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생성과 소멸의 파노라마, '지오바노 세간티니' *-

paxlee 2008. 6. 5. 21:45

 

               생성과 소멸의 파노라마 '지오바노 세간티니'(1858~1899)

자화상, 34 X 24, 1893

          - 필생의 3부작 '생명'-

         - 필생의 3부작 '자연'-

         - 필생의 3부작 '죽음'-

내가 운영하는 ‘심산스쿨’에는 강사실 겸 응접실로 사용하는 자그마한 공간이 있다. 이곳에 있는 커다란 1인용 소파 앞에는 유리 탁자가 하나 놓여 있는데, 그 유리 밑에는 두 권의 두툼한 도록들이 비치돼 있다. 홀로 이곳에 앉게 되는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뒤적거려 볼 수 있도록 준비해둔 것이다.

 

영화 계통의 친구들은 으레 ‘헬무트 뉴튼 작품집’을 집어 든다. 광고사진을 방불케 하는 그의 누드작품들이 훌륭한 눈요깃거리가 되어주는 까닭이다. 반면 산 계통의 친구들은 예외 없이 ‘지오바노 세간티니 작품집’을 뒤적인다. 하지만 잠시뿐이다. 그들이 좋아하는 알프스가 단지 배경으로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따금씩 미술을 전공하는 친구들이 찾아와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처음 접하는 화가의 작품세계에 호기심을 느껴 잠시 힐끗거리다가는 이내 헬무트 뉴튼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이탈리아 북부 아르코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스위스 알프스의 엥가딘에서 삶을 마친 지오바노 세간티니는 그렇게 모호한 경계 위에 서 있는 화가다.

 

일본과 유럽 등지에서는 일찍이 ‘알프스의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산악인과 미술인들 모두에게 여전히 낯선 존재이다. 산악인들이 보기엔 ‘산 밑 마을 사람들을 그린 화가’에 불과하고, 미술인들이 보기엔 ‘당대의 주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의 화가’일 따름인 것이다.

 

나는 아주 우연한 계기로 세간티니라는 화가를 알게 됐다. 오랜 프랑스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대학 동기생이 “너 알프스 좋아하지?”하며 툭 던진 세 장의 그림엽서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세간티니 3부작’이었다. 웅장한 산자락 밑에서 태어나고, 살고, 죽는 인간의 일생을 단 세 컷으로 표현해낸 것이었는데, 무어라 한 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숙명적인 슬픔을 담담하게 증언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 엽서들을 책상 앞에 붙여놓고 습관처럼 들여다본 까닭이었을까? 어느 사이엔가 서서히 그의 작품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고 그 결과 지금은 이태리어판, 독일어판, 영어판, 일어판 등 그의 도록들 대부분을 보유한 열혈 팬이 돼버렸다. 세간티니는 무척 불우했던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굶기를 밥 먹듯 했으며,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다. 그의 아버지가 ‘아메리칸 드림’에 홀려 미국으로 돈을 벌러 떠나면서 세간티니를 밀라노의 한 친척집에 맡겼는데, 그곳에 얹혀 살기가 너무 괴로워 결국 가출한 이후 소년원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삶이었다.

 

10대 후반의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지만 남의 집 돼지우리를 돌보며 벌어오는 수입으로는 가족의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군대에 끌려가게 되자 그는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탈영을 감행했고 이후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된다.

 

이렇듯 세상 끝으로 쫓겨난 그가 가족들을 데리고 정착한 곳이 바로 스위스 알프스의 산간 오지마을이었다. 세간티니에게 고되지만 안정된 삶을 제공한 곳은 다름 아닌 알프스였다. 그에게 있어서의 산이란 생존 경쟁과 범죄와 전쟁의 참화 등 세상의 그 모든 피곤한 삶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를 의미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남은 생을 이곳에 머물면서 쉴 새 없이 그림을 그렸다. 가난한 목동과 땔감을 해오는 여인과 이름 모를 야생초들이 그의 화폭을 채웠다. 햇살 따스한 여름의 노곤함과 모든 생명체들을 얼려버린 겨울의 적막감이 그의 그림의 주제였다. 그리고 이 모든 형상들의 뒤편에는 신록의 알프스와 만년설의 알프스가 언제나 고정된 배경처럼 펼쳐져 있었다.

 

세간티니가 등반을 즐겼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몇 장 남아있지 않은 기록사진들을 살펴보면 독수리 사냥을 위해 자일을 메고 바위 앞에서 포즈를 잡은 모습이 유일한 등반 관련 사진일 뿐이다. 그의 지속적인 관심은 인간과 대자연, 그리고 신의 섭리에 집중돼 있었다.

 

그는 자신만의 주제를 자신만의 화풍으로 끝까지 밀어붙인 고독한 화가였다. 언젠가 세간티니의 작품집을 유럽미술사에 정통한 미학자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더니 이렇게 답했다. “세간티니는 당대의 어느 유파와도 거리를 두고 있어. 세간티니는 세간티니일 뿐이야.” 세간티니는 그 죽음마저 ‘알프스의 화가’다웠다.

 

해발 3,000m에 가까운 고원지대에서 그림에 몰두하고 있던 어느 날, 목이 말라서 눈을 녹여 마셨는데, 그만 그것이 맹장염으로 번져 두 달 후 정상 부근의 목동용 오두막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세간티니는 산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통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는 듯하다. “등산보다는 삶이 중요하다. 산보다는 인간이 먼저다. 하지만 인간도 삶도 대자연 앞에서는 한낱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세간티니 미술관에 있는 필생의 3부작 '생명-자연-죽음'
만년설 배경으로… 생성과 소멸의 파노라마

 

세간티니는 생전보다 사후에 더 높은 평가를 받은 화가다. 독창적인 작품 세계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면서 그의 집안 역시 융성하게 되었는데, 훗날 그의 손자는 국제산악연맹(UIAA)의 부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세간티니의 작품들은 유럽의 유수한 미술관에 널리 퍼져 있는데,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생명-자연-죽음’ 3부작은 현재 생 모리츠에 있는 ‘세간티니 미술관’에 진열돼 있다.

 

이 3부작은 그가 사망하기 직전의 4년 동안 집중적으로 제작됐는데, 파노라마 형식의 거대한 화폭에 담겨 있다. 가장 규모가 큰 ‘자연’은 가로가 403cm, 세로가 235cm에 달한다. 첫 번째 작품인 ‘생명’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를 그렸다. 일찍이 부모와 헤어진 세간티니는 많은 작품들 속에서 모성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배경으로 펼쳐져 있는 것은 알프스의 아름다운 초원 풍경이다.

 

두 번째 작품인 ‘자연’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느낌을 준다. 하루의 일과를 끝낸 후 소떼들을 몰고 돌아가는 가족들의 모습이 몹시도 고단해 보인다. 배경으로 펼쳐진 알프스의 연봉들이 장쾌하다. 마지막 작품인 ‘죽음’은 온통 눈으로 뒤덮혀 있다. 아마도 시신을 운구하기 위한 것인 듯 달구지 하나가 놓여 있는데 조문객들의 모습이 담담한 슬픔을 표현한다. 배경으로 펼쳐진 알프스의 만년설들이 냉랭하게 느껴진다.

 

[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