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매리설산에서 불멸에 이르는 길을 깨닫다 *-

paxlee 2008. 3. 14. 20:52
 
                  [중국히말라야 탐사3] 매리설산에서 불멸에 이르는 길을 깨닫다
 
콩선롱바 빙하~카와카보~메일리스~페이라이스 답사

차와롱의 개 짖는 소리에 아침이 찾아왔다. 보온병에 든 따뜻한 물을 찻잔에 따라 들고 2층 발코니로 나섰다. 옥수수와 보리를 벤 땅에는 벌써 밭갈이를 했고 가끔 마른 먼지바람이 불어왔다. 멀리 남쪽으로 카와카부(5,128m)가 희뿌연 구름 속에 붓끝으로 날카롭게 터치한 실루엣으로 들어온다.

미판(米飯)과 찐빵으로 아침을 먹으며 운행계획을 논의한다. 먼저 동성과 훈석은 말을 타고 티벳인들의 매리설산 순례코스를 따르는 통두라(Tongdu La·3,340m)~위추(Wi Chu)~게부라(Gebu La·4,100m)~슈라(Shu La·4,815m)~메일리스(梅里水·2,150m)로, 나는 탐사를 위해 매리설산 산군의 최고봉 카와카보(保瓦格博·6,740m) 서쪽으로 흘러내리는 콩선롱바 빙하(Gongsenlongba Gl.)에 들어가 카와카보 서측을 먼저 탐사한다. 그리고 이 산군의 두 번째 고봉인 6509m봉 북서릉의 높은 고개(5,220m)를 넘고 다시 북쪽 능선을 넘어들어 출발 3일 후 메일리스 마을에서 만나기로 했다.


 * 서방정토에서 환생 기대하며 매리설산 순례

이곳 차와롱은 티벳이다. 고도로 치자면 세계의 지붕인 티벳 고원은 광대하고 또 구성하는 종족도 다양하다. 각각의 지역은 나름의 말하는 방식이 있고, 각각의 라마(Lama)는 나름의 가르치는 방식이 있다 했다. 하지만 티벳을 단일하게 통합시켜주는 것은 그 정신과 문화다. 티벳인들은 선사시대부터 자기들이 사는 땅의 중앙에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 호수에 누워 있는 여자 정령은 티벳 자신으로, 그녀의 신체는 이미 티벳이 군사적으로 강성했던 시기(8~9세기)에 티벳 전체의 외연을 가졌다.


▲ “삼대(三代)가 선업을 쌓아야 매리설산(카와카보)를 한 번 볼까말까 하지!” 매리설산은 티벳인들에게는 가장 성스러운 산중의 하나이다.
그녀의 곧게 뻗은 사지는 티벳인 정착지인 현재의 국경에 달한다. 세 개의 연속하는 정방형 모양의 국토에 여자 정령이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네 구석에 세워진 사원들은 말하자면 정령의 사지에 박혀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못을 상징하고, 이 여자정령의 심장부에는 라사의 조캉사(大昭寺)가 위치한다. 따라서 국토는 굳건히 고정되고 거주하기에 적합하게 된다.

이 도식에서 티벳은 동쪽으로는 중국에 의해, 남쪽으로는 인도에 의해, 서쪽으로는 이란과 바잔티움 또는 아나톨리아의 의미로 룸에 의해, 북쪽으로는 터키족과 위구르족, 또는 비잔티움의 게사르에 의해 둘러싸여 위협받았다. 동쪽에는 점술과 산술의 나라, 남쪽에는 종교의 나라, 서쪽에는 부와 보물과 무역의 나라, 그리고 북쪽에는 말과 무기, 전쟁의 나라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지리관은 가옥구조에도 접목되는데, 진흙 또는 돌로 외벽이 3도 가량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성벽같이 만든 정방형의 3층 구조를 한다. 1층은 가축이 머무르며, 2층은 주거 공간, 3층은 법당이 위치한다. 지붕은 옥수수, 보리 등 수확한 곡물을 건조, 보관하며 모서리에 새벽마다 향을 피울 단을 세웠다.

