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티벳 옛 풍습에서 원초적 본능 되찾다 *-

paxlee 2008. 3. 13. 20:59
 
                       [중국히말라야 탐사2] 티벳 옛 풍습에서 원초적 본능 되찾다
 
 * 매리설산 순례길 따라 류쿠~빙중루~치나통~추나니초 답사

데카르트의 제자이자 아나키스트로서 언어, 불교, 문화인류학자였던 다비드 넬의 나침반이 궁극에 가르킨 곳은 바로 금단의 땅, 간유(눈의 나라?티베트)였다. 청해성의 쿰붐사원에서, 사천의 간쯔(Garze)에서, 그리고 리탕과 파탕에서 네 번의 잠입 시도에도 번번이 중국과 티베트의 검문소에 가로막혀 되돌아 서야했던 그녀,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 전에 방문했었던 시킴(Sikkim)에서도 얼마든지 티베트의 문화와 종교를 접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러한 의구심은 사실 어리석다. “카라코룸과 히말라야를 그렇게 떠돌아 다녔으면 넘쳐나게 높은 설산들을 돌아보았을 텐데 너는 왜 다시 이곳에 왔는가”라고 물음과 마찬가지다. 나무 지팡이에 작은 배낭을 짊어지고 라사로 향해 걷고 있는 그녀가 나타난다. 나도 함께 따라간다. 밖은 청중이 않은 객석처럼 암흑인데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세계만이 다비드가 서 있었던 무대처럼 빛나고 있다.


▲ 샬윈(Salween)강, 메콩강, 양쯔강의 중상류는 삼강병류(三江竝流)를 이루는데 그 협곡을 건너기 위해 원주민들은 외줄다리를 이용한다.


 * 넉넉지 않은 형편에서도 낭만 넘치는 중국인들

곤명(1,895m)에서 서쪽으로 581km를 달려 류쿠(六庫·750m)에 내렸다. 류쿠는 운남성 누쟝리수족자치주(怒江?栗?粟族自治州)의 주도(州都)다. 동행한 동성과 훈석의 덕으로 계획에도 없던 이곳에 올 수 있었다. 학창시절 사회과 부도를 보았을 때 어떻게 이렇게 큰 대하(大河)가 나란히 붙어서 흐를까라는 의구심은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근래 중국 측회국 측회과학연구소(中國測繪局測繪科學硏究所) 중국등산협회(中國登山協會)에서 발행된 청장고원산봉도(靑藏高原山峰圖, 1989년)의 지도 위를 걸으면서 과연 이곳에 갈 수 있을까 했는데, 지금 여기에 서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 바위산에 달이 뜬 듯 구멍이 뚫린 석월량(石月亮).

샬윈(Salween)강, 메콩강, 양쯔강의 중상류를 각각 누쟝(怒江), 란창쟝(瀾滄江), 진샤쟝(金沙江)이라고 하는데 이 전체 지역을 통칭하여 삼강병류(三江竝流)라고 한다. 운남성 서북부 횡단산맥 종곡지구에 위치해 있으며 세 갈래의 큰 강이 청장고원의 탕구라 산맥에서 흘러내려 운남성 경내에 들어선 후 남북 평행으로 뻗고 있다. 누쟝과 란창쟝의 제일 짧은 직선거리는 18.6km밖에 안 된다. 이런 풍경은 세계에서 유일한 곳으로 2003년 7월, 세계자연유산(世界自然遺産)으로 지정되었다.

여명이 내리는 새벽 속으로 전세 낸 택시는 달려나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갑자기 샛길로 접어들고 멈춘 곳은 철 와이어 줄로 만든 오래된 다리 위다. 운전사는 마치 관광가이드처럼 소소히 설명을 덧붙인다. 이 친구 덕분에 빙종루(丙中洛)까지의 300km 여정이 누쟝 위에 슬그머니 찾아 온 아침햇살만큼이나 반짝여 보인다.

다시 차는 달린다. 좁은 곳은 강폭이 채 30m도 되지 않는 누쟝의 절벽으로 난 가로수 길은 한 굽이 돌 때마다 모습을 바꾼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좁은 협곡의 기암절벽, 그 절벽에 올라붙은 작은 키의 소나무, 강물에 깎인 각양의 괴석들, 그리고 양쪽으로 솟아 오른 서쪽의 가오리꽁산맥(高黎貢山·고려공산)과 동쪽의 누산맥(怒山), 피나쉐산(碧羅雪山)이 강을 밀치듯 섰다.

