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이 클라이머의 삶] 이연희씨 *-

paxlee 2008. 11. 20. 21:16
          

              [이 클라이머의 삶] 이연희씨

 

“나의 산사랑과 산에서 얻은 행복 나누고파”

 

▲ <사진=양승목·양정산악회 회원>

여자의 몸으로 젊은 시절의 山 열정을 중년의 나이까지 끌고 나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가정의 온갖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해야 하는 주부에게는 힘든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연희씨(李燕姬·48)는 마흔 넘어 다시 산을 찾은 이후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열정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무릇 남자 산악인들이 가족 부양의 책임을 위해 젊은 날 산을 떠났듯이 그녀에게도 공백기가 있었다. 86년 26살 나이에 전국암벽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88년 결혼 직후 한국 최초의 여성 해외원정대 대원으로서 북미 최고봉 매킨리 정상을 밟은 그녀는 이후 10여 년간 가족과 또 자신의 또 다른 꿈을 가꾸기 위해 산을 접었다.


86년 전국암벽대회에서 우승 차지


산은 그녀를 속세에 그냥 머물게 놔두지 않고 품 안으로 불러들였다. 열정은 한층 더 뜨거워졌다. 엄마 품을 떠난 10여년 세월이 너무도 아쉬웠다. 산은 그녀가 응석을 부리는 대로 다 받아주고 달래는 것을 다 주었다. 산은 그녀에게 고향이자 엄마였다. 이렇게 그녀 자신이 젊은 날과 중년의 나이에 겪은 산 얘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엄마의 산>이 그 책이다.


“오랫동안 등반을 쉬다가 다시 돌아온 내가 책을 내게 된 것은 나의 산사랑 그리고 산에서 얻은 행복을 나누기 위해서예요. 30년간 써온 일기를 토대로 과거의 등반과 나 자신을 돌아보고 정리했어요. 책제목처럼 아이들에게 엄마의 산을 알려주겠다는 뜻이 아니에요. 산에만 가면 엄마의 품에 폭 안긴 것처럼 포근했어요. 엄마 같은 산이란 의미지요.”


어린시절 산이 현재와 같이 절대적인 존재로 자리 잡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젊은 날 산에 빠져 지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산을 찾은 것도 정말 우연한 기회에서 비롯되었다. 80년 5월, 당시 시골 분위기가 남아 있던 송파구 거여동의 꽃집 맏딸이던 그녀는 조용히 앉아 책 읽기를 좋아하는 문학소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도봉산행의 기회가 왔다. 여자친구를 기웃대던 핸섬보이는 느닷없이 도봉산 산행을 원했다.


“그 핸섬보이는 도봉산을 무대로 암벽등반을 하는 월계수산악회 회원이었는데, 기회가 되면 산에 다녀야겠다는 생각에 사두었던 클레터슈즈를 신고 갔어요. 그랬더니 월계수산악회 회원들이 ‘쟤는 클레터도 신었네’ 하면서 느닷없이 바위를 하자고 하는 거예요. 친구는 죽어도 못하겠다고 했지만 저는 해보겠다고 했죠.”


어딘지도 모르고 따라간 곳이 선인봉 허리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바위에 첫발을 디딜 때 찾는 코스 중 하나지만, 수직의 벽에서 로프를 붙잡고 반동을 주어 한참 떨어진 지점까지 뛰어가야 하는 펜듈럼을 하고, 레이백 크랙을 오를 때면 고도감 때문에 초보자들에게는 아찔한 기억을 남기는 루트다.


“그래도 앞서 절절매며 올라간 대학산악부 새내기보다 잘 해야겠다 다짐했어요. 펜듈럼은 그런 대로 했는데 레이백 크랙을 오르는데 매듭이 잘못 되었다 하여 원위치했다가 테라스에 올라서니까 다리가 통나무처럼 빳빳해져 있더군요. 태어나서 내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어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모르고 지냈던 제3의 세상이 있구나 싶었으니까요. 그 다음주 모임에 나가니까, ‘와, 정말 왔다’ 하면서 선배들이 합창을 하는 거예요. 허리길 등반에 질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모습을 보이니까 모두들 놀라우면서도 반가웠던 거죠.”