▲ (좌)차와롱 자낭마을. 앞에 보이는 협곡으로 들어가 콩선롱바 빙하로 향한다. (우) 나무는 두 가지 미덕을 가지고 있는데, 목재로 좋고 땔감으로도 좋다.
몸이 개운치 않다. 고소증 때문일까. 자낭(Zhanang)은 해발 1,950m. 불과 두 달 전에 8,000m급 고봉를 올랐으므로 고소는 아닌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신성한 기운이 주위를 압도하고 몸을 휘감는다.

2006년 10월20일, 동성과 훈석의 팀은 말 9마리, 마부 4명, 차모라는 이름을 가진 노란 개 한 마리로 꾸려진 제법 큰 캐러밴 행렬이 구성되었고, 나는 정확한 지도가 없어 길잡이이자 짐꾼으로 고용한 청년 야롱(Yalong·26)과 단출하게 꾸려졌다. 야롱은 정글탐험이라도 나서는 듯 긴 칼과 망원경을 옆구리에 차고 내 배낭을 짊어졌다. 나는 카메라 배낭이 전부다. 전날 자신의 식량을 준비하라고 주문했는데, 야롱은 참파 가루 한 봉지도 가져오지 않고 조리할 항고만 가지고 왔다.

샬윈강을 떠나 메콩강으로 가기 위해 풍요의 땅을 빠져나간다. 9세기 세금을 거두기 위해 파견된 한 관리는 티벳 동부의 생활을 보고나서 이 땅의 빼어난 점을 열 가지로 나누어 얘기하고 있다.
 
‘그곳의 풀은 두 가지 미덕을 가지고 있는데, 건초에 좋고 목초에도 좋다. 흙은 두 가지 미덕을 가지고 있는데, 집을 짓기 좋고 경작하기에도 좋다. 물은 두 가지 미덕을 가지고 있는데, 먹기에 좋고 농사에도 좋다. 돌은 두 가지 미덕을 가지고 있는데, 건축하기에 좋고 맷돌을 만들기에도 좋다. 나무는 두 가지 미덕을 가지고 있는데, 목재로 좋고 땔감으로도 좋다.’
다시 말해 이 땅은 농경과 방목에 이상적인 땅이었다. 이곳에 도착한 한 무리의 순례자들도 치나통(Chinatong·2,470m) 근처에서 베어 온 대나무 장대를 들고 길을 떠난다. 대나무는 집까지 가져갈 것이고, 매리설산을 한 바퀴 순례하는 고행길은 계속된다. 이들은 불교 경전을 암송하고 선업을 쌓으며, 또 티벳 내의 성산(聖山)과 곰파를 모두 순례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내세에는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나 서방정토(Chennezig)에 환생하기를 기원한다.

“옴마니밧메훔-.”
그들은 연이어 진언을 읊조린다. 그리고 작별의 말을 전한다.
“타시델렉(Tashi Delek·우주만물 모두의 행과 복이 함께 하기를)!”

이들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우주 만물의 생명 모두의 복을 비는 것이다. 그리고 매리설산의 순례길처럼 지금의 작별은 또 어디에선가 만남을 의미한다. “타시델렉!” 나도 인사를 건넸다.

자낭의 중앙으로 흘러나오는 협곡을 따라 동쪽으로 들어간다. 좁은 곳은 채 2~3m도 되지 않았고 양쪽 암벽은 수백m 치솟아 어둑하다. 서로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야롱과 나는 쉼 없이 2시간을 올랐고 풍경은 수시로 바뀌었다. 계곡은 아름드리 침엽수가 밀림을 이루고 관목은 붉고 노란 단풍이 들고 있었다. '一山有四季 十里不同天(산은 사계를 품고 하늘은 십리마다 같지 않구나).' 산은 아래발치에서부터 오를수록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며 하늘 닿은 곳은 흰 눈이다. 그 풍경과 기후 또한 변화무쌍하기 그지없다.