길가에는 미얀마에서 불법으로 벌목된 원목들이, 굴러나 갈지 의심스러운 낡아빠진 트럭에 싣고 있다. 나보다 두 살 밑인 동성은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족이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우리가 방금 스치고 지나온 그런 ‘도라꾸’를 끌고 북한에 들어가 원목을 구입해서 중국에 파는 장사를 했다고 한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피워 문 담배 연기를 길게 뿜으며 당시의 시간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그때 본 북한은 참 가난했어요. 농사를 짓기에 땅들은 황폐했고 벌목으로 산들은 헐벗었지요. 중국 조선족 사람들이 먹을 것을 가끔 압록강 강변에 갖다 놓습니다. 그러면 북한 주민들이 강을 건너와 봉지를 챙기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가져가서 돼지라도 줄라고.’”  북한 주민들은 그렇게 교육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한 가닥 자존심 때문인지 가난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단다.

“나무를 실으러 갈 때 반드시 챙기는 것이 담배와 여자 속옷입니다. 일을 하다 문제가 생기면 담배 한 갑이나 스타킹 하나면 만사형통이었으니까요.” 택시 운전사도 동성과 같은 지린성(吉林省) 출신 한족(漢族)으로 몇 년 전에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래서 둘의 이야기는 더 살갑다. 사실 류쿠의 정류장에 우리가 내렸을 때 빙종루까지 가는 대중교통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사진촬영과 좀 더 여유를 갖기 위해 택시를 전세(빠오처) 내자고 내가 제안했다.

 

물론 비용은 셋이 모은, 매리설산을 북쪽으로 돌아 더친(德欽)까지의 기간 동안에 쓸 공동비용이 아닌 내 자비를 쓰기로 했다. 택시를 찾아 가격협상을 하며 거리를 헤맬 때 대부분의 기사들은 평균 500위안을 요구했는데 이 사람은 400위안에 오케이했다. 왕복 600km에 들어갈 리터당 연료비에 식사비, 빙종루에서 하룻밤 숙박비를 계산하면 남는 것이 없어 보였다. 동성을 통해 그 이유를 물어 대답을 기다렸다.

▲ 포대기에 애기를 안은 아주머니와 자전거를 매단 아저씨가 외줄다리로 날아왔다. / 화려한 장신구를 한 리수족 할머니의 푸공 시장 나들이. / 똥신주(同心酒)는 젊은 남녀가 한 잔의 술을 입술을 맞대고 마시는 거지요.

 

“당신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여기에 정착하게 된 것도 이 계곡의 좋은 날씨와 아름다운 풍경 때문이지요.”
“그럼 정착하기 전에 이곳에 왔었나요?” 원래 질문에 답은 아니었지만 다시 물었다.
“그럼요. 저도 여행을 좋아했지요. 그래서 이곳에 왔었고. 지금은 류쿠에 집을 마련하고 결혼을 하여 혼자 여행하기는 힘듭니다.”

지린에서 이곳까지는 대륙을 건너는 대장정이다. 기차로 쉬지 않고 달려도 일주일에서 열흘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운전사-그와 함께 한 하루동안 이름을 물어보지 못했다-는 체형은 말랐지만 얼굴은 평온했다. 느릿한 그의 말이 이어진다.

“빙종루까지 당신들이 주는 돈은 많지 않지만 내일 되돌아오면서 다른 손님을 태우면 됩니다. 대신 일을 하면서 언제든지 여행을 할 수 있고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입니까! 이 직업을 택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요.”

이것도 중국 한족들의 유능한 상술인가 할 정도로 의아해했다. 흡사 ‘내 영혼의 닭고기 수프’에 나오는 택시 운전사가 여기로 이사를 왔나 착각이 들 정도다. 한낮의 나른한 언덕사면에 화전을 하여 경작한 옥수수 밭, 그 사이로 느릿한 소와 염소들, 대나무 숲이 둘러쳐진 리수족(?栗?粟族)의 집들이 옹기종기 붙었다. 운전사는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차를 세운다.

 “이 외줄다리가 누쟝에 남은 마지막일 겁니다.”

