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의 고장 상주

-* 상주시 화서면(尙州市 化西面)의 지명유래(地名由來) *-

paxlee 2008. 11. 15. 23:26

상주시 화서면(尙州市 化西面)의 지명유래(地名由來)

 

화서면은 동으로 내서면과 외서면, 북서쪽으로 화북면, 화남면, 남으로 화동면에 접해있고, 상주시와의 거리는 26km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행정명은 화서면(化西面)이고, 화령(化寧)이라고 부른다. 화서는 중화지구(中和地區)의 중심으로 신라시대에 답달비(答達匕), 답달건비(答達建匕), 또는 답달비현(答達匕縣)으로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16년에는 화령현(化寧縣) 고쳤다고 하며, 고려시대에는 그대로 따라 썼으며, 조선시대 1413년(태종13년)에 현으로 고쳐서 상주목에 속하였다.  

 

1895년 5월 26일(종32년) 상주군으로 개편되면서 중화의 서쪽에 위치 하였다하여 화서면으로 칭하고 이때에 46개의 마을(산성, 하달, 중달, 상달, 송천, 계곡, 명통, 동점, 금곡, 니동, 솔의, 봉정, 신봉, 당전, 상현, 하현, 중양, 봉전, 무동, 산수, 서원, 금천, 상봉 상촌, 복용, 기동, 봉천, 봉성, 신경, 금성, 달성, 림정, 사곡, 용강, 우산, 황산, 마암, 수부, 율현, 장림, 원통. 전리, 교촌, 봉강, 지산, 외항)이 있었다고 한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화북면의 서산리와 내서면의 율원리 일부를 병합하여 11개리(하송, 상곡, 신봉, 상현, 금산, 상룡, 달천, 사산, 율림, 봉촌, 지산)으로 축소 개편하였으며, 1948년 율림, 봉촌, 지산을 제외한 전 리가 분리되어 19개 행정리로 개편하였다.

 

1986년 1월 1일 상주시와 군이 분리되어 상주군에 속하였으며, 1988년 1월 1일 상주시 도농복합형 시, 군 통합으로 현재 상주시 화서면으로 되어있다. 화서면지역은 소백산맥 중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지대이며, 북으로 봉황산(740m), 서쪽은 천택산(638m), 남으로 원통산(597m)으로 둘러싸였으며 동부의 물은 낙동강으로 중, 남, 서부의 물은 금강으로 흘러들고, 남서부에 한들평야가 있을 뿐 대개 산간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통일신라 시대부터 금산, 율림등 집단거주 부락이 있어 문화의 자취가 보이는 고장이며, 구 한말 때부터 시장이 형성되어 농산물과 각종 상품의 유통으로 문화가 일찍부터 발달되었다. 특히 상주 보은간 25호선 국도가 2차선 포장도로로 동서로 관통하고 남으로 황간 추풍령에 북쪽으로 화북면에 이르는 지방도로 49호가 있으며 2007년 11월 27일 상주~청원간 고속국도 30호 개통으로 인하여 교통의 요지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금산리(錦山里)

 

본래 화령현의 지역이었으나 후에 화서면 지역으로 1914년 산수리, 서원리, 금천리 일부를 합하여 금천과 산수의 이름을 따라 금산리라 해ㅔㅆ으며 1948냔 ㄱ,ㅁ신1리, 2리로 분리되었다. 금천(錦川)은 현재 금산리에서 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에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금천의 유래는 옛날 이 마은 중간을 흐르는 시내가 있었는데, 거기에 높이가 5m 가량이나 되는 아름다운 폭포가 있었다고 하며, 그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의 모양이 비단결같이 곱고 아름다워 아름 이름을 금천(錦川)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갑뱅이, 갑방이는 봉산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천택산 아래 금계천 상류에 있는 명소로 갑방(甲房)이라 함은 옛날 병사들이 갑옷을 감춘 곳이라하여 갑방 또는 갑뱅이로 불린다고 한다.