이연희씨의 산은 이렇게 얼떨결에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몸을 아끼지 않고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열심히 다녔다. 대중목욕탕에 들어서는 게 부끄러울 정도였다.
“고등학교 졸업 이듬해부터 어린이집 교사를 했어요. 그러다 산에 다니면서 고압가스 냉동기술을 배웠어요. 시간이 많이 나는 특수업종이란 이유 때문이었죠. 쉬는 시간이 많아 산에 더 자주 갈 수 있겠다 싶었던 거죠. 이론 시험은 패스했는데, 아쉽게도 실기에서는 떨어졌어요(웃음).”


▲ 선인봉 허리길 선등.

 

이상했다. 남자들은 같은 크럭스를 만나도 순탄하게 오르곤 했다. 어느 날 이유를 깨달았다. 남자 회원들은 홀드를 잡아당기는 순간 근육이 불룩 튀어나왔다. 힘이었다. 그 날 하산길에 악력기와 15kg 무게의 바벨도 샀다. 그리곤 아침에 눈을 뜨면 남한산성을 뛰어 오르내리고, 세 손가락으로 팔굽혀펴기, 2단 줄넘기 등으로 이어지는 트레이닝으로 체력을 다졌다. 출퇴근 버스 안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한 손은 한두 마디로 손잡이를 잡고 버티면서 다른 한 손으론 악력기를 쥐었다 폈다 했다.


“어렸을 적에 묘목을 넘어다닌 적이 있어요. 매일 매일 그렇게 하다 보면 나무가 아무리 크게 자라더라도 넘을 수 있으리라는 어린 마음에서였죠. 아무튼 그렇게 힘을 키우는 데 주력하다보니까 멍도 덜 들고 산에 가면 날아다니듯 몸이 가벼워졌어요.”


월계수산악회 선배들은 보수적이었다. 때문에 신형 장비를 마음놓고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다 먹고사는 일에 바빠 선배들이 산에 제대로 못 나오고, 동기들은 군복무로 산을 못 다니게 되자 빤빤이 암벽화며 초크 같은 장비를 사용할 수 있었고, 기량은 순식간에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러나 클라이밍을 하는 회원들이 한 명씩 줄어들면서 파트너를 구하기도 쉽지 않아졌고, 외로움마저 느껴졌다.


▲ (좌)월계수산악회 운길산 산제를 마치고 선후배 회원들과 말타기 시합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맨 우측).(우)매킨리 등반중 빙하크림을 바르고. 88년 여름.

 

인공장비를 사용하지 않는 자유등반 붐이 일던 당시 도봉산 선인봉에서 암벽등반을 하는 산악회들의 대표급들로 구성된 산당회 회원들이 그나마 어울릴 수 있는 클라이머들이었으나, 이들은 여자에게는 회원 자격을 줄 수 없다며 준회원 취급을 했다. 그래도 좋았다. 하루에 기본 세 코스였다. 등반을 마치고 하산할 즈음이면 몸은 파김치가 되었다. 그렇지만 수준 높은 클라이머들과 어울리다보니 스피디해지고, 기량도 한층 나아졌다.


그렇게 등반기량이 일취월장한 이연희씨는 86년 북한산 인수봉 하늘길과 코끼리크랙에서 열린 전국암벽대회에서 여자부 우승을 차지, 산악계의 이목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거의 선인만 다녔어요. 그러다 대회를 치르고 나니까 도봉에서 센 여자가 왔다는 소문이 인수파 사이에서 퍼졌어요. 물론 그러다 말았지만요.”