그곳에는 주민들이 새로 지을 집의 시멘트 벽돌을 강의 반대편으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20kg이 넘는 무게를 매달아 도르래에 의지한 채로 그들은 공중으로 몸을 던졌다. 외줄다리는 80여m 너비로 각각 높이가 다른 두 줄이 강의 양쪽 바위에 고정되었는데 출발하는 지점이 높게 설치되어 쉽게 미끄러져 내리게 했다.


▲ 치나통은 정감 있는 마을이다. 추수가 끝난 밭으로 거름을 내는 아낙네들. / 북쪽에서 남쪽으로 일직선으로 흐르던 강물이 누쟝제일만(怒江第一灣)을 굽이돈다.


 * 리수족 젊은 남녀의 독특한 술문화 ‘똥신주’

반대쪽에서 포대기에 아이를 안은 아주머니와 자전거를 매단 아저씨가 날아왔다. 보기만 해도 아찔했지만 보고만 지나칠 우리가 아니다. 훈석이 벽돌을 나르던 남자와 함께 도전한다. 먼저, 접은 밧줄을 사타구니 사이로 넣어 엉덩이를 감싸고 허리에 묶는다. 그리고 쇠줄에 건 도르래에 매듭한 줄을 건다. 남자는 속도 조절용으로 바닥에 베어 놓은 풀을 한 움큼 줄에 감싸 쥔다. 훈석의 얼굴은 웃고는 있지만 잔뜩 긴장된 모습이 역력하다. 발을 떼자 둘은 함께 매달려 20미터 높이 강물 위로 재빨리 날아간다. 되돌아 온 그는 놀이공원에 다녀온 어린아이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형 정말 무서웠어요. 홀로코스트는 게임도 안 되요.”
높은 곳은 무조건 싫다던 동성이도 아찔한 세계에 결국 던져지고 말았다.

부꽁(福貢) 시장에는 갖가지의 채소와 과일, 누쟝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가 좌판을 가득 매웠다. 거둔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고 필요한 생필품을 사려는 리수족 아낙네와 아가씨들이 온몸에 산호, 터어키석, 붉은 호박, 은세공 장신구로 한껏 치장을 하고 나왔다. 운전사는 우리가 처음 접하는 리수족에 관해 재미난 풍속을 들려준다.


“리수족 여자들은 가슴이 엄청 크지요. 또 독특한 술 문화가 있습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웃음을 짓는다.
“이들이 마시는 술 중에 똥신주(同心酒)라는 것이 있습니다. 젊은 남녀가 한 잔의 술을 입술을 맞대고 마시는 거지요.”

술을 마실 때 입술이 닿는다는 것 빼고는 별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술잔은 다르지만 우리도 러브 샷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운전사 덕분으로 시간가는 줄 모르는 여행에 벌써 태양은 중천을 넘어가고 있었다. 작은 연못 정원이 딸린 식당에서 마른 고추, 산초, 천마 등 갖은 약초를 넣은 매콤한 국물에 오골계와 송이버섯, 연근, 죽순에 다양한 채소로 만든 허궈(샤브샤브)를 먹었다. 술 얘기도 들었고 안주도 푸짐하니 빠이주(白酒·고량주) 두어 잔이 빠질쏘냐. 호기심 많은 셋은 함께한 운전사에게 똥신주에 대해 더 재촉했다.

“똥신주는 술의 종류가 아니라 마시는 방법을 뜻하는 것입니다. 남녀가 즐겁게 술을 마시면 한 마음이 되고 또 그 날 밤 한 방에 든다는 숨겨진 뜻이 있기도 합니다.”

이 말에 취기가 오른 총각 셋은 눈이 똥그래졌다.
“빨리 갑시다. 똥신주 마실 수 있는 마을로.”

너스레 잘 떠는 동성이 급해졌다. 운전사는 우리의 희망을 져 버리지 않고 어느 마을 앞에 차를 세웠다. 잔치가 있는 날인지 예쁘게 차려 입은 아가씨들이 반긴다. 대화가 쉽지 않은 훈석과 나는 뒷전에 꿔다 논 보릿자루, 넉살 좋은 동성이 나서 술을 청했다. 한 잔씩을 받아 마신 술잔은 다시 채워서 돌아온다. 동성이 본색을 드러낸다.

“똥신주, 똥신주 함께 마시죠~.”

