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홀링 테크닉' 창시자 '월터 보나티' *-

paxlee 2008. 6. 7. 21:24

 

                              '홀링 테크닉' 창시자 '월터 보나티'

52년만에 밝혀진 '울분의 K2'… 누구도 믿을 수 없다
1954년 伊 '세계 2위봉 초등' 열광 "공격조는 어린 나를 사지에 남겼다"
보나티 폭로후 왕따… 나홀로 산행, 최근 동료 고백으로 진실 밝혀져


이탈리아 산악계 후배들이 보나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보나티 산장.

월터 보나티가 세 번의 도전 끝에 초등한 그랑 카푸생. 극한의 상황을 극복하며 산에 올랐을 당시 보나티는 스물 한 살의 젊은이였다.

보나티가 알프스 마터호른을 혼자 오르다 바위에 매달려 휴식을 취하고 있다.

1954년은 이탈리아 산악계 최고의 해였다. 그토록 오랫동안 염원해왔던 세계 제2위봉 K2(8,611m)의 초등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으로 낙인찍히고 패전국으로서 온갖 치욕을 감내해야만 했던 이탈리아의 국민들에게 이 쾌거의 소식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선사했다.

 

그렇지 않아도 다혈질로 유명한 이탈리아인들이 거의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의 청년산악인만은 깊은 상처를 받았고 울분을 가눌 수 없었다. 현재 세계등반사의 거인으로 기록되고 있는 월터 보나티(76)이다.

 

1930년 이탈리아의 베르가모에서 태어난 보나티는 19세에 암벽등반을 시작한 이후 놀라운 급성장을 거듭해 일찍이 주목받았던 차세대 유망주였다. 그의 이름을 알프스 전역에 떨친 것은 흡사 수도사들의 고깔모자처럼 생겼다 하여 ‘그랑 카푸생’(3,838m)이라 불리우던 해괴한 바위봉우리의 초등. 보나티가 세 번에 걸친 극한도전 끝에 끝내 이 봉우리의 정상에 오른 것이 21세 때의 일이다.

 

그는 2년 후 회계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포기하고 가이드 자격증을 획득하여 자신의 전생애를 산에다 건다. 그리고는 바로 이듬해 24세의 최연소대원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 바로 1954년 이탈리아 K2원정대였다. 1954년 당시 이탈리아 정부가 발표한 공식성명서에는 초등자들의 이름이 없다. 다만 “용감한 이탈리아 산악인들이 세계 최초로 K2등정에 성공했다”는 식의 애매한 수사가 있었을 뿐이다.

 

혹자들은 팀워크를 높이 평가한 올바른 자세라고 칭송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어설픈 미봉책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원정대 내부에서 서로를 비난하는 추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논쟁의 핵심은 최후의 지원조였던 보나티가 임무를 게을리하여 자칫하면 공격조원들이 커다란 위험에 빠질 뻔 했다는 것이다. 보나티의 항변은 정반대였다.

 

자신은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으며 오히려 공격조들의 이기주의 때문에 거의 죽다 살아났다는 것이다. 당시 보나티에게 주어졌던 최후의 임무는 캠프8에 있던 산소통을 캠프9의 공격조들에게 전달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약속된 장소에 도착해보니 캠프9는 이미 더 높은 지대로 옮겨진 이후였다. 공격조들은 그에게 “산소통을 그곳에 내려놓고 내려가라”고 했다.

 

보나티의 주장에 따르면 “날이 너무 저물었으므로 캠프9에서 하룻밤 자고 내려갈 수 없느냐”고 부탁했지만 공격조들은 냉정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덕분에 그는 포터 마디와 더불어 8,100m의 노출사면에서 ‘죽음의 비박’을 감행해야만 했다. 이는 아직까지도 세계등반사상 가장 처참한 비박들 중의 하나로 기록된다. 보나티는 다행히 무사했지만 포터 마디는 열 손가락을 모두 잘라내야 하는 끔찍한 동상에 걸리고 말았다.

 

이튿날 공격조 두 사람은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의 거절로 인해 죽음의 비박을 감행해야만 했던 청년 보나티가 입을 꾹 다물고 박수만을 쳐댔을 리가 없다. 그는 공개적으로 공격조를 비난했다. 하지만 이미 ‘국민적 영웅’이 된 원정대원들은 오히려 보나티를 극렬히 비난했다. “보나티가 산소통을 제대로 전달해주지 않아 무산소 등정을 할 수 밖에 없었고 하마터면 초등의 영광을 놓칠 뻔 했다.