▲ 알 수 없는 신성한 기운이 주위를 압도하고 몸을 휘감는다.
작은 계곡을 벗어나 길 흔적도 사라진 가파른 된비알을 올랐다. 이끼가 매달린 울창한 숲은 여전히 하늘을 가렸고, 그 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어왔다. 야롱이 앞서가 긴 칼로 잔가지를 치며 앞길을 만들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야롱에게 제대로 가고 있는지 손짓해 보지만 그는 웃기만 한다.

몸에 열이 나고 어지러웠다. 처음에는 몇 번을 앉아 쉬었다. 앞서간 그를 따라가면 기다렸다는 듯 그는 배낭을 메고 사라졌다. 참고 발걸음을 재촉해 보지만 허사였다. 땀이 흥건한 몸을 경사면에 누였다. 한 걸음도 갈 힘이 없다. 어쩐 일인지 육체에서 정신과 에너지가 모두 빠져나가고 텅 빈 껍데기가 된 듯했다.

야롱이 되돌아와 마실 물을 준다. 물 마시는 것조차 귀찮다. 갑자기 2,000여m의 고도를 올린 고소증일까. 이제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다. 단지 누워서 쉬고 싶을 뿐이다. 그는 날이 어두워진다고 재촉하고 부축하기까지 한다. 비어버린 몸은 바람에 날리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착각이 든다. 비틀거리며 3,885m의 능선에 올라섰다. 찬 바람이 매리설산의 주봉 카와카보쪽에서 들이친다. 오한이 든다. 벌써 해는 저물었고 하얀 눈으로 덮인 카와카보는 단순한 산의 형상을 넘어 신비스러운 푸른 빛의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 (좌측부터)나는 순례코스가 아닌 탐사코스를 찾아나섰다. 길도 없는 잡석의 사면에서 야롱과 나는 한 명씩 번갈아 건너갔다. / 티벳인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우주 만물의 생명 모두의 복을 비는 것이다. / 매리설산을 한 바퀴 도는 순례자들, 내세에는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나 서방정토에 환생하기를 기원한다.
 
카와카보의 서쪽면 콩선롱바 빙하 탐사는 유럽과 미국에서는 없었다. 내가 처음일까, 아님 일본의 타모츠 나카무라 선생이 여기에 왔었을까? 카메라를 꺼내 200mm 렌즈로 바꿔 촬영을 시도했다. 카메라가 갑자기 오작동을 하며 필름이 감겨 버렸다. 시간이 없었다. 너무 어두워져 ISO 100 필름으로는 노출이 부족했다. 감도를 더 높이고 귀국하여 현상할 때 보정하는 수밖에 없다. 겨우 몇 컷을 찍고 혹시나 해서 디지털 카메라로도 찍었다.

 * 꿈속에서 고승과 삶과 죽음에 대해 얘기 나눠

암흑으로 변한 사위 속으로 나무지팡이를 더듬거리며 나아간다. 이때는 배낭 안에 랜턴이 있다는 것조차 기억해내지 못했다. 길을 더듬어 어디론가 야롱은 나아간다. 빙하에서 흘러나오는 강물을 건너고 통나무로 지은 집이 몇 채 나왔다. 미친 듯이 짖어대는 개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살기마저 감돌았다. 도대체 이런 곳에 집이 있고 사람이 살다니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마을은 자잉이라고 했다.