말 끝머리가 바이브레이션을 이루며 애교를 섞는다. 아가씨들은 까르르 좋아라 웃는다. 다시 잔을 채워준다. 동성은 포기하지 않는다. 여자들 엉덩이 옆에 다시 바삭 달라붙어서는 같이 마시는 시늉을 한다. 훈석도 지원사격에 나섰다. 그는 우리나라 S대기업에 다니다가 갑자기 그만 두고 세계를 여행했고 지금은 곤명에 터를 잡았다. 당시 그는 기획실에 근무를 했으니 술에 관해서라면 둘째라면 서러울 만큼 경험이 있었을 터였다.

마침내 한 아가씨가 술 잔 가까이로 입술을 가져온다. 동성의 장난이 효력을 발휘하는 순간. 김샜다. 장난이었다. 그리곤 똥신주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되물어왔다. 이렇게 우리의 짓 굳은 웃음소리는 누쟝 강물의 바람을 타고 살랑거렸다. 아쉽기만 했던 똥신주 타령은 이후 미인이 나타났다하면 꿈틀 되살아났다.

 
▲ 빙종루(丙中洛)는 리수족, 누족, 짱족(藏族)이 뒤섞여 사는데 믿는 종교 또한 제 각기 다르다. 라마교의 곰파와 초르텐, 성당, 교회가 뒤섞여 있다. / 1911년 킹던워드에 의해 알려진 카와카부(Kawakabu·5,128m). 주민들 모두에게 신산(神山)으로 여겨진다.

 

바위산에 달이 뜬 듯 구멍이 뚫린 석월량(石月亮)을 지나 들어간, 꽁샨두롱족누족자치현(貢山獨龍族怒族自治縣)의 꽁샨(貢山)은 작은 현도(縣村)였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가오리꽁산을 넘어들면 이라왓디(Irrawaddy)강 상류, 두롱쟝(獨龍江)이 흐른다. 이 강은 영국인 식물학자 프랭크 킹던 워드(Frank Kingdon­Ward)가 1937년 미얀마의 이라왓디강 상류에 솟은 하카보 라지(Hkakabo Razi·5,881m)봉 유역을 처음으로 답사하고 쓴 책 속 첨부된 지도에 타론(Taron)으로 등장하는데 이를 중국어로 음차하여 지금에 두롱쟝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강 유역은 7,400명 가량의 두롱족(獨龍族) 삶의 터전인데 특히 여자들은 얼굴에 흉측한 문신을 하는 풍습이 남아있다고 한다. 아쉽지만 우리의 촉박한 일정은 이곳에 들어갈 여유가 없다. 지질구조상 이곳은 인도판이 유라시아판을 밀어붙임으로써 히말라야 산맥이 생성되고 그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횡단산맥이 형성되었다. 심하게 이동 중인 지판은 잦은 지진을 발생시키고 또한 곳곳에 유황온천을 만들었다.

 

밭에서 일을 하는 누족(怒族) 남자들은 검은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두루마기 모양의 원피스에, 천으로 허리를 둘러매었으며 끝이 절단된 긴칼을 차고 있다. 또 이들은 활총과 화살을 휴대하기도 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일직선으로 흐르던 강물이 누쟝제일만(怒江第一灣)을 굽이돌고 그곳을 지나자 넓은 삼각주에 과일 나무들이 선 빙종루(丙中洛)였다. 마을의 북서쪽에 하얀 눈을 뒤집어 쓴 삼각뿔의 암설봉이 나타났다.

 

1911년 킹던워드가 해발 6,666m가 넘는다고 추정하여 케니춘푸(Keni chun pu)로, 미국인 박물학자 조셉 락(Joseph F. Rock)의 사진이 1926년에 내셔날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Magazine)에 실려 세상에 알려진 카와카부(瓦布·Kawakabu·5128m)로 주민들 모두에게 신산(神山)으로 여겨진다.

 * 라마교뿐 아니라 다양한 종교 믿는 빙중루 주민들

이 마을은 리수족, 누족, 짱족(藏族)이 뒤섞여 사는데 믿는 종교 또한 제 각기 다르다. 라마교의 곰파와 초르텐, 성당, 교회가 뒤섞여 있다. 티베트인들은 모두 라마교를 믿을 거라는 편견은 쉽게 무너졌다. 영국이 미얀마를 지배하고 있을 당시 선교활동의 흔적들이다.

정든 택시운전사와 작별을 고했다. 훈석이 알아서 팁도 챙겨준다. 즉시 우리는 매리설산 답사의 실질적인 출발지인 차와롱(察瓦龍)까지의 접근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고 약간의 식량을 구입했다. 변변한 지도조차 없던 참에 다행히 이 마을 부근의 관광지도 한 장은 어두운 밤길의 횃불이었다.