 

마을 뒷산을 금산(金山)이라 부르는데, 이산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금이 매장되어 있으리라는 추측으로 부근 지역의 지가가 고가로 책정되어 갑뱅이로 동명을 정했다고 하며 진주강씨(晉州姜氏)가 처음 마을을 개척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진주강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둥너머 먹뱅이라는 고을도 선비가 먹을 많이 갈았다하여 먹뱅이로 칭했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은 감나무와 호두나무가 많아 감과호두가 특산물로 생산되고 있다.

 

봉산(鳳山), 서원(書 院)

 

금천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산수동 남쪽인데, 웃마을과 아랫마을이 있다. 마을 뒷산이 봉황이 날아가는 모양이라 하여 고려 때부터 봉산이라 칭하였으며, 옛날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못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처음에는 연이 많이 있어 경치가 아름다워 구경오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조 때 소재 대감의 서원이 설립도고 부터는 서원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한다.

 

산수골(山水골)은 봉산마을 북쪽에 있는 마을로 처음에는 강씨들이 들어와 살다가 떠나고, 지금은 노씨, 이씨, 박씨, 김씨 들이 모여 살고 있다. 옛날부터 산 좋고 물 좋은 곳이라 하여 산수곡(山水谷) 칭하에 되었다. 또 이곳은 흙이 좋아 옛날부터 옹기를 구웠으며 지금도 땅을 깊이 파면 옹기조각이 나온다고 한다.

 

달천리(達川里)

 

본래 화령현 지역이었고 후에 화서면의 지역으로 1914년 봉천리, 봉성리, 신경리, 금성리, 달성리, 임정리를 합하여 달성과 봉천의 이름을 따서 달천리라 했으며, 1948년 달천1리와 2리로 분리되었다. 갈밭골, 신경리, 신경(新耕)은 오랜 옛날부터 이 마을 주변에는 갈대가 많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갈대로 말미암아 마을에 풍년이 들고, 또, 모사는 집이 없는 것이라고 믿어 이 갈대밭을 소중히 여겨 왔다고 하며 이에 연유하여 마을 이름도 갈밭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금성(金城) 이 마을은 서쪽에 달성이 있고 서남쪽에 옥성마을이 있는데, 뒷산에 있는 큼 바위들이 마치 금반처럼 생겨 자연적으로 성을 이루었으며, 마을  앞 들에서 생산되는 쌀 낱이 굵고 백옥같다하여 마을 이름을 금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달천(達川)은 마을의 지형이 금계포란지형(金鷄抱卵之形)이라 하여 1680년대 부터 달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에는 달성서씨(達城徐氏)와 경주최씨(慶州崔氏)많이 살고 있으며 새마을 사업으로 도로를 확장하여 국도와 인접된 교통이 편리한 마을이다.

 

새말, 봉성, 봉성리(鳳城里)는 소백산맥이 분수령을 이루고 있으며, 봉항산이 이 지대에 위치하였고, 그 봉황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울이 마을 앞을 흘러내려 가며 이 마을에 풍년을 가져다 준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봉성이라고 부르다가 광복 후 마을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새말이라 하였다. 봉강, 봉강리(鳳崗里)는  봉촌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로 앞재 마을의 북쪽에 있으며 오랜 옛날 봉이나서 이 마을 산에서 놀았다하여 마을 이름을 봉강이라 부르게 되었는 민담이 전래하고 있으며, 지금은 4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생금마는 봉강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옛날에는 말을 기르던 곳으로오래 전부터 생금마라 불려오고 잇으나, 그 유래는 미상이며 현재는 봉강마을에 포함되어있다. 앞재, 전성, 전성리(前城里)는 봉촌마을 앞에 큰 산이 있는데, 1595년 경 임진왜란 때 성을 쌓고 군량미를 보관하는 양창으로 이용하였다 하나 지금은 창고는 없어지고 성을 쌓았던 흔적만 남아있다.