축전지로 불을 켜 놓은 집으로 들어갔다. 젊은 부부와 두 살배기 젖먹이 아이가 있었다. 모닥불이 피어오르는 곁에 양털 방석을 내준다. 옥수수로 만든 막걸리 같은 칭케를 따뜻하게 데워 따라준다. 연거푸 몇 잔을 들이켰다.
안주인이 세숫물을 담아주었고 나무 바닥에 혹 물이라도 떨어질까 들고 문턱 밖에서 엉거주춤 두 손으로 얼굴을 씻으려는 순간 뒤에 있던 개가 엉덩이를 물었고 다시 덤벼드는 그 놈을 피해 뛰쳐 들어왔다. 통증이 심했다. 덩치가 송아지만한 티벳 개 장하오(藏契)는 마치 아프리카의 숫사자처럼 목둘레에 긴 털을 하여 대모구(大毛拘)라고도 불린다. 이 장하오는 지구상의 견종 중 사납기로는 첫째로 손꼽힌다. 안주인이 내놓은 먹거리는 삶은 감자에 수유차가 전부였다. 저녁을 때우고 눕자말자 잠들었다.

21일, 밤에 눈이 내렸고 기온은 영하로 떨어졌다. 전날 저녁과 같은 삶은 감자에 수유차를 먹고는 남은 감자를 챙겼다. 어제 운행에서 앞서가던 야롱은 배낭 안에 있던 간식을 모두 먹어치워 식량이 부족했다. 안주인에게 사례비를 주려고 잠잘 때 벽에 걸어 놓았던 재킷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돈이 한 푼도 없다. 바지주머니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주인들과 야롱을 원망했다.

말로 감사를 표하고는 내린 눈을 밟으며 6509m봉 북쪽 능선을 향해 올랐다. 오르다 너무 추워 모닥불을 피워 쬐기도 했다. 서쪽으로 미얀마와 국경선 상의 낮은 산들과 북서쪽 구름 위로 양바이숨(Yangbayisum·6,005m)이 얼굴을 내밀었다. 길도 없는 잡석 사면에서 우리는 한 명씩 번갈아 건너갔다. 고개 전에서 불을 피워 느끼한 중국 라면을 야롱이 가지고 온 항고에 끊여 먹었다. 우리는 다시 생기를 찾았다.

5,220m의 고갯마루에 섰다. 눈발에 바람의 말(馬) 룽다만이 모든 것이 얼어붙은 곳에 펄럭이고 있다. 우리가 내려가야할 반대편은 운무가 피어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파른 설면이다. 흡사 지옥으로 떨어지는 홈통처럼 느껴졌다.

▲ 一山有四季 十里不同天(산은 사계를 품고 하늘은 십리마다 같지 않구나).
 
야롱은 얇은 청재킷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얼어붙어 허옇게 변했다. 그래도 따뜻한 옷이라도 입은 나는 측은한 마음뿐이다. 야롱은 나무지팡이를 두 손으로 꽉 다잡아 쥐고 앞장선다. 아이젠이 필요할 정도로 너무 가파르고 미끄럽다. 자칫 수천m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서로 잡아주고 길을 찾으면서 얼마나 내려왔을까. 잡석의 모레인 빙하가 나타났다. 바위턱에 쉬면서 야롱의 손을 꼭 잡았다.

3km 정도 길이의 빙하를 건넜다. 룽다와 타르초, 작은 연못가에 무너진 세 채의 목동집이 있었다. 다시 언덕을 기어올랐다. 사람이 다닌 흔적의 길이 나타났다. 구름 사이로 내리비친 햇빛이 낙엽송 군락의 노란 잎들에 닿자 황금색 세상을 만들어낸다.

다시 비가 내리고 눈이 날렸다. 끝도 없는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았다. 몸은 계속 엉망이다. 어젯밤에 개에게 물린 자리는 이빨자국에 내의는 피로 물들었다. 더친으로 나가면 바로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 티벳을 여행하다 개에게 물리는 여행자가 많다. 광견병에 조심하라는 것이 가이드북 첫 줄에 나올 정도다. 