 

그와 포터를 캠프9에서 잘 수 없도록 내쫓았다는 것은 사실무근이다.” 보나티는 이후 이탈리아 산악계에서 ‘기피인물’이 되었다.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다니는 바라진 아이 정도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보나티는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출간한 그의 자서전 ‘내 인생의 산들’(2001)에서 당시 이탈리아 전국이 K2 초등의 기쁨으로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들 때 자신만은 “피눈물을 흘렸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그는 이를 악물고 결심한다. 다시는 국가적 차원의 대규모 원정대에 징발되어 노예처럼 당하지는 않겠노라고  했다. 이후 보나티는 이탈리아가 아니라 전세계를 대표하는 산악인으로 우뚝 서게 되었는데, 그의 가장 위대한 등반으로 꼽히는 55년의 프티 드뤼 남서필라 등반과 65년의 마터호른 동계단독 직등은 모두 혈혈단신의 몸으로 혼자서 해치운 것들이다.

 

현재 전세계의 산악인들 중에서도 54년의 K2 초등자들과 당시 원정대장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월터 보나티라는 이름은 등반의 세계에 무지한 일반인들에게조차 귀에 익은 이름이 되었다. 최근 월터 보나티에게 반가운 소식이 하나 날아들었다. 당시의 초등자인 리노 라체델리가 만년의 자서전 ‘정복의 댓가: K2 초등의 참회록’(2006)을 출간하였는데, 이 책 속에 당시의 진실이 낱낱이 밝혀져 있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당시 청년 보나티의 주장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당시 초등자와 원정대장 및 이탈리아 정부의 주장은 거짓이었다. 또 다른 초등자였던 아킬레 콤파뇨니와 자신은 산소통을 분명히 제대로 전달받았으며, 무서운 청년 신예 보나티에게 초등의 영광을 뺏길까 봐 그를 캠프9에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결과 보나티와 마티를 ‘죽음의 비박’이라는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결정은 추악했으되, 52년이 지난 지금에라도 진실을 밝혀준 라체델리의 용기는 아름답다. 보나티도 이제 얼어붙었던 마음을 풀고 당시의 선배들을 용서했으면 좋겠다.

 

 

 

● '홀링 테크닉' 창시자 보나티
세계가 놀란 한겨울 단독등반… 35세 은퇴

 

월터 보나티의 최대 업적들 중의 하나인 55년의 프티 드뤼 남서필라 단독등반은 당시까지의 모든 등반형태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는 5일 동안 홀로 이 벽에 오르면서 장비와 식량을 넣은 커다란 짐(홀링색)을 끌어올리는 전혀 새로운 기법을 창시하였다. 홀로 확보를 하며 등반과 하강을 끝없이 반복하는 이런 기법은 약 10년 후 미국의 요세미티 거벽 등반자들에게 전수되어 ‘홀링 테크닉’이라 명명되었고, 현재에는 전세계적으로 널리 통용된다.

 

당시 보나티가 오른 남서 필라는 현재 ‘보나티 필라’라고 명명되어 있다. 65년은 에드워드 윔퍼에 의해 마터호른이 초등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전세계 산악계가 기념해야만 될 해인데, 보나티는 그 기념행사를 저 혼자 기획하고 실행에 옮겨버렸다. 세계 등반사에 굵은 활자로 아로새겨진 이 등반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만한 사건이다. 한겨울에, 거의 수직에 가까운 등반루트를 새롭게 개척하며, 아무도 동반하지 않고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오른 것이다.

 

이 ‘마터호른 등정 100주년 기념 동계단독직등’(세계 초등)을 끝으로 월터 보나티는 극한등반에서 은퇴한다. 만 35세에 은퇴를 감행하다니 그의 성격답게 ‘쌈빡하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보나티는 드물게 행복한 여생을 보내는 산악인이다. 그는 극한등반의 세계와 결별한 이후 전세계를 방랑했다. 여행과 강연 및 집필은 그의 중요한 생계 수단이다.

 

이탈리아 산악계의 후배들이 그를 기려 설립한 ‘보나티 산장’은 이탈리아 알프스 2.150m에 위치해 있는데, 몽블랑 환상(環狀)산행인 ‘투르 드 몽블랑’을 할 때 반드시 들르게 되는 멋진 산장이다. 팔순을 바라보는 그는 현재 아내 로사나 포베스타(왕년의 유명 여배우)와 함께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살고 있다.

[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