 

이 성터 앞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앞재 또는 전성이라 불려왔다고 한다. 원팅어,원통(元通)은 원통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서 원통산은 1894년 동학란 당시 충의의 인사들이 모여 관군과 싸우다가 원통하게 몰사한 산이라 하여 원통산이라 불려직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원통이라 한 것이 변음이 되어 원팅이로 불려진 것이라 한다.

 

사산리(沙山里)

 

본래는 화령현 지역 이었으며 후에 상주군 화서면 지역으로 1914년 사곡리, 용강리, 우산리, 황산리, 마암리를 합하여 사곡과 황산의 이름을 따서 사산리라 했으며 소재 노수신 선생이 이곳에서 살앗다. 1948년 사산1리, 2리로 분리 되었다. 누르미(黃山)는 사래실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는 웃 마을을 우산이라 부르고, 아랫마을을 황산이라 불렀는데, 아랫마을이 더 컷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허씨와 노씨들만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여러 성씨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동네 뒷산은 청대산(靑臺山) 연결되어 있으나 산에 나무가 없어 누르미로 구전된 것이라 한다. 사래실, 사곡(沙谷)은 옥연으 북서쪽 마을로 사산에서 가장 크며 마을의 흙이 모래땅 이어서 사곡아라고 칭하게 되었고, 옛날에는 이씨와 허씨가 살았다고 하나 현재는 노씨가 많이 살고 있으며, 신라때부터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 절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절은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아 있으며 또 마을 앞에 있는 탑거리라는 곳은 옛날에 탑이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옥연(玉淵), 영당(影堂)은 사래실 동쪽에 있는 마을로 화서면 사곡입구에 있었던 노씨종가가 불타고 상주목사 민종열이라는 분이 종가 이축을 이곳에 했다.

 

태종(太宗)때의 경공평공(敬平公) 노고(盧高) 영정(影幀)을 모시어 옥연, 영당이라고 칭하게 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말바우, 마암(斗岩)은 옥연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정재수 기념관 북서쪽에 있다. 마을 뒷산이 마치 말의 형상을 하였다 하여 말바우 혹은 두암이라고 칭하게 되었으며, 이에 연유하여 마을 이름을 말바우, 두암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상곡리 (上谷里)

 

원래는 화령현 지역이었으며, 후에 상주곤 화서면 지역으로 1914년 계곡리, 명통리, 동점리, 금곡리, 상달리와 내서면 율현리일부를 합하여 상달과 금곡의 이름을 따서 상곡리라 했으며, 1948년 상곡1리,2리로 분리 되었다. 쇳골(金谷)은 현재의 상곡리 동편 골짜기 마을인데, 옛날부터 금이 난다는 금부산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쇳골(金谷)이라 한다.

 

조선시대의 봉수대 유적이 있고 또 마을 입구에는 옛날 사기 그릇을 굽던 가마터가 있는데, 엤날부터 이 곳에서는 상주향교(尙州鄕校) 제형기(祭亨器)를 구웠다고 한다. 신협(新峽)은 쇳골 남쪽 약 1k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중말, 골마을이 있었는데, 개울 옆 건너편으로 새로이 큰 마을이 이루어져 합하여 신협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명골(智明谷)은 신협 마을의 남동쪽 마을인데, 엣날 이 마을에 지극한 효자가 있어 지혜가 뛰어나고 성실하여 마을 사람들을 일깨우고 또 인근에 그 이름을 크게 알려직 되어 그 때부터 마을 이름을 지혜 밝은 효자가 사는 마을이라 하여 지명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짓질, 계곡(鷄谷)은 옛날 이 마을에는 닭이 많아 이 마을의 새벽 닭 을음에 부근 마을 사람들이 잠을 깼다고 하여 계곡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 하송, 하북 사람들이 화령장을 갈 때 고개를 넘어야 가까운 지름길로 갈 수 있어 재를 넘는  길이라 하여 잿길리라 하였는데, 이것이 변음되어 차츰 짓질로 굳어졌다고 한다. 퉁점, 동점(銅店)은 조선시대의 이 곳에서 통쇠 즉 구리를 생산하였다 하여 마을 이름을 퉁쇠를 파는 마을이란 뜻으로 퉁점이라 한 것이 한자로 표기될 때 동점이 되어 한자음대로 동점이라 불리게 되었다.

