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로체-에베레스트 연속 등정자 윤중현씨 *-

paxlee 2008. 3. 19. 21:49

 

           [이 클라이머의 삶] 로체-에베레스트 연속 등정자 윤중현씨

 

                 

 

윤중현(尹重鉉·38)은 해발 8,516m의 로체 정상에 올랐다가 최종캠프로 내려서는 길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전날 밤 2~3인용 텐트에서 대원과 셰르파 6명이 지냈으니 잠 한숨 잘 수 없었다.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다리를 쭉 뻗으면 발이 텐트 밖으로 나가곤 했다. 그런 상태로 좁은 텐트에서 버티다 밤 11시 반경 정상으로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9시간 뒤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은 너무도 기뻤다. 2000년 K2 등정 이후 7년만에 오른 8,000m급 거봉이었다.


정상에서 최종캠프까지 표고차 800m 설벽에는 고정로프가 깔려 있지 않았다. 자칫 미끄러지는 날이면 2,000m 아래 웨스턴쿰 빙하로 곧장 떨어질 판이었다. 다리가 풀리면서 툭하면 주저앉았다. 눈꺼풀이 내려앉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순간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그러다 눈을 뜨면 여기가 어딘가 싶어 깜짝 놀라곤 했다.


9년 전 공가산에서 추락사한 후배 오종락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종락이처럼 영원히 집에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려 눈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졸음은 계속 쏟아졌다. 그렇게 힘든 하산길을 이겨내고 그는 캠프로 살아 돌아왔다. 그리곤 며칠 뒤 세계 최고봉 등정길에 또 나선 것이다.


윤중현은 로체 등정을 마치고 닷새 정도 쉬기는 했지만 곧바로 세계 최고봉에 도전한다는 것은 체력적으로 무리였다. 최종캠프인 사우스콜(7,950m)에 올라섰을 때에는 매우 지친 상태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선배 김홍빈, 후배 김미곤과 함께 정상으로 향했다. 앞서간 동료들과 1시간 이상 벌어진 상태로 남동릉 루트에서 가장 어렵다는 힐라리스텝 아래에 도착했을 때는 체력이 거의 바닥나 버렸다. 그러나 떼지어 힐라리스텝을 내려서는 외국 산악인들을 보곤 용기를 얻었다.


▲ 로체 정상을 향하는 윤중현씨.

“대다수 외국 산악인들이 정신은 아예 없고, 몸도 혼자서는 서 있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어요. 셰르파들이 앞뒤에서 잡아주고 밀어주면서 겨우 한 발씩 내려섰죠. 저런 사람들도 정상에 올랐다 내려오는구나 싶어지면서 힘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습니다.”

 * 군 입대 이틀 앞두고도 등반대회에 참가


국내 히말라야 원정대 가운데 에베레스트와 로체 연속등반에 나선 팀은 88년 대산련팀 이후 여러 팀이 있었고, 그중 많은 팀이 성공리에 원정을 마쳤지만, 연속 등정을 이루어낸 대원은 지난해 봄 한국도로공사팀의 윤중현과 김미곤(35) 두 산악인에 불과하다.

▲ 로체에 이어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윤중현씨.

윤중현의 연속 등정은 사실 뜻밖이었다. 96년 이후 2000년 K2 원정에 이르기까지 매년 히말라야 원정에 나섰지만 이후 7년의 공백기가 있었다. 먹고사는 일에 얽매이다 보니 원정을 코앞에 두고도 제대로 운동할 여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 그는 김미곤과 함께 국내 최초의 에베레스트-로체 연속 등정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에베레스트에 먼저 도전하려다 로체가 먼저 기회가 왔기에 밀어붙였고, 또 사우스콜에 도착했을 때 컨디션이 바닥난 상태였지만 그래도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오를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정상을 향했다”고 말한다.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끝까지 밀어붙이게 된 그의 성향은 97년 낭가파르밧(8,125m) 원정 때의 쓰라린 경험에서 비롯된다. 당시 그는 제1차 공격조에 포함돼 대원 2명과 함께 최종캠프에 올랐다. 그러나 캠프 도착 이후 몰아친 강풍과 폭설에 갇혀 이틀간 거의 굶으면서 좁은 텐트에서 지내야했고, 탈진 상태에서 폭풍설을 헤치면서 사지에서 탈출과 같은 하산을 해야 했다.


베이스캠프 도착 며칠 후 2차 공격에 나섰어요. 도저히 안 되겠더군요. 이미 체력이 바닥나 있었던 거죠. 결국 얼마 오르지 못해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 얻은 교훈입니다. 기회가 왔을 때 놓치면 다시 기회를 잡기 쉽지 않다는 거죠.”

