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오지 탐험에 한평생을 투자한 '아브루치 공' *-

paxlee 2008. 6. 10. 21:27

 

 

                       오지 탐험에 한평생을 투자한 '아브루치 공'(1873~1933)

 

           伊왕족 신분 잊고 山에 미쳤던 로맨티스트… 혈통의 편안함보다는 모험 즐겨
           알래스카 엘리어스산 세계 초등… 阿·북극 등 오지 탐험에 한평생


아브루치가 사진가 비토리오 셀라와 함께 오른 아프리카 중동부의 루웬조리산.

인류역사상 지구 전역을 커버하는 본격적인 탐험과 등반의 시기를 꼽으라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이다. 그리고 이 시기를 가장 격정적으로 보낸 단 한 사람을 꼽으라면 그는 당연히 이탈리아의 아브루치 공이다. 그는 알프스는 물론이거니와 히말라야와 알래스카 그리고 아프리카와 북극 등지에서 이전까지는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신천지에 숱한 발자국을 남겼다.

 

그는 또한 평생 이루지 못할 사랑과 꿈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았던 장엄한 로맨티스트이기도 했다. 아브루치는 이탈리아 사보아 왕가(1861~1946)의 자손이다. 덕분에 본명이 무척 길다. 그의 공식적인 이름에는 언제나 ‘루이지 아메데오 디 사보아 아오스타’라는 기나긴 수식어들이 따라 붙는다. 하지만 등반사에서는 간단히 줄여 그저 ‘아브루치’ 혹은 ‘아브루치 공’(그는 정식으로 ‘공작’의 칭호를 받았다)이라 부른다.

 

19세기 말의 왕족 혹은 귀족들은 대개 해군 지휘관으로 키워진다. 아브루치 역시 그러한 과정을 밟아 16세에 이미 해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1년 반의 기간 동안 대서양과 태평양을 항해했다. 그가 당시 스페인의 왕으로 재위했던 아버지의 부음을 받은 것은 이 항해기간 동안이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20세를 막 넘어설 즈음 스위스 체르마트에서 앨버트 머메리와 만났다는 기록이다. 당시 머메리는 마터호른 즈무트능선를 초등하여 이미 유럽 산악계의 선두주자로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올랐던 즈무트능선은 너무도 험준하여 재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청년 아브루치는 당돌하게도 머메리에게 자신과 함께 재등해 달라고 졸랐다.

 

머메리는 청년의 패기가 마음에 들었던지 기꺼이 그를 데리고 다시 한번 마터호른에 올랐다. 그리하여 아브루치는 마터호른 즈무트능선의 재등기록을 갖게 된다. 머메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이탈리아 청년을 영국산악회 회원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1894년의 일이니 머메리가 낭가파르바트로 원정을 떠나 실종되기 꼭 1년 전의 일이다. 아브루치로서는 선배 세대 최고의 산악인으로부터 마지막 축복을 받은 셈이다.

 

그는 훗날 머메리를 기리기 위해 낭가파르바트 원정을 계획했으나 때마침 인도 전역을 휩쓴 전염병 때문에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머메리는 언제나 내 가슴 속에 있다”며 아브루치는 회상한다. “그는 나를 왕족의 한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대등한 산악인으로 대해줬다. 나는 그를 마음 속 깊이 존경했고, 그와의 우정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아브루치의 이름을 온 세상에 떨친 것은 그가 24세 때 해치운 알래스카 세인트 엘리어스산(5,489m) 세계초등 기록이다. 이 산이 매력적인 등반대상지로 떠오른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접근 자체가 어렵고 너무도 혹독한 추위가 가로막아 이전까지의 모든 시도들이 좌절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왕족 출신인 아브루치는 혈통이 안겨줄 편안한 삶보다는 모험과 등반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그가 24세 때 매서운 추위를 뚫고 세계 최초로 오른 알래스카의 세인트 엘리어스산.