 

상용리(上龍里)

 

본래 화령현 지역 이었은데, 후에 상주군 화서면 지역이 되었고, 1914년 상봉리, 상촌, 복용리, 기동, 금천리 일부를 합하여 상봉과 복룡의 이름을 따서 살룡리라 했으며 1948년 상용1리, 2리로 분리 되었다. 터골, 기동(基洞)은 골짜기가 좁고 산으로 둘러쌓인 마을로서 임진왜란 때 피난지로 알려져 피란지의 골짜기였다는 뜻에서 터골(基洞)이라 하였다고 구전되고 있다.

 

또한 옛날 이웃마을 사람들이 풍류를 즐기며 놀던 곳이라하여 기동이라 칭했다다 한다. 놋점이, 상봉(上鳳)은 상촌 동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에 이 마을은 그릇을 만들던 곳이로 유명햇는데, 놋그릇을 만드는 마을이라 하여 놋점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상두골, 복룡(伏龍)은 상촌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상두골 이라고 브르게 되었다고도 하며, 또 한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골짜기가 용이 엎드린 모습과 비슷하다고 하여 복룡(伏龍)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상두골은 옛날 사찰의 상도가 살던 곳이라하여 불리어 졌다고도 한다. 또 한 살구나무와 복숭나무가 많아서 행도곡(杏桃谷)이라 불렀으나 변음되어 상두골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 앞에는 조그마한 언덕 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데 청룡이라 부른다. 장례때 상여가 이 앞 산을 넘지 못하고 돌아서 간다고 한다. 화서면 북쪽의 끝 지역으로 화북면과 화남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현재는 33가구가 살고 있다.

 

불당골, 조선 중기에 상봉마을 북쪽 골짜기에 절이 세워져 불당(불당)있는 마을이라 하여 불당골이라고 불리고 있었으나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고 있으며, 불당이 있었던 자취도 찾아 볼 수 없으나, 옛날 갈밭골에 부유한 정씨가 살았는데, 딸 만 둘이고 아들이 없어서 걱정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날 꿈에 부인이 골짜기의 소(沼)에있는 용을 보다가 붙잡혀 가는 꿈을 꾸었다, 부인 또 한 같은 꿈을 꾼 것이 신기하여 꿈에 본 소(沼)에 불당을 마련하고 치성을 드린 결과 아들을 얻었다는 전설이 전하기도 한다.

 

상현리(上懸里)

 

본래 화령현 지역이었고, 후에 상주군 화서면 지역이 되었다. 화령현의 위쪽이 되므로 상현이라 했다. 1914년 하현리, 중양리, 봉전리, 무동을 합하여 상현리가 되었고, 1948년 상현1리와 2리로 분리 되었다. 무동(舞洞, 武洞)은 당두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뒤으 봉황산(鳳凰山)에서 봉황새가 대밭골의 죽실(竹實)을 배부르게 먹고 춤을 추었다는 데서 무동(舞洞)이라 하였다.  

 

또 일설에는 옛날에 무인이 살았다고 무동(武洞)이라고도 하며 무동마을은 나주정씨(羅州丁氏)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당시 식재하였다고 전하는 느티나무가 현재 면목(面木)으로 지정관하고 있다. 마을 뒤편 봉황산 기슭에 백운사(白雲寺)와 해룡암(海龍庵)이 잇고 마을 앞에는 무동지(武洞池)가 있다.