다음날 덜덜거리는 지프에 실려 수백 미터의 바위협곡 시먼관(石門關)을 뚫고 치나통(秋那桶) 마을로 들어갔다. 그곳에 매리설산을 몇 번 가이드 했던 사람이 있다고 했다. 치나통은 정감 있는 마을이다. 돌판을 얻은 지붕, 그 처마 밑에 주렁주렁 매달린 옥수수, 또 그 밑 벽에 매달린 대나무 바구니 속에 계란이 소복하다. 추수가 끝난 밭으로 거름을 내는 아낙네들과 소 두 마리를 이용해 밭을 가는 촌로를 지나쳐 가이드가 있다는 집에 들어갔다. 우선 내어준 수유차를 마신 후에 그의 입에서 나온 정보는 수유차만큼이나 시큼했다. 차와롱까지 차량은 갈 수 없고 말을 타고 이삼일 가야한다는 대답이었다.

서둘렀다. 한 시간이라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타고 온 지프차의 운전사를 구슬리고 달래 길이 끝나는 곳까지 일단 가자고 했다. 바쁜 우리의 사정을 아는 그는 적정 이용료에 몇 배 가량을 불렀다. 어쩔 수 없다. 좁고 덜컹거리는 절벽 길을 달린다. 차가 튀어오를 때마다 우리의 머리는 낮은 천장에 심하게 부딪혔다.

 

이런 시달림에 반해 티베트 말, 걀모 누추(Gylmo Nu Chu)에서 유래한 누쟝 계곡은 아름다움을 넘어서 신비롭기까지 하다. 내 표현으론 부족하여 다비드 넬의 에서 들어보자. ‘누 계곡만큼 우아함과 장엄함이 완벽히 조화를 이룬 곳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우리는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아름다운 숲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 나갔다.

 

때때로 다채로운 모양의 크고 작은 바위들이 눈에 띄는, 인공적으로 가꾼 정원 같지만 자연의 산물 그 자체인 잔디밭을 지나쳤다. 그 중에는 초원 위에 비석처럼 서 있는 바위며, 한 면이 풀로 뒤덮인 바위들이 있었다. 또 푸른 나무들 사이로 살그머니 얼굴을 내밀고 있는 진기한 모양의 바위도 있었다. 골짜기의 모든 것이 수수께끼 같은 아름다움을 감추고 있었다. 마치 오래 된 전설을 다룬 동화책에 그려져 있는 삽화 속을 거니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귓전에서 빛의 요정들이 속삭인다 해도, 잠자는 숲 속의 미녀가 사는 궁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해도 전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지프 운전사가 위험하여 더 가지 못하겠다고 생때를 쓴다. 그를 돌려보내야겠다고 판단을 할 즈음 뒤에서 트럭이 따라왔다. 놓칠세라 얼른 트럭의 짐칸에 배낭을 던지고 올라탔다. 나무 장대가 가로막힌 검문소를 지났다. 이제 행정구역상 시짱자치구(西藏自治區) 자율현(察隅縣) 차와롱진((察瓦龍鎭)으로 들어선 것이다.

밤이 깊도록 트럭은 전조등을 켜고 위험천만한 암벽을 깎아 만든 길을 달렸다. 치나통에서 들은 말과는 달리 공사 중인 길은 계속 연결되어졌다. 짐칸에 탄 우리는 추위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작은 다리를 건너고 도대체 어딘지 모를 곳에 차는 멈췄다. 먼지를 뒤집어쓴 몸으로 옛날 마방(馬房)으로 쓰였을 처마 밑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침낭에 기어 들어가자 말자 곯아떨어졌다.

2006년 10월18일, 새벽에 일어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키 큰 선인장이 자라는 아래 절벽 밑에 티베트 승원인 곰파가 있고 주위에 초르텐과 마니석이 세월을 말해준다. 동쪽으로 계곡물이 쏟아져 나왔다. 순간 아침 찬 기운에 스치듯 소름이 돋았다. 다비드 넬이 난창강변에서 출발, 도카르 고개(Dokar La·4,487m)를 넘고 아벤(Aben·2,230m)을 거쳐 드디어 누쟝에 도착한 지점을 그녀는 라캉 라(Lhakang-ra)라고 했다. 바로 이곳임에 틀림없었다. 좁은 계곡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옆의 바위벽에는 많은 불상이 채색되어 있다. 다비드의 기록이다.


