭이 바뀌고 자리도 여러 번 옮기다가 마지막으로 안착한 곳이 지금의 백담사 자리인 것입니다.

 

유유히 흐르는 백담계곡의 계류(谿流)를 봤을 때 그리 모자란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만, 노산은 이 백담에 대해 '고작 자리 잡은 곳이 이 곳인가'라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시작점으로 들어왔기에 만족할만 했지만, 내설악의 명승을 이미 둘러보고 온 노산의 눈에는 썩 성에 차지 않았나 봅니다.

◇ 설악에서 가장 영구한 역사를 지닌 암자라는 봉정암은 괴암 기봉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당시 노산은 설악을 찾으며 길을 안내해 줄 현지 '심마니'와 곰, 산돼지 같은 짐승들로부터 보호해 줄 포수들을 대동하여 15명 정도의 '원정대'를 꾸려 움직였습니다. 탐방로가 나있지 않은 시절이라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잘 닦인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되니, 세월의 차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은 것인지요.

 

그러나 아무리 세월의 힘이 무섭다한들 설악의 수려한 풍경까지 변하게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가까이로는 수렴동, 멀리로는 청봉 아래서부터 흘러내려오는 계곡물들이 그 사실들을 증명해 줍니다. 설악 곳곳의 봉우리에서부터 내려오는 물들이 합쳐지는 계곡의 끝자락. 그 모든 수량을 담아내기 위해 광활한 돌밭에 자리 잡고 흐르는 맑은 물을 끼고 길을 오르고 있으니 이미 설악의 진경이 시작된 것을 알겠습니다.

계곡소리, 새소리에 취해 한시간여쯤 걸었을 무렵, 먼곳에서부터 불경 읽는 소리가 들려오니 바로 영시암에서 울려퍼지는 소리입니다. 영시암! 영원히 명세한다는 뜻을 지닌 이곳은 산 중 고요한 수도의 장이자, 아름다운 설악 절경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영시암을 지나 조금만 오르면 오세암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만, 우린 노산의 길을 따라가기 위해 수렴동으로 향합니다.

 

노산에 의하면 '금강산의 만폭동'과 같은 곳이라 수석(水石)이 최고라 하던 수렴동! '난석의 등성이를 춤추듯이 뛰어 넘으며…기승스럽고 기절차게 소리를 지르며 터져나오는 물이 대연을 이루어, 발길을 막습니다'라고 말했던 수렴동. 하지만 지금 이 등산로는 너무도 길이 잘 닦이어 노산의 감흥까지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발끝의 길만 보고 오르다보니 돌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알 바도 없고, 잘 만든 철제다리로 훌쩍 건너뛰니 물이 발길을 막을 일도 없습니다. 세월이 바꾼 것이 있다면 이정도의 차이겠지요. 과연 우리가 밟고 있는 이 길의 어느 부분을 노산이 밟아보기는 했을는지. 어쨌든 그가 택해 오른 이 길이 지금 많은 현대인들이 즐겨 오르는 길인 것만은 확실하다 하겠습니다.

 

설악을 금강이라 부를 순 없으니


수렴동대피소에서 점심을 해결한 뒤 본격적으로 수렴동계곡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이곳부터는 가면 갈수록 놀라운 길, 왜 세간에서 설악이 금강을 닮았다고 이야기하는지를 절절히 깨닫는 대목입니다. 금강에서 보고 놀랐던 옥빛의 물이 또한 이곳에 고스란히 있고, 그 물들을 굽이치고 쏟아지게 하는 바위도 설악은 전부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이 이럴진대 어찌 금강만이 한반도의 진산이라 하겠습니까. 이 형상을 보니 그가 '눕고 앉은 곳이 다 강산'인 것을 알면서도 구태여 설악을 찾은 연유를 알겠습니다. 이 시대에는 남북이 갈리어 금강은 '그리운 금강산'이 되어 향수를 자극하지마는 언젠가 금강과 설악이 다시 만나게 된다면, 오히려 금강이 설악을 시기하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구태여 덧붙이자면 지금 오르는 이 길은 금강의 구룡폭을 빼다 박았다 하겠습니다. 남한에 있는 무수한 산들도 제각기 생긴 형상이 다르거늘 어찌하여 이 설악은 금강을 닮았겠습니까. 오랜 옛날부터 유명세를 타며 인기를 높인 금강을 견제하여, 설악의 바위들이 조화라도 부린 것일까요. 금강의 옥빛 물과 바위들에 비교해보매, 더 걸출하면 걸출하였지 전혀 뒤지지 않으니 과연 설악이 명산임에 틀림없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지금 한창 새로 구축 중인 목재 다리에서 바라보는 정경이 안타까운 심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무리 설악이 금강을 닮았다 한들 설악은 설악으로서 존재하거늘, 왜 신식 구조물에서 바라보는 정경들이 모두 금강에서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까. 설악이 실제로 금강의 모습을 따라했다 한들, 그 의도는 금강의 아름다움을 넘으려 한 것이었을 진대 작금 사람들은 그 청아한 풍경을 금강과 판박이로 만들고 있으니, 설악이 설악임을 잃을까 하는 우려도 생겨납니다.