 

당두(堂頭)는 창안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곳에 좋은 집터가 많아 당대도 있었고 집을 지어 잘 사는 마을이라 하여 당두(堂頭)라 하였다. 대밭골, 죽전(竹田)은 창안 마을 북쪽에 있는 마을로 봉황산의 봉황이 이곳에서 죽실을 따 먹는 형상이라 하여 불리는 이름이라 한다. 또 한 옛 현청사(懸廳舍)가 있던 곳이라고 하며 대장군이 살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화령현 당시는 대막(對莫)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상현리의 별명으로 마을 뒤으 산기슭이 온통 대나무밭으로 마릉에 대나무가 많다 하여 대밭골 혹은 죽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창안, 창내(倉內)는 상현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중앙에 위치하며 1910년 까지도 이곳에 창 터가 있었다고 하여 창내로 불릭 되었다고 하는데, 화령현 당신 관곡을 저장하던 창고라한다. 뒤에는 탑이 있었던 곳에 큰 소나무가 서 있어 탑송(塔松), 또는 반송(盤松)이라 불려지는데, 천연기념물 제293호로 보호를 받고 있다.

 

특산물로는 고추와 마늘이 유명하며 근래에 와서는 잎 담배도 많이 생산되고 있다. 상현(상현), 상현이라고 하는 마을 이름은 이 곳이 옛날 신라 탑비군(塔匕郡) 때에도 관아가 있었던 곳이고, 고려 때에는 화령현청이 있었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여진다. 주양(周陽), 중양(中陽)은 당두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주양, 중양이라 불리어지게 된 것이라 하며, 화령초등학교가 바로 마을 앞에 위치하고 있고 미륵불상이 있다.

 

이 미륵불상은 현 신봉2리에서 상현1리로 들어가는 입구 산 비탈에 옛날부터 서 있었는데, 이 곳 옛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원래는 상현 현청 소재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웠으므로 하마비(下馬碑)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현아(縣衙)가 있었던 곳이라 하기도 한다. 하현(下縣)은 상현리의 남단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서 현청 소재지 아랫동네에 해단된다 하여 하현이라 하였고, 옛날부터 특산물인 감이 맛이 좋기로 이름이 나 있다.

 

신봉리(新鳳里)

1914년 니동, 솔의리, 봉정리, 신봉리, 당전리를 합하여 신봉리라 했으며, 봉황산이 드높아 신봉이라 했다고 하며, 화서면의 중심지이며, 1948년 신봉1리와 2리로 분리 되었다가 1988년 1월 1일 1리, 2리, 3리로 다시 분리되었다. 뒷마는 1914년 경에 화령장터 뒤편에 새로 생긴 마을이며, 장터 뒤편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뒷마로 통칭하게 되었다. 이 마을 사람들 중에서는 서울 상주 등지로 소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여 지금도 부촌을 이루고 있다.

봉정, 봉정리(鳳亭里), 옛 화령장 북쪽에 있는 마을로 화령현 때부터 성내에 봉정이라는 문루가 있었다고 하며, 그 때 마을에는 주색가가 많아서 상주, 보은간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하여 봉정이라 불렀다 한다. 면사무소, 경찰지구대, 초등학교, 우체국, 농협이 모두 이곳에 있다. 신시장(新市場), 옛 화령장 남쪽에 새로운 마을이 생겨 본래의 화령장터 보다 규모도 컸으며, 시장이 성시를 이루게 되자 그 뒤부터 신시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수청거리, 화령장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화령현 당시에 많은 관기가가 있었고 여기에서 나오는 많은 가구들이 각 지방으로 팔려나가기도 했다 한다. 기가(妓家)가 있는 곳이라 하여 수청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재왕골, 솔의(率儀), 엣 화령현 때 대장군이 이 마을에서 작전을 함에 있어 군사를 솔선수범 하였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솔의라 부르고 있다고도 하고, 또, 진주정씨 재실이 있어서 재궁마, 재궁동으로 불리다가 변음되어 재앙골, 재왕골 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또 마을 앞에 노송이 많이 있어서 솔리라 하던 것이 변음이 되어 솔의라 한다고도 한다. 1978년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마을의 옛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게 변하였고 예부터 곡부공씨(曲阜孔氏)의 집성촌이었다. 진다리(泥洞), 화령현 때 가설된 긴 다리가 있었다 하여 진다리라 불린다고도 하고, 또 땅이 온통 진흙으로 되어 있어 비만 오면 너무 질기 때문에 진다리라고 불린다고도 한다.  