‘라캉라 강의 왼편 기슭으로 건너가니 주변 경관은 급작스레 달라졌다. 골짜기가 갑자기 좁아지고 가팔라졌다. 양쪽으로는 200m도 넘어 보이는 높고 어둠침침한 절벽이 우뚝 버티고 서 있어, 고개를 들어 보니 하늘은 그 절벽들 틈새로 리본처럼 좁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풍경이 암울하고 황량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칙칙한 바위 위에 새겨져 있는 그림이나 조각 등이 자아내는 기묘한 분위기 때문인 듯했다.

바위 위에는 수백 명의 부처와 보살과 여러 신들 외에 예로부터 이름 높은 라마승들의 모습이 잔뜩 새겨져 있었는데, 모두가 한결같이 선정(禪定)에 잠긴 자세로 눈을 반쯤 뜨고 않아 내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움직임이 없는 그 조용하고 성스러운 군상들은 좁은 협곡 안에서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뭔가 독특한 정신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사이사이에는 부처의 지혜를 찬양하는 문구나 신비스런 내용이 담긴 짧은 문구뿐만 아니라 철학적 논문의 일부가 새겨져 있기도 했다.’

다비드는 티베트 말을 읽고 말할 줄 알았다. 그 때의 모습은 사라지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든 불상의 얼굴이 심하게 훼손되어진 상태였다.

▲ 킹던 워드는 차와롱에 대해, 사람들은 친절하고 선한 본성을 지녔으며 자연에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특히 여자들은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 열여덟 살의 처녀, 라마라무(Lama Lamu).


 * 남자들에게 길들여진 여인만이 아내 자격

이 길은 티베트 사람이면 죽기 전에 누구나 한 번은 순례하기를 원하는 매리설산의 순례코스의 남서쪽 끝자락으로 지금은 추나니초(Chunanico·1,850m)라 불린다. 다비드가 밟은 길에 나도 첫발을 내 디뎠다. 이토록 다비드에게 열광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여행방식에서였다. 당시 대부분의 탐험가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으며 왕의 행차 그 이상이었다. 1902년 K2(8,611m)로 가던 아브루치 대공이 그러했고 같은 시기 티베트 창탕고원을 탐험했던 스벤 헤딘이 그러했다. 그럼 이곳을 여행한 조셉 락의 경우를 보자.

그는 비록 오스트리아 출신이었지만 미국 농무성과 하버드 대학의 지원을 받고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중국주재원으로 활동했다. 의학용 식물채집을 위한 락의 캐러밴 대열은 길이가 장장 800m에 이르고 오스트리아 요리에 숙달된 요리사를 비롯하여 수십 명의 하인들이 포함되었다. 또 등짐 진 말들, 그리고 노상강도들의 습격을 막기 위한 수백 명의 용병들이 따랐고 초호화판 식사는 말할 것도 없었으며 배터리로 돌리는 축음기와 접는 욕조까지 싣고 다녔다.


이에 반해 다비드 넬은 나침반, 카메라, 지도, 그리고 작은 텐트, 식량으로 삼을 짬파 가루와 차를 담은 자루뿐이었다. 티베트인의 옷을 입고 얼굴과 머릿결에 검은 숯 칠을 하여 순례자로 변장 한 그녀의 동행자는 시킴 출신의 용덴뿐이었다. 용덴은 다비드가 양자로 삼은 라마승이다. 권총을 가지고 다녔지만 그녀를 보호해줄 것이라곤 강한 자신의 신념과 의지밖에는 없었다. 그러한 악조건에서도 다비드는 고원을 가로질러 라사에 도착한 첫 번째 외부 여성이 되었다.

이곳부터 누쟝의 강변은 넓어지고 건조한 풍경을 나타낸다. 복숭아만한 빨간 열매를 단 선인장 군락을 지나 허연 산사태가 난 자갈길을 넘어 옛날 티베트 연대기에 ‘포도가 많이 나 그것으로 포도주를 만들어 라사로 보냈다’라는 기록의 차와롱 지방 땅을 달렸다. 그 중심 마을 자낭(Zhanang·1,950m)에 도착했다. 몇 잔의 차를 마시고도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기는 힘들었다.