한걸음, 한풍경 지날 때마다 '악!'하는 감탄을 거듭 느끼며 오르다 보니, 이것은 또 무엇입니까. 정면으로는 어디서 떨어지는 것인지 가늠도 하기 힘든 높은 곳에서 물이 쏟아지고, 좌편으로도 끝을 찾아보기 힘든 물줄기가 쏟아져 내립니다. 이 웅장하고도 장엄한 풍경에 감탄을 발하고 나서야 이곳이 그 유명한 쌍폭인줄 알겠습니다.

 

비로소 여기까지 오며 발길을 멈추고 담았던 각각의 폭포들이 용손폭, 용아폭이었음을 깨닫게 되니, 노산처럼 안내인과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아쉽고, 안내인의 존재가 얼마나 중한지도 알겠습니다. 또한 노산의 말에 따르면 정면의 '웅폭'을 넘어 청봉곡으로 들어가면 십이폭의 절경이 펼쳐진다 하나, 노산은 숙박이 불가해 가지 못하였고 우리는 탐방로가 막혀있어 오르지 못하니 이 또한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좌폭의 골짜기인 풍정곡으로 올라갑니다.

노산은 이 골짜기를 오르며 방원폭을 비롯하여 구곡담을 보았다고 했으나, 우리가 오르는 길은 점차 물길의 흔적도 찾기 힘들어지고 마냥 올라가는 길일 뿐입니다. 높은 곳으로 오르매 길이 험해지고 점차 바람이 거세어지며, 어느새 봉정암에 다다릅니다.

 

이곳 봉정암은 노산이 다음날 일찍 대청봉에 이르기 위해 하루를 묵었던 장소입니다. 그 시절은 이곳이 대청봉에서 가장 가까운 숙박 장소였겠으나 우리는 조금 더 올라가면 소청산장이 있고, 대청봉 바로 아래 중청산장도 있으니 그때에 비하면 설악을 오름이 얼마나 쉬운 일일까요.

 

악천의 청봉에서 아쉬움을 달래네


봉정암에서 소청을 오르는 길은 무척 험하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아주 고된 길입니다. 다행히 해가 지는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쉬어가며 올라 소청산장을 지나 소청봉으로 발걸음을 이어갑니다. 봉정암 부근에서는 잠시 잦아들었던 바람이 산장 위부터는 광풍이 되어 온몸 구석구석을 파고듭니다.

 

이어 눈앞에 확연히 드러나는 고산지대의 황량초원! 바위틈을 비집고 나올 정도로 생명력 강한 풀들도 바람을 이기지 못해 납작 엎드려 포복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풀이름을 알 수는 없으나 분명 태생이 다른 종자들인데, 어찌 저리도 같은 배에서 난 자식들처럼 비슷한 키재기를 하고 있을까요.

 

암벽과 바람 그리고 풀. 이 대자연이 만들어 낸 별천지를 무어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꿈속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중청으로 올라갑니다. 중청으로 올라갈수록 바람을 타고 넘어온 구름이 짙은 운무를 만들어 냅니다.

 

노산은 이 청봉을 오르며 멀리 동해바다와 낙산, 양양, 강릉 등지를 바라보며 '저기는 인간이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대자연 속에서 번뇌를 느꼈다는데, 이 운무와 바람 앞에서는 이 한몸 사리기에도 힘이 듭니다. 청봉의 하늘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이고, 심한 바람이 운무를 계속 몰고 오는지 하늘엔 달도 별도 보이지 않습니다. 고요한 산정에는 풀벌레 우는 소리만 울리고 별 감흥을 느낄 새도 없이 잠에 빠져 듭니다.

이른 아침, 대청봉을 오르려는 사람들의 분주함에 눈을 떴으나 안개에 잠긴 설악은 진경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대청머리에 중청머리에 그리고 저 아래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에도 가득히 안개옷이 입혀져 보이는 바가 없습니다. 그 와중에 대청 너머로 솟아오른 해가 구름에 가리며 달처럼 은은하게 비치는 신비한 정경 깔아주어 그나마 위안을 삼습니다.

 

기실 산을 오르는 이유는 정상에 서겠다는 각오로만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 펼쳐지는 풍경을 담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던 대청봉에서의 허탈함보다 이런 신비를 보고 내려가니, 여기까지 오른 보람이 있다 하겠습니다.