86년 여성산악인들은 조용히 모임을 가졌다. 남자들의 등에 가려 지내지 말고 여자들끼리 등반도 하고, 히말라야 원정도 나가자는 게 목적이었다. 첫 번째로 성사된 해외원정이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 원정이었다. 그 등반에서 이연희씨는 선배인 김은숙, 후배인 지현옥씨(99년 사망)와 함께 한국 여성 최초의 매킨리 등정에 성공한다.


“매킨리 원정 가기 전해 가을에 산악회 동기와 결혼했어요. 그래서 매킨리 원정을 계획해놓고도 다른 대원들은 합숙훈련을 하는데 저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제대로 훈련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훈련량이 부족해 등반 도중 엄청 고생했어요. 60kg이나 나가는 배낭과 썰매를 올리자니 좀 힘들었겠어요, 코피를 쏟고, 고소증에 헤매고…. 그때 쓴 등반기를 보면 하루하루 ‘오늘도 죽을 지경이었다’로 시작되었으니까요. 다행히 정상에 오르는 날 컨디션이 좋아졌던 거죠.”


 

후배 사고가 산으로 돌아오게 하는 기폭제


매킨리 등반으로 힘을 더 얻었건만, 이후 89년 첫 아이 지영에 이어 3년 뒤에는 둘째 아이 소영이가 태어나면서 가정생활과 또 어린이집 운영에 열중하느라 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특히 매킨리를 함께 오른 한 해 후배 지현옥씨의 히말라야 등정 소식이 전해질 때면 부럽기 그지없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산을 못 다니게 되자 한동안 꿈속에서 산을 오르곤 했다.

 

바위를 타다가 추락하는 순간 깨어나 보면 안방 침대 위였고, 만년설에 누워 자다가 썰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떠보면 거실 바닥이었다. 그렇게 산과 인연을 끊은 지 10년이 훌쩍 지난 어느 봄날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지현옥씨의 사고소식이었다. 91년 무즈타그아타(7,546m), 93년 에베레스트(8848m), 97년 가셔브룸1봉(8,068m), 98년 가셔브룸2봉(8,035m) 등정으로 승승장구하며 당시 여성 최초의 히말라야 14개 거봉 완등을 꿈꿔오던 지현옥씨는 99년 안나푸르나(8,091m) 등정 후 하산길에서 셰르파와 함께 실종되고  말았다.


“엄청난 충격이었죠. 그러면서도 부러웠어요. 93년 여성원정대를 이끌고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현옥이는 대학시절 이후 내내 자신이 추구하던 삶을 살았어요. 반면 저는 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이 일 만큼 가정 일과 어린이집 일에만 몰두하며 지냈으니까요. 마침 98년 매킨리 등정 10주년 모임 이후 다시 산을 찾아야겠다 마음먹고 있던 터였어요. 저는 10원만 있어도 하고픈 걸 하고 사는 스타일이에요. 한편으론 죽을 때까지 아무리 열심히 산다 해도 별로 달라질 게 없겠다 싶어졌어요. 한 번 사는 인생 하고픈 것 하면서 살자 마음먹게 된 거죠.”


▲ (좌)김은숙씨(오른쪽)와 함께 오른 매킨리 정상. 88년 여름.(우)86년 전국암벽대회 코끼리바위 등반.

산에 다니기에 앞서 몸 만들기부터 했다. 달리기도 하고, 웨이트트레이닝도 했다. 그리곤 2000년 봄, 마흔 나이에 다시 산을 찾기 시작했다. “책을 참 좋아해서 산서도 많이 봤어요. 그중 막 산을 시작했을 때 본 장코스트의 ‘알피니스트의 마음’의 한 구절은 늘 마음 속에 지니고 살았어요. ‘나는 아무래도 산에 가야겠다’였죠. 그 말대로 다시 산에 돌아왔을 때 너무 좋았어요. 오랜 방황 끝에 탯줄을 타고 긴 유영 끝에 자궁에 안착한 듯 포근했으니까요.”


산을 찾았지만 낯설었다.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까봐 걱정도 되었다. 그런 불안한 마음으로 선인봉 기슭을 서성이는데 웬 사람이 다가와 아는 척을 해댔다. 동갑내기 산당회 회원인 고재성씨였다.