▲ K2 제2캠프에서. 뒤로 브로드피크가 우뚝 솟아 있다.

 

전남 해남의 한 농촌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윤중현은 산꾼 형을 둔 덕분에 고교시절부터 산에 맛을 들였다. 고교 2학년 때 친구 두 명과 함께 지리산 종주산행을 했을 정도로 산에 빠져들었다. 89년 조선이공대 전자과에 입학하자마자 자연스럽게 찾아간 곳이 산악부실이었다. 조선이공대 산악부는 2년제 대학답지 않게 전통을 자랑하는 동아리였다. 특히 초창기 선배들이 워낙 강해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산행은 그야말로 빡셌다. 입회 직후부터 모든 게 스파르타식이었고, 장기산행 때 배낭 두세 개 메고 걷는 것은 기본이었다. 거기에다 정신교육이라며 툭 하면 괴롭히곤 했다.


▲ 세계 제2위 고봉인 K2 정상.

 

“어찌나 많이 맞았던지 2학년 축제 때는 다른 동아리 학생들이 ‘줄빳따’ 맞는 동기와 후배들이 안쓰러워 선배들에게 그만 때리라고 항의했을 정도니까요. 오죽 했으면 동기 모두 탈퇴할 생각을 했겠어요.”


그래도 바위가 너무나도 좋았다. ‘바위체질’이다 싶었다. 새내기답지 않게 암벽등반을 시작한 지 두어 달만에 월출산 시루봉 암벽에 나 있는 루트를 모두 앞장서 오르고, 재미 삼아 한 등반시합에서 우승상품으로 받은 빤빤이창 암벽화를 신은 이후 광주·전남 일원의 암벽에서 못 오르는 루트가 없을 정도로 급성장했다. 매번 결과가 그다지 좋지 않지만 1학년 때 생긴 전국암벽등반대회 첫 대회부터 입대 이틀 전 열린 제3회 대회까지 참가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제3회 대회는 수원에서 열렸어요. 그래서 대회 이튿날 입대했죠. 대회를 마치고 산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다 보니 집에서 받은 입대 격려자금이 바닥나고 말았어요. 어쩔 수 없이 영등포에 사시는 누나집에 가서 차비를 받아 새벽 첫차를 타고 논산으로 갔습니다. 그 때는 정말 머리 속에 산과 산친구들로 꽉 차 있었던 것 같아요.”


 * 공가산 하산길에 후배 유명 달리해


입대 후에도 산과의 인연은 끊지 않았다. “훈련소에서 자대 배치를 앞두고 산에 다녀본 사람 있으면 손들라지 뭐예요. 당연히 들었죠. 그래서 공수부대 산악팀에 배속됐습니다.”


입대 얼마 뒤 대통령기 전국등산대회가 열린다는 얘기가 들리자 부대장은 장교와 하사관 2명, 그리고 윤중현 4명을 한 팀으로 묶어 대회에 출전시킬 계획을 세웠다. 부대 이름을 붙인 비호산악회팀이다. 대회 장소가 춘천 삼악산이라 공포된 이후 한 달간 전지훈련에 나섰다. 코스란 코스는 다 오르내리고, 대회의 대미를 장식하는 구보 경기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뛸 만한 곳도 다 뛰어다녔다. 그 결과 일반부 우승이란 큰 상을 부대에 안겨주었다.


▲ 89년 월출산 시루봉 등반. / 87년 고교시절 지리산 천왕봉.

 

그렇게 군생활을 하면서도 산에 다닐 수 있었음에도 성에 차지 않았다. 당시 광주·전남 산악계에는 히말라야 원정붐이 일고 있었고, 군 면제를 받은 동기들이 고산 원정에 나선다는 소식만 들려오면 부러움에 마음이 착잡해지곤 했다.

 

고대하던 고산 등반의 꿈은 제대 3년 뒤인 96년 처음으로 찾아왔다. 목포를 비롯한 광주·전남 지역 산악인들로 구성된 중국 사천성 대설산맥 최고봉 공가산 원정이었다. 미니아콩가(Minya Konka·7,566m)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공가산 북동릉 초등을 노린 등반이었다. 북동릉은 80년대에 일본팀이 세 차례나 도전했으나 무려 8명이나 목숨을 잃고 등정에는 실패한 악명 높은 루트였다.


그러나 루트 초등의 꿈을 안고 나선 원정은 6명의 대원 대부분 고산등반 경험이 없는 데다 정보마저 거의 없는 상태였던지라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6,200m 진출을 끝으로 포기해야했다.