노산의 유기에 따르면 그는 대청에서 다시 봉정암으로 내려간 후, 가야동계곡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그 길을 따르자니 왔던 길을 다시 되짚는 길이라 자칫 지루할 것이 염려되었으나 천하 강산에 한번 봤다고 지루한 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올라올 때는 오름짓에 지쳐 보지 못했던 자연풍광들을 접하게 되니, 백담사에서 스쳐보았던 고은 선생의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본 그꽃'이란 말뜻을 알겠습니다.

봉정암에 들러 시원한 물을 얻어 마시고 이제 오세암으로 향해갑니다. 이 길에서부터 물이 다시금 작은 계곡을 이루어 정겨운 기분마저 듭니다. 겨우 하루만에 다시 만난 계류일진대 이리 반가울 수가 있겠습니까. 발걸음마저 가벼워져 금세 가야동계곡과 합수되는 지점에 이릅니다.

 

노산은 이 합수점에서 물길을 따라 가야동으로 들어간 것으로 사료되나, 지금은 그 길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하여 가야동계곡을 건너 오르막과 내리막이 무수히 반복되는 길로 접어들게 되는데, 참말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길입니다. 잠시 만났던 계곡은 다시 사라지고, 머리 위로는 온통 수풀과 암봉에 가려 경관을 보기도 딱한 상황이니 그저 땀을 훔치며 열심히 걸을 수밖에요.

지루한 길을 한시간 반여 걸어가다보니 심신의 피로가 더욱 심합니다. 바람마저 불지 않아 땀이 줄줄 흐르는 이 구간에서 지쳤을 때쯤, 가까운 곳에서 타종소리가 들려오니 오세암이 멀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용기백배하여 다리에 힘을 주어 가다보니 이내 오세암에 도착하게 됩니다.

 

기이한 절벽 암봉들아, 이름이 무엇이냐


우리는 반나절만에 도착한 오세암이건만 노산은 이곳에서 다시 하루를 묵으며 늦가을 밤의 정취에 취해 잠을 이루지 못했던 곳입니다. 그의 행로를 좇아감에 있어 노산처럼 여유로운 일정으로 설악 진경 하나하나에 풍미를 남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지금의 급한 일정은 자연을 느끼는 일마저 쉽사리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세암에서 주는 점심 공양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길을 재촉해야하는 걸음걸음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갈길이 급하다 하여도 오세암 만경대를 가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산이 이르기를 '이곳에 올라야 오세암이 실로 암자터로는 조선 제일임을 알 수 있다'하였고, '사방으로는 내설악 연산이 행여 빠질세라 서로 다투어 보이는 절승한 경관'이라 표현했던 곳을 어찌 지나치겠습니까.

 

30여분 암벽을 잡고 올라 만경대에 도착하니 과연 노산이 '오늘까지 다니면서 보는 경치는 너무 가까이서 혹은 너무 멀리서 본 것이언만, 이 만경대에 올라서는, 꼭 적당한 거리에다 두고 보는 최호한 조망 지점인줄 알겠습니다'라고 말한 이유를 알겠습니다.

오세암으로 내려와 잠시 쉬었다가 이제 마등령으로 걸음을 재촉합니다. 이 길 또한 가야동에서 오세암으로 이르던 길처럼 지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청봉 다음으로 가장 높은 봉'이라고 노산이 표현했던 마등령을 오르는 길이다보니, 내리막도 전혀 없는 오름의 연속이라 더욱 힘에 부칩니다.

 

여기서 노산이 어찌하여 마등령을 청봉 다음으로 높다하였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실상 그는 대청봉을 오를 때에도 소청, 중청, 대청이라 하지 않고 '청봉'이라 불렀던 것을 기억해 냅니다. 그렇다면 설악의 모든 청봉(대청, 중청, 소청, 귀때기청)을 하나로 묶어보매, 과연 1326.7m('설악행각'에는 1327m)인 마등령이 저 내설악의 안산을 제외하고는 두 번째 높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등령으로 오를수록 햇빛은 점차 사라지고 온통 구름과 안개 그리고 바람에 포위당하였습니다. 대청봉에서부터 줄기쳐 나온 공룡능선의 종착점인 이 마등령은 내설악과 외설악의 분수령이 되는 지점으로, 지금까지는 내설악을 유람한 것이요, 이제부터 외설악의 '기승스러움'을 보아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외 설악을 가르는 분수령이 날씨마저 갈라놓았는지 잔뜩 끼인 운무가 바로 눈앞의 암봉조차 분간하지 못하게 함이 안타깝습니다.