“오토바이 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뒤좇아 올라갈 만했어요. 등반방식과 장비, 사람들의 의식까지도 많이 바뀌어 있더군요. 산에 처음 다닐 때는 선배가 왕이었는데, 등반 기술 좋은 사람이 선후배를 막론하고 대장을 하는 거예요. 나름대로 알피니즘을 추구하던 예전의 분위기와 달리 등반이 레저화되고 있었던 거죠.”


젊은 시절의 기본기를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쉬운 루트는 곧 리딩할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나 1년간 파트너로 활동하던 고재성씨가 산을 나오지 않자 외톨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인수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서 우연히 만난 산 선배는 그의 산악회에 입회하라고 적극 권했다. 이렇게 해서 이연희씨가 새롭게 뿌리를 내리고 안주하게 된 모임이 바우산악회다.


▲ (좌)자일파트너로 활동하는 동생 명희(왼쪽)와 함께 선인봉에서. 2005년 10월.(우)경기도 양주 가래비빙장. 2004년 1월.

이연희씨는 바우산악회 회원으로 지내는 사이 산악 활동의 폭이 더욱 넓어지고 왕성해졌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처녀 적 몇 년간 산에 다니다 결혼 이후 집안 살림에 빠져 지내는 동생 명희씨(明姬·45)도 바우산악회에 끌어들였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주말 클라이밍을 즐기면서도 한국여성산악회 기획이사, 서울시산악연맹 교육기술이사, 한국등산학교 운영이사 등 산악계에서 두루두루 활동을 하고 있다.

 

2005년 2월 바우산악회가 가평 용추 빙벽페스티벌을 열 때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냈고, 지난해와 올해 북한산과 도봉산에서 열린 네파컵 익스트림대회 운영에서도 전력투구를 했다. “한국여성산악회는 그간 해외원정도 몇 번 나갔어요. 저는 집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국내 산행에 충실하면서 여성산악회의 초석을 다지는 일에 충실하자고 마음을 굳혔죠. 용추 페스티벌에는 2인1조 속도경기와 남녀 혼성경기에 40여 개팀이나 참가했어요. 서울시연맹이 주최하는 네파컵은 정말 역동적이었어요.

 

클라이머들에게는 정말 축제 같은 대회였어요. 얼음이요? 한창 때는 장비가 너무 비싸 접근도 못했어요. 나이 먹어 배웠는데 실력이 그리 좋을 리 있겠어요, 그냥 매바위 정도 오를 정도예요.” 이연희씨는 바우산악회가 서울시연맹에 가입한 이듬해인 2005년 서울시연맹 이사로 임명되고, 지난해 1월 바우산악회 회원들과 북알프스 동계등반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교육등반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연희 위원장은 지난해 5월부터 11월까지 매주 휴일마다 북한산 일원에서 산행안전교실을 여는 등 등산인들의 안전산행에 대해서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서울시연맹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봉사하는 차원에서 하는 일입니다. 암릉에서 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있어요. 조금만 주의하면 즐거운 산행이 될텐데 그러지 못해 사고를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안타까워요. 권위 없는 등산학교 출신이라고 신출내기 취급하고 무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등반이 스포츠·레저화한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잖아요. 그들을 모두 테이블로 끌어내 마인드를 갖게 해야 합니다. 알피니즘 정신을 심어주는 거죠. 그러다 보면 괜한 갈등도 없어지고 산악인이 많이 늘어날 거 아니겠어요?”