눈은 계속 흩날렸다. 지붕을 돌판으로 덮은 양치기집이 있는 언덕에 도착했다. 먼저 불을 지폈다. 이렇게 길도 없는 코스라면 차라리 동성이네 팀에 합류할 것을. 그랬으면 지금 말 위에 올라앉아 여유를 부리고 있을 텐데…. 여기저기 부지런을 떨며 뒤지고 다니던 야롱이 훈제 염장한 돼지고기 한 토막과 무를 가지고 나타나 연신 싱글거린다. 하기야 남은 우리 식량은 라면 몇 봉지뿐이다. 돼지고기를 넣고 끊인 음식은 역한 냄새로 입도 댈 수 없어 결국 야롱 독차지가 되었다.
▲ (위) '그것을 구속하는 껍데기를 스스로 부숴 버리는 수밖에 없어. 그게 진정 불멸에 이르는 길이지.' (아래)신열로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꿈속을 헤매게 한 매리설산 자락의 오두막.
 
절벽에 반쯤 매달린 암자로 물통을 지고 오르고 있다. 곰첸(Gomtsen·수행자)의 수발을 들고 있는 나는 매일 반나절이나 되는 곳까지 가서 물을 길어오고 있었고 반복되는 일상에 괴로웠다.

“스승님, 샘에서 흘러나온 물이 흘러내려 바로 여기 밑까지 오는데 왜 하필이면 저 먼 샘까지 갔다 오라 하십니까?”

“나는 그 물이 마시고 싶구나.”
그리곤 침묵이다. 다시 물통을 들고 올라간다. 계곡으로 짙은 수증기를 머금은 구름이 흘러갔다.
“스승님, 많은 친구들이 산을 오르다 죽었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라마승은 한동안 벽을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삶과 죽음, 환생을 이야기한단다. 삶이란 오직 죽음이라는 말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고, 죽음 또한 삶이라는 말로만 설명될 수 있어. 이 두 가지가 실은 한 가지 사실의 양면이지. 무지한 사람들에게 그것들이 달리 보일 뿐이야. 삶과 죽음의 구분이 사라진 바로 그 자리가 내가 이르고자 하는 곳이지.”
스승은 길어온 샘물로 만든 버터차를 마셨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되돌아온 사람을 난 본 적이 없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란 뭐겠나!”
그는 눈을 반쯤은 감고는 명상에 잠긴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불멸의 생명 에너지가 완전한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구속하는 껍데기, 즉 결국 부서지고 소멸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그 껍데기를 스스로 부숴 버리는 수밖에는 없어. 그게 진정 불멸에 이르는 길이지.”

갑자기 전화가 왔다.
“오빠 왜 거기 있어요? 여기로, 나한테로 오세요.”

나는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몸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얼굴 위로 핏물이 떨어진다. 얼굴을 도리질쳤다. “제발, 제발” 신음을 하며 소리치지만 목구멍 안에서뿐이다. 눈을 떴다. 사그러드는 모닥불 빛이 돌 천장에 일렁인다. 녹은 눈의 물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꿈이었다.

 * “우주만물 모두의 행과 복이 함께 하기를…”

▲ 5,220m의 고갯마루에 섰다. 우리가 내려 가야할 반대편은 운무가 피어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파른 설면이었다. 흡사 지옥으로 떨어지는 홈통처럼 느껴졌다.

 

뜨거운 물로 아침끼니를 대신하고 출발했다. 밤새 내린 눈사면을 야롱은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대신 날은 청명하게 갰다. 바람에 날려오는 눈가루에 공기는 온통 은빛으로 빛난다. 매리설산은 티벳인들에게는 가장 성스러운 산 중 하나다. 이 산 주위에는 주봉인 카와카보(또는 Kang Karpo) 외에 13개의 5,000~6,000m급 산들이 위치한다. 1986년 일본 등반대가 이곳을 찾았지만 현지 티벳인들의 거센 반대로 등반 시작도 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당시 이곳 촌장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저 산에 올라서는 안 됩니다. 만약 당신들이 신성한 기운을 침범하면 신의 노여움이 따릅니다. 우리는 신성한 산을 지키기 위하여 등반을 막을 겁니다.”