“지금까지도 가장 힘들었다고 기억에 남아 있는 산입니다. 정말 뼛속 깊이 파고드는 추위였어요. 바람은 어찌나 불어대던지 고정로프는 연줄처럼 하늘로 날아오르고, 바닥에서 날아오른 눈가루에 얼굴을 맞으면 찢어져나가는 것처럼 아팠으니까요. 그래도 대원 6명이 똘똘 뭉쳐 정상을 향했어요. 식량이 떨어져 더 이상 등반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야 포기했지만요.” 

이듬해인 97년 낭가파르밧 원정을 통해 8,000m급 등반 경험과 함께 ‘기회가 왔을 때 밀어붙여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은 윤중현은 98년 공가산 재도전에 나섰다. 김재명 대장을 비롯해 첫 원정 때 참가했던 대원이 3명이나 참가했기에 경험과 현지 정보가 풍부했다. 첫 도전 때와 달리 빠른 속도로 등반을 펼쳐 베이스캠프 도착 30일만에 대원 6명이 정상 공격을 위해 마지막 제5캠프(6,800m)에 올라섰다.


▲ 98년 공가산 등반.

그러나 한 명은 체력 약세로 출발을 포기하고, 대원 5명이 정상으로 향했고, 7,000m를 넘어서면서 또다시 2명이 되돌아서는 바람에 결국 3명만이 정상에 올라섰다. 재도전에서 이룩한 북동릉 초등정이었기에 하늘을 날 듯 기뻤다. 그러나 그에게는 엄청난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북동릉에서 캠프로 내려서기 전 잠시 담배 한 대 피면서 잠깐 쉬었다 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종락이가 먼저 가겠다고 일어서는 순간 넘어지더니 수천m 아래 빙하로 추락하고 말았어요.”


국내에서 준비해간 2,000m 고정로프로도 모자라 막판에는 초반부에 설치한 로프를 거둬 사용한 대원들은 정상공격에 나설 때에는 7mm 30m 로프 한 동만 가지고 출발했다. 대부분 청빙지대인 데다 속도차가 많이 나고 서로 확보한 채 등반하다 한 사람이라도 실수하는 날이면 전원 추락할 가능성이 높기에 줄을 묶지 않고 하산하던 중이었다.


“정신이 없었죠. 포기하고 마지막 캠프로 내려서던 대원들은 크레바스를 넘어서지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어요. 대장인 재명이 형은 후배들을 안전하게 인도하려고 먼저 내려가고, 저는 종락이 찾겠다고 빙하쪽으로 내려섰어요. 한 200m나 내려갔을까, 갑자기 눈이 푹 주저앉지 뭐예요. 10여m 추락한 것 같아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크레바스 안이더군요.”


뒤따라 내려가던 임찬수 대원이 지니고 있던 보조자일을 내려주는 덕분에 윤중현은 크레바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베이스캠프로 내려섰을 때 그의 손과 발은 심한 동상에 걸려 새카맣게 죽어 있었다. 다행히 하행 캐러밴 중 현지인들이 가르쳐준 대로 약초 달인 물에 담근 결과 귀국 후 손톱과 발톱이 빠져나간 뒤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 두 번째 도전에서 공가산 정상에 오른 윤중현씨.

“정신이 없었던 거죠. 일단 캠프로 내려가 상황을 판단한 다음 구조든 시신 수색이든 했어야 하는데 완전히 지친 상태에서 수천m를 내려서려니 했으니까 말이에요. 1년 아래예요. 참 좋은 친구였어요. 힘도 좋았고요. 마지막 캠프에서 집에 돌아가면 순대에 막걸리나 실컷 먹자고 했는데…. 요즘도 누구에게든 허리벨트에 매달 확보줄은 짧게 하라고 일러 주곤 해요. 종락이 사고는 허리에 묶은 슬링을 일어서면서 밟아 넘어지면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니까요.”


공가산 정상을 오른 그에게 K2 원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고질병인 허리디스크가 도지는 바람에 산 입문 이후 오랜 세월 염원해왔던 K2 등반은 포기해야했다. 99년 카라코룸 8,000m급 3개봉 한 시즌 등정을 목표로 원정에 나선 전남연맹팀은 가셔브룸1봉(8,068m)과 2봉(8,035m)은 계획대로 등정했으나, K2는 남남동릉 해발 7,700m 지점에 정상공격에 필요한 장비와 식량을 올려놓은 이후 끊임없이 퍼붓는 폭설과 강풍에 밀려 포기해야했다.
 