 

율림리(栗林里)

 

본래 화령현의 지역 이었고, 후에 상주군 화서면의 지역인데, 1914년 부수리, 율현리, 장림리, 옛 화북면 서산리를 합쳐 율현과 장림으 이름을 따서 율림리라 했다. 밤고개, 밤현, 율현(縣), 조선시대 성종조에 이한춘이라는 선비가 임란 후 1600년경에 낙향하여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그 당시 마을 주위에 밤나무가 무성하여 마을 이름을 율현(栗縣) 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근원이라고 한다.

 

맨발, 수부(守富), 밤고개 서쪽에 있는 마을로 앞에 숲이 있었다고 하며, 처음에는 마을 이름을 맨발이라 불러왔는데,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에 어떤 스님이 마을 이름을 수부라고 하면 부(富)하게 된다고 하여 맨발이라고 불러오던 것을 수부(守富)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정림(長林), 밤고개 북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조에는 이 마을에 역촌이 있었으며, 말 15두에 역원 7명이 종사 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선산군수로 있던 윤태선이라는 이가 보은회인 싸움에서 전사하자 그의 아들인 경파(景坡)라는 이가 이 곳에 정착하였다 하며 소나무가 마을 앞 뒤에 길게 숲을 이루어 마을 이름을 장림(長林)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산리(池山里)

 

원래 화령현 지역이었고, 후에 상주군 화서면의 지역이다. 못 안쪽이 되기 때문에 못안, 모산 또는 제내(堤內), 지산이라고 했다. 1914년 외항리를 합쳐서 지산리라 했다. 모산, 못안, 지산의, 제내(堤內), 300여년 전 옛날에는 이 지산마을 일대가 큰 못이었다고 하는 데. 못이 없어지고 사람들이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니 토질이 비옥하여 큰 부자가 나서 마을 이름을 지네(池內) 혹은 못안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차츰 변음되어 모산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한다.

 

원통암의 옛터가 있다. 서당골, 서중리, 지산 서쪽에 있는데, 옛날 서당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서당골 혹은 서중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이 서당골 위쪽에 있는 마을을 서상리라 하고, 또 서당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 을 서하리라 불렀다. 한갓골, 외항(外項), 1890년경에 사람들이 모여 들어 못안 바깥쪽에 마을이 형성 되었는데 못안의 바깥목에 해당하는 마을이라 하여 외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한가골로 부르는데, 옛날 한씨가 많이 살고 있었다 하여 한가(韓家)골 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의 위치는 모산 마을로부터 남쪽으로 700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특산물로 누에고치가 많이 생산 되었다. 청룡(靑龍), 서당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1800년경부터 이 마을에 어씨(魚氏)들이많이 살았다. 옛날 이 마을의 자리가 못이었을 때, 그 못에 청룡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어 마을 이름을 청룡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 지형이 좌청룡의 위치에 마을이 있어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셋터(新基), 옛날 못의 터진 쪽으로 차츰 길이 생기면서부터 사람들의 내왕이 많아졌고 입구쪽에 마을이 생기니 새로운 마을이 생겼다고 하여 새터(新基)라 불리어지게 되었다. 이 마을은 축산과 곶감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송리(下松里)

 

상주군 화서면의 지역이고 1914냔 산성리, 하달리, 중달리, 송천리 일부를 합하여 하달과 송천의 이름을 따서 하송리라 했으며, 1948년 하송1리, 2리로 분리 되었다. 청계(靑溪), 송내 북쪽에 있는 마을로 청계산 아래이다. 하송리 지역의 가장 상류인 청게산 기슭에 위치하여 골이 깊고 물이 맑다 하여 옛날부터 청계마을이라 불러왔다. 마을 위쪽에 청계사가 있는데, 현재는 소규모의 암자이나 옛날엔 이 일대에 절간이 즐비 하였다고 한다.