하여 매리설산의 최고봉 카와카보(6,740m)에 첫 등반은 일본의 조에츠산악회(Joetsu Alpine Club)팀에게 돌아갔고, 원주민들의 반대에 지프형 자동차 두 대를 마을에 기증함으로써 어렵게 등반을 허락받은 이들은 연일 계속되는 악천후와 위험한 눈사태로 등반을 포기해야 했다.

▲ (위)매리설산 산군의 최고봉 카와카보(6,740m)봉의 서쪽 모습은 신비스러운 푸른빛의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아래) 설산을 오르는 산악인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늘 서 있으며 그 구분이 사라진 바로 그 자리에 이르고자하는 자기 인식의 길(道)로서 산을 오른다.
 
그 후 일본 교토대학산악부팀이 뒤따랐다. 1990~91년에 쿄토대팀은 분수령 양쪽을 정찰하고 중국과 합동으로 동쪽으로 도전했다. 그리고 1991년 1월 제4차 원정대는 중국과 합동등반으로 이루어졌는데, 몬순 영향에서 벗어난 동계를 택했지만 중국대원 한 명과 연락관만 남겨놓고 모두 C3(5,100m)에 모여 있다가 신년 초 밤에 눈사태를 맞아 17명 모두 매몰, 실종되었다. 신의 노여움을 산 것일까, 하지만 설산을 오르는 산악인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늘 서 있으며, 그 구분이 사라진 바로 그 자리에 이르고자하는 자기 인식의 길(道)로서 산을 오른다.

폭풍설이 몰아치는 4,705m의 고개를 넘어 봄이 기다리는 계곡 안으로 내리달렸다. 그리고 푸른 잎으로 봄기운이 도는 나무 밑에서 어제 꾼 이상한 꿈을 메모했다. 진리란 언제 어디서나 관통하는 것이다. 육체는 지식을 얻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가 보고들은 것조차도 확실하게 믿을 수 없다고 소크라테스가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훈석이 뒤에서 “창호형!” 하며 달려왔고 곧 동성도 말을 타고 나타난다. 우린 샬윈강에서 흘린 땀을 메콩강에서 씻었다. 붉은 란창쟝 강변에 조그만 마을 메일리스(梅里水·2,150m)에서 야롱과 헤어졌고, 어두워진 페이라이스(飛來寺·3,400m)에 도착했다. 다음날 새벽 매리설산 전체를 조망하는 관망대로 나아갔다.

란창쟝 협곡 남쪽에서 북쪽으로 구름은 재빠르게 흘러간다. 구름이 걷히는 순간순간 흰색 스투파 사이로 카와카보와 미안지무(Mianzimu·6,054m)가 나타난다. 제단에 향나무 가지를 사르고 합장하던 노파는 신산(神山)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삼대(三代)가 선업을 쌓아야 카와카보를 한 번 볼까말까 하지!”

주름이 쪼글쪼글한 노파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고는 옴마니밧메훔을 다시 웅웅거린다. 합장한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꼬리를 삼키는 신성한 뱀, 영원한 재생을 통해 시작과 끝을 함께 상징하는 그 이미지가 떠오르고 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돈은 다른 옷 주머니에서 나왔다. 신열로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꿈속을 헤매게 한 매리설산과 사흘동안 추위와 배고픔, 나의 오해에도 단 한 번도 웃음을 잃지 않은 야롱을 향해 눈을 감았고 저절로 두 손이 모아졌다.

“타시델렉(우주만물 모두의 행과 복이 함께 하기를)!”.

 - 글·사진  김창호 서울시립대산악회 / 월간 산 [460호] 20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