차와롱은 미얀마, 인도와의 국경이 멀지 않고 특히 인도와는 국경 분쟁 중이라 중국 정부로부터 변경 입경허가서(邊境 入境許可書)를 받아야 출입이 허락되는 곳이다. 다비드는 이곳을 타나(Thana)라 했고 이곳 검문소에서 체포가 두려워 어두운 밤에 마을을 돌아 지나쳤다. 우리도 옆에 보이는 경찰서가 걱정은 되었지만 잡히면 얼마의 벌금과 추방을 당하는, 그 이상을 걱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마을을 차근차근 둘러본다.

넓은 토지, 진흙을 성벽처럼 쌓아올린 3층집, 정원에 껍질이 벌어져 알알이 박힌 석류, 그리고 노란 유자. 만나는 사람마다 반갑게 맞는 따뜻한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꼭꼭 담았다. 킹던 워드는 자낭을 치아나(Chiana) 또 트라나(Trana)라 불렀으며 당시 인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선한 본성을 지녔으며 자연에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특히 여자들은 아름답고 매력적이다’라고.

킹던워드의 기록에 감사했다. 물가에서 우리 총각들은 다시 한 번 애간장을 태우는 순간을 맞았다. 빨래하는 처녀의 미소에 넋을 잃은 것이다. 동성의 너스레가 다시 힘을 발휘할 때다. 그는 가지고 온 작은 로션을 처녀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그녀 앞에 자신의 내의를 벗어 세탁을 부탁한다. 싫은 기색 없이 옷을 정성들 여 빨래방망이로 두드리고 헹구어 돌려준다. 동성이 똥신주 얘기를 꺼냈고 그녀는 우리가 그 자리를 떠나기 전에 저녁 초대를 했다. 자신의 집까지 알려주었다.

13세기 말 몽골 대제국을 여행했던 마르코 폴로는 지금의 사천성 시창(西昌)에서 운남으로 향하면서 티베트의 혼인 관습을 <동방견문록>에 이렇게 적었다. ‘남자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법이 없다. 그들은 만약 여자가 많은 남자들에게 길들여지고 익숙해 있지 않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짝을 맞는다.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다른 낯선 땅에서 온 사람이 이 고장을 지나가다가 유숙하기 위해 천막을 치게 되면, 촌락과 부락의 나이든 여자들은 자기 딸을 이들에게 건네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도 무방하고 동침해도 좋다고 말한다.

 

그러면 남자들은 그녀들을 취하고 즐기면서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면서 데리고 있을 수 있다. 다만 여자를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갈 수는 없다. 남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 뒤 여자에게 보석이나 정표를 주는 것이 관습이다. ~ 남자들은 많은 정표를 소유한 여자를 더 기꺼이 부인으로 맞이하려 하고 다른 여자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이러한 여자들을 부인으로 삼으면 그녀를 매우 대단하게 여기지만, 다른 사람의 아내를 건드리는 것은 크나큰 죄악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극도로 기피한다. 16세에서 24세 사이의 청년이라면 그 고장에 가봄직 할 것이다.’


 
 * 열여덟 처녀는 ‘술 취한 님’의 여인이 되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동성과 훈석에게 들려주었다. 우리는 더욱 신이 났다. 오랜만에 몸을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으며 어두워지기 무섭게 방문을 나섰다. 약속시간에 맞추느라 개가 시끄럽게 짖어대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그녀 집으로 들어갔다. 어색한 분위기는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연거푸 마셔대는 비주(맥주)와 55도 알콜의 빠이주에 정신은 빠르게 몽롱해져간다. 손을 잡고 티베트의 전통 춤을 배우며 또 함께 추었다. 노래도 부른다.

열여덟 살의 그녀 이름은 라마라무(Lama Lamu), ‘신성한 공주(公主)’였다. 오늘밤 그녀는 10세기 중국 무명 여성 시인이 노래한 ‘술 취한 님’의 여인이었다.

문 밖에서 개가 짖는다. / 오라, 알겠다, 님께서 오셨구나. / 나는 버선발로 향수 뿌린 계단을 내려간다. / 변변치 못한 내 님은 오늘밤 취해 있다. / 비단 장막을 둘러친 내 침상에 그를 눕힌다. / 비단옷을 벗을까? 천만에. 혼자서는 어림도 없다. / 내 님은 오늘밤 취해 있다. 취한 채 그냥 내버려두자. / 그래도 혼자 자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차와롱의 첫날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 글·사진 김창호 서울시립대 OB / 월간 산 [459호] 20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