 

송천(松川), 하송리의 중심 부락으로 옛날부터 위쪽에 있는 청계산 골짜기의 물이 모여 흐르는 냇가로 내의  서쪽마을을 양지마, 동쪽마을을 음지마라 한다. 송림이 웅창한 곳에 마을을 이루었는대, 마을 사이를 흐르는 냇 물엔 언제나 솔잎이 가득 떠서 마을 이름을 송천이라 하였다 한다. 200여년 전 선각자가 있어 이 일대의 감나무를 많이 심어 산촌 사림을 부유하게 하였다 한다.

 

점마(店마), 하송리 송천 동남쪽으로 약 2k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 시대 말부터 토기 굽는 가마가 괴산서 이주해 온 최창규라는이에 의해 시작되었다. 상주, 보은 등지에서 흙을 가져와 소규모의 공장으로 광복 후까지 계속 운영하였다 하나 지금은 도요터가 없어지고 말았다. 마을 이름도 옹기점이 있는마을이라 하여 점마을이라 한 것이 줄어서 점마로 굳어진 것이라 한다.

 

달래, 달천(達川), 점마마을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하송리 남동쪽 약 500m 아래에 위치한 마을인데, 상류의 청계, 송내, 점마 등지에서 내려오는 여러 갈래의 심곡물이 합류한 뒤 큰 내에 도달하는 아름다운 유역에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달내라고 불렀다.

 

세거리(三巨里), 달래마을의 남동쪽과 금곡마을의 북서쪽으로 하송리 달내 남쪽 약 700여m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며 남동쪽으로는 상주 문경 남서쪽으로는 화령, 보은 북쪽으로는 화북, 청주로 가는 갈림길이 되므로 세거라 하였다. 하며 옛날엔 교통의 요지 였으며. 지금은 외서면 대전과 예의로 통하는 또 하나의 길이 열려 네거리가 되었다. 이곳에는 수령이 500년이 넘었다는 큰 느티나무가 있는데, 옛날에는 이 나무 부근에서 지방 산물의 교역이 상하였다고 전한다.

 

무고동(武古洞), 청계암 북동쪽 안산골에 있는 마을로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고 견훤왕의 무기창 터라고 한다. 중절리, 청계북쪽에 있는 마을로 절이 있었는데, 1950년 한국전쟁으로 없어졌다고 한다. 옥성(玉城), 이 마을 지형이 마치 선비가 옥대를 두른 것 같으며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 중에서 과거에 급제를 한 사람이 많이 나왔고, 풀년도 자주 들어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하여 옥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인경재, 임정리, 임정(林亭), 옥성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 세조때 임씨 문중의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임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고, 또, 옛날 인종각이 있어 그 종이 울렸다는 전설 때문에 인경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봉촌리(鳳村里)

 

본래부터 화령현 지역이었고 후에 상주군 화서면 지역으로 되었다. 1914년 원통리, 전리, 교촌, 봉강리, 장촌리 일부를 합하여 봉강과 교촌의 이름을 따서 봉촌리라 하였다. 교촌,. 교촌리(校村里), 이 마을은 1800년경부터 봉강(鳳崗) 서편에 위치한 마을로서 마을안에 서당이 있다하여 마을 이름을 교촌이라 하였고, 최씨와 이씨들이 많이 모여 살았으며, 현재는 봉강에 포함되어 있다.

 

참고자료 / * 지명총람(상주문화원,상주얼찾기회),

* 지명유래(경북도교육위원회)

/박수관의 상주함창연밥 따는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