마등령을 내려서며 노산이 보았다던 장엄하고 화려하며, 미묘하고 유심한 광경들을 찾아보려 애쓰지만 이 흐린 시계에서는 무엇이 보인다해도 그와 같은 감흥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또한 신비한 형상의 암봉을 본다 해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한 때문이기도 합니다. 괴괴한 형상의 암봉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니 그 암봉도 내게 아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 답답한 마음이 문득 생깁니다.

 

이것이 시인 김춘수의 '꽃'이 떠오르는 대목 아니겠습니까. 이름을 불러줘야 비로소 나에게 와 꽃(의미)이 되어 주거늘,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는데 아무리 절정을 자랑하는 암봉인들 내게 어떤 의미를 주겠습니까.

'설악행각'에 따르면 이 부근에서 노산의 길과 현재의 탐방로가 확연히 길이 나눠집니다. 그것은 노산이 '설악 동곡의 계수를 만나 내려가지 않고 거슬러 올라갔다는' 기록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떤 연유로 내려오던 산에서 다시 올랐냐하는 것은 바로 와선대와 비선대를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의 탐방로는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비선과 와선을 차례대로 보며 하산할 수 있지만, 당시의 길은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했던 모양입니다.

외설악을 잔뜩 품고 있던 구름은 결국 한차례 장대비를 쏟아내고, 그 길을 하염없이 내려오는 우리도 몹시 고됩니다. 신선들도 이런 날엔 가만히 거처에서 잠을 자는지 날아다니는 신선도 없고, 누워있는 신선도 딱히 만나지 못합니다. 어두컴컴해지는 길을 따라 지금은 완전 '인간세계'로 변모한 신흥사 방면으로 내려오며 이틀째 밤을 보냅니다.

◇ 옥빛 물살 흐르는 계곡, 높이 솟은 기이한 암봉. 이 모든 것이 금강에 견주어 하나 빠지지 않는다

변해도 변치 않을, 그대 이름은 설악


밤새 내린 비는 변덕일 뿐이었다는 듯이 설악동 아래 날씨는 맑기 그지없습니다. 설악의 봉우리들에는 흐린 연무가 끼어 먼 곳을 보는듯 답답하지만 땅위의 햇볕은 따갑게 내리쬡니다. 이제 노산 '설악행각'의 마지막인 계조암으로 향하는 날입니다.

울산바위 밑 계조암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나 노산이 석양에 비껴 보았다는 토왕성폭포는 연무에 가려 보이지 않고, 울산바위마저 흐릿하여 멀리 자리합니다. 그리고 울산바위만큼이나 유명한 흔들바위를 이곳에서 보게 됩니다. 노산이 '금강이 가진 온갖 것을 다 가진 설악으로, 하마터면 동석 하나가 빠질뻔 하였지만, 기어이 여기에 와서 동석까지 있고야 만 것은 유쾌한 일입니다'라고 했던 동석이 곧 흔들바위입니다.

 

한 사람이 흔드나 만 사람이 흔드나 꼭 같이 흔들린다 하여 흔들바위인 이 거암은 이제 많은 관광객들의 사진 촬영 장소로 남았을 뿐, 구태여 흔들어보려는 사람이 드뭅니다. 그래서인지 이 동석 또한 흔들린 적 없이 항시 요모양으로 존재하였다는 듯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노산이 유랑했던 10일간의 설악행각은 여기까지입니다. 이후 노산은 신흥사로 내려가 설악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며 지난 유랑을 돌아본 바 있습니다.

'설악산이여. 나는 당신의 품속을 벗어나, 이제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당신 품속에서 흐르는 그 영원한 생명의 법유는 내 피가 되고, 내 살이 되고, 또 내 뼈가 되어, 내가 사는 동안에는 당신이 곧 나요, 내가 곧 당신임을 벗지 못할 것입니다. 먼 후일 내 영혼에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고, 외로움이 있을 때, 나는 다시 당신의 품속을 찾아와 지고지애의 세례를 받고 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찬가지로 우리도 3일간의 설악행각을 마치고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옛날과 같지 않게 지금의 설악은 세속에 찌든 곳도 많아 온전히 그 품에 안기었다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짧은 설악기행으로 탈속의 기쁨을 느낀 것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제 다시 현대인의 바쁜 일상 속에서 회색빛 건물과 공기를 마주하며 인간의 삶을 살아야겠지만, 언제고 다시 설악으로 돌아올 수 있음이 그런 삶도 버틸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설악, 다시 언제 올 수 있을까요. 하지만 설악, 기어이 다시 찾게 될 이곳입니다. 먼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노산 이전부터 노산 이후에도 그래왔듯이......

 

          - 글 노규엽 기자· / 사진 양계탁 기자 / 월간 마운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