지난 1년간은 그녀에게 매우 힘든 시간이었다. 80년부터 몸을 담고, 94년부터 직접 운영해온 유아교육사업을 지난해 말로 접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추구해온 교육철학이 수시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재주가 없어 돈은 못 벌었어요. 천직이다 생각하고 해왔던 거예요.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성품이 많이 변했어요. 아이를 한 명씩 낳으면서 부모들이 너무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아졌어요. 모두들 내 아이는 특별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독학으로 배운 기타와 노래로 아이들의 정서를 풍부하게 해주고, 또 제대로 전공을 해야겠다 싶어 마흔이 다 된 나이에 방송통신대학에서 유아교육도 전공했는데, 그 오랜 노력이 이대로 끝난다 생각하니 너무도 가슴이 아팠어요.”


요즘 들어 마음이 가라앉았다. 현재의 상황 모두가 자신이 만들어온 것이고, 모든 갈등이 자신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인정한 이후 편해졌다. 이렇게 다시 산에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란 사실도 깨달았다. 그녀는 산에 대해 원대한 꿈을 꾸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저 가고플 때 갈 수 있고, 또 바위든 얼음이든 오르고 싶을 때 오를 수 있다면 만족한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인수 거룡길이나 하늘길을 프리로 오를 수 있을 정도면 만족이에요. 9월 초 거룡길에서 머뭇거리니까 선배 한 분이 운동부족이라고 핀잔을 주었어요.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하는데 연맹 행사나 대회에 신경쓰다 보면 제대로 훈련할 수가 없어요. 외국 고산에 대한 꿈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힘들어요. 무엇보다 무거운 짐을 메고 하얀 산을 마음껏 오를 자신이 없어요. 요즘 들어 세월이 가는 것 같아요.”


▲ (좌)형제처럼 지내는 바우산악회 회원들과 함께.(우)어린 두 딸과 함께 97년 송년파티.

후배들에게 거벽등반 기회 마련해주파


그렇지만 서울시연맹 차원의 큰 꿈은 가지고 있다. 히말라야 6,000m급 거벽에 도전하는 계획이다.


“요즘 등반 흐름이 8,000m급 고봉보다는 거벽 아니겠어요. 젊은 후배들로 꾸려진 팀이 멋진 거벽이 뻗어 있는 6,000m급 고산을 등반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거예요. 5개년 계획으로요. 그런 과정을 거친 클라이머들이 국내의 많은 산악인들에게 정보와 기술을 가르쳐준다면 전체적인 수준이 한두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올 여름 한국산악회가 먼저 시작했어요. 산꾼들이란 게 생각이 다 같은가 봐요. 그래서 한국산악회 선후배들과 교류도 자주 갖고, 서로 마음만 맞는다면 좋은 대상지를 정해 합동등반에 나서는 것도 괜찮다 싶어요.”


이연희씨는 곧 출간될 책의 원고를 보면서 무척 즐거웠다고 한다. 무엇보다 오래 된 일기책을 뒤척이는 사이 옛 추억이 솔솔 살아났고, 젊은 날 산을 꾸준히 좋아했던 그녀 자신의 마음도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선배들이 권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히말라야 고산 등반을 한 번 해본 적도 없고, 무엇 하나 뚜렷한 업적도 없는 제가 책을 낸다는 게 조금 부끄럽기는 해요. 새삼 내 삶을 돌아보고, 산을 처음 대했던 스무 살 시절과 세월에 따라 변화된 생각을 정리한 것이 내게 의미라면 의미일 테고요. 그래도 책을 내는 작업하는 사이 마치 신루트를 개척해낸 듯 뿌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산 얘기요? 아이들이 질색이에요. 엄마 인생은 엄마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면서 엄마 산에 가는 것 말리지 않을 테니 대신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말래요. 아이들이 할아버지가 이름을 잘못 지어줬데요. 그래서 연처럼 하늘 높이 날아오르려 애를 쓴데요.””

소속
바우산악회
한국여성산악회 조직이사
서울시산악연맹 교육기술이사
한국등산학교 운영위원

 

등반 및 대회입상 경력
88년 매킨리(6,194m) 등정
07년 북알프스 동계등반
86년 전국암벽대회 우승
87년 전국암벽대회 2위


 - 글 / 한필석 차장대우 / 월간 산 [469호] 2008.11월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