아브루치는 20명의 대원들이 50일 동안 버틸 수 있는 3톤의 식량을 썰매에 싣고 빙하지대를 횡단하는 대 캐러밴을 펼친 끝에 끝끝내 이 산의 정상에 오른다. 당시 그와 동행했던 산악 사진가가 이탈리아 산악회의 창립자 퀸티노 셀라의 조카 비토리오 셀라인데, 현재 ‘세계 산악사진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며,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브루치와 깊은 우정을 나눈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아브루치의 열정과 도전은 당시까지 지구상에 남아있던 모든 미답의 극지와 오지에 집중된다. 그는 1899년 121마리의 개가 끄는 개썰매를 지휘하며 북극점에 도전한다. 아브루치는 손가락을 절단하고 동상과 설맹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집요하게 앞으로 나아갔으나 결국 북위 86도 지점에서 돌아서고 만다. 당시 아브루치 원정대가 식량마저 소진된 채 필사의 생환작전을 벌이던 과정은 극지방 탐험사의 전설로 남아있다.

 

1909년의 K2 도전 역시 초기 히말라야 등반사의 신화이다. 그는 당시 남동릉 6,700m까지 도달했는데, 이 능선은 현재 ‘아브루치 능’이라고 불린다. 훗날 1954년의 이탈리아 원정대가 K2 세계초등에 성공할 때 채택한 루트가 바로 아브루치 능이다. K2가 자신의 웅장한 자태를 사진을 통하여 세상에 알린 것도 당시 아브루치와 동행한 비토리오 셀라의 카메라를 통해서 였다.

 

드라마의 주인공에게 로맨스가 빠질 수 없다. 아브루치와 미국 부호의 딸 캐서린 앨킨스의 사랑은 당시 ‘세기의 로맨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캐서린의 아버지는 당시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거론될 만큼 유력한 정치인이자 대단한 부호였다. 이탈리아 왕족의 아들과 미국 부호의 딸 사이에는 그러나 너무도 많은 장애물들이 얽혀 있었다.

 

아브루치는 사실 ‘무늬만 왕족’이었지 별다른 재산을 모아놓지도 못한 상태였고, 무엇보다도 탐험과 등반에 미쳐 있는 가난한 산사나이였을 뿐이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브루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캐서린과 편지 왕래를 계속했다. 전형적인 로맨티스트의 사랑법이다.

혹자는 아브루치가 ‘단지 왕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폄하한다.

 

그가 국가적 차원의 대규모 원정대를 꾸릴 수 있었던 데에는 물론 왕족이라는 출신 성분과 그에 따른 재정적 뒷받침들이 큰 역할을 해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왕족들이 다 아브루치처럼 탐험과 등반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산은 자신의 혈통보다 소중했다. 그는 왕가의 일원으로서 세상을 살아간 것이 아니라 탐험가와 등반가로서 세상을 살다간 것이다.

 


 

"생산과 분배, 소유를 함께" 소말리아에 '아브루치 빌리지' 농촌공동체 세워

 

아브루치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 함대 사령관으로서 맹활약을 펼쳐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왕가에서는 이 ‘제멋대로인 왕족’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반가워 하지 않았다. 결국 아브루치는 해군 제독직을 사퇴하고 아프리카로 향한다. 그는 일찍이 아프리카 자이레의 루웬조리산(4,829m)의 세계초등 기록을 가지고 있었고, 1906년에는 루웬조리 산군의 4,000m 이상의 산 14개를 모두 오른 적도 있다.

 

원시의 대륙 아프리카는 아브루치의 이상향이었다. 그는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에서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을 꿈꾸었다. 생산과 분배 그리고 소유를 함께 하는 일종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가슴에 품고 새로운 농촌공동체를 세우려 한 것이다. 1926년 3,000명의 소말리아인과 200명의 이탈리아인들이 16개의 작은 마을로 구성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운다. 바로 저 유명한 ‘듀크 아브루치 빌리지’이다.

 

그는 193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농촌공동체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그가 꾸었던 꿈이 현실 속에서 실현되려면 몇 세대의 세월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직도 진행 중인 꿈이다. 1976년, 소말리아 내전이 발발하자 아브루치 조카의 아들이 그의 묘지를 이탈리아로 이장하려 했다.

당시 그것을 만류한 소말리아 원주민 대표의 읍소가 가슴을 친다.

 

“우리의 조상들이 그의 곁에 묻혔고, 우리 역시 죽고 나면 그의 곁에 묻힐 겁니다. 그는 언제나 우리를 보호해왔고 앞으로도 그러실 겁니다. 이곳은 우리의 성지입니다. 다른 곳으로 모셔가실 수 없습니다.” 현재 아브루치의 묘지는 여전히 소말리아에 남아있다.

[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