“원정에 참가하지 못하는 대신 트레킹에 나섰어요. K2에서부터 G1, G2 베이스캠프까지 모두 방문했죠. 당시 전남연맹은 가셔브룸1봉과 2봉, 그리고 K2 3개봉을 등반하고 있었거든요. 선배 두 분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베이스캠프에서 산을 바라보고, 또 등반하러 캠프로 올라가는 대원들을 보면서 겉으론 웃으면서도 속으로 씁쓸했으니까요.”
▲ 에베레스트 등정 후 사우스콜 캠프로 무사히 내려섰건만 동료들의 사고소식에 비탄해하고 있는 윤중현씨.

 

K2 등정 실패로 전남산악연맹팀은 분루를 삼켜야했으나 그에게는 기회가 다시 찾아온다. 이듬해인 2000년 K2 재도전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첫 도전에서와 마찬가지로 남남동릉을 목표한 원정대는 1, 2차 공격을 통해 8명이라는 많은 대원을 정상에 올리며, K2 등반사상 단일팀 최다 등정기록을 세운다. 윤중현도 등정자 중 한 명이었다.


“대원 10명 가운데 8명이 올랐어요. 대원 대다수가 원정 경험이 많다 보니 손발이 착착 맞아떨어지고, 속도도 빨랐어요. 시즌 초등을 기록했으니까요. 그래도 정상에서 내려설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남들은 저벅저벅 내려서는데 나 혼자 힘들어 쩔쩔맸죠. 최종캠프 출발 이후 다시 캠프로 돌아올 때까지 20시간 가까이 등반했으니 몸도 지쳤지만 잠이 쏟아지는 걸 정말 참기 힘들더군요. 꾸벅꾸벅 졸다가 미끄러지면 정신이 번쩍 나면서 이렇게 걷다가 종락이처럼 되는 게 아닌가 두려웠어요.”


2000년 K2 원정을 마칠 때까지 중현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산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서른이 넘어서면서 앞으로 살아갈 일이 걱정되었다. 몇 년간 선배와 함께 대출업을 해오다 2003년 당시 붐을 일으키던 PC방을 차렸다.


“3년간 매일 12시간 안팎 앉아서 지냈어요. 정말 힘들더군요. 괜찮아진 허리도 그때 다시 나빠졌어요. 그 때 박상수 선배가 에베레스트 원정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던 거예요. 그래서 일단 원정을 다녀온 다음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PC방을 정리했죠.”


그 에베레스트-로체 원정은 2006년에서 한 해 뒤로 미루어져 2007년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윤중현은 로체에 이어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는 기록을 세웠지만 정작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정상에 올라섰을 때 김미곤은 2시간 넘게, 양손 장애인인 선배 김홍빈도 1시간 이상 기다리고 있었다. 산소가 희박한 죽음의 지대에서 동료들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생각에 기쁨의 순간을 누릴 수 없었다. 게다가 어렵게 하산, 최종캠프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에게는 비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서벽 등반 중이던 오희준과 이현조씨의 사고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 “이젠 약혼녀를 자일파트너 삼아 먹고사는 일에 전념할 터”


“제가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을 때 오희준과 이현조는 남서벽 제4캠프에서 자고 있다가 봉변을 당했어요. 눈사태에 텐트가 무너져 내리면서 추락사한 거죠. 정말 미치겠더군요. 제2캠프를 출발할 때 서로 잘 갔다 오라며 인사를 나누었는데 말이에요. 희준은 좋은 친구였고, 현조는 좋은 후배였어요. 로체와 에베레스트 연속 등반을 마음먹은 것 역시 희준이의 의견을 따랐던 거예요. 간 김에 둘 다 모두 올라가라는 충고를 받아들였으니까요.”


윤중현은 지난해 봄 원정을 마친 뒤 고산등반은 일단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 원정을 다녀온 뒤로는 먹고사는 일에 전념하겠다고 자신에게 약속했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산을 떠난 것은 아니다. 요즘도 한 달에 두 차례 이상 산을 찾는다. 대신 파트너는 클라이머가 아닌 약혼녀 오은정씨(34)로 바뀌었다.


“산은 중독인 것 같아요. 정상을 향할 때면 그렇게 힘들 수가 없어요. 등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빨리 하산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요. 그런데 희한하죠, 집에 돌아오면 다시 고산이 떠오르는 걸 보면 말이에요. 아무튼 당분간 고산은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어요. 이번에는 정상을 향해 밀어붙일 힘을 먹고 사는 일에 쏟고 싶어요. 자신 있어요. 은정이도 저를 믿고 있으니까요.”

- 글 한필석 차장대우 / 월간 산 [461호] 20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