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기다림
플라잉점프 K2원정대 1진은 지난 5월27일 서울을 떠나 미리 K2 베이스캠프(4900m)에서 고소적응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어 5월초 로체(8516m)를 오른 고미영 씨가 6월10일 서울을 출발해 21일 합류했다. 원정대에는 70세의 이원섭 변호사와 지난 해 여성 최고령으로 에베레스트(8848m)를 오른 송귀화 씨도 참여했다. 일행은 이날 베이스캠프에서 간단한 잔치를 했다. 쿡 나왕은 한국말도 잘 했고 한국 요리도 능숙하게 했다. 불고기나 잡채는 물론이고 닭도리탕도 잘 만들었다.
진용이 갖춰지자 곧바로 공격준비를 시작했다. 6월23일 해발 6150m에 캠프1을 구축했고 25일엔 6700m에 캠프2를 세웠다. 이어 베이스캠프와 캠프1 캠프2를 오가며 고소적응훈련을 반복했다. 7월6일엔 7400m 고지에 캠프3까지 구축했지만 날씨가 따라주지 않아 철수했다. 7월10일부터 다시 날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며 움직였지만 역시 강풍이 몰아쳐 다시 물러났다. 베이스캠프에서 날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며 다시 며칠을 보냈다. 눈앞의 목표를 두고도 움직이지 못하는 대원들은 온 몸이 근질근질했다.
이러다가 아예 시도도 못해보고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악명 높은 K2의 강풍이 단 한 팀도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해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려를 깨고 결전의 날은 다가왔다. 각국이 수집한 기상 정보를 분석한 결과 7월말에서 8월초에 기상 여건이 좋아질 것으로 나왔다. 7월 25일 베이스캠프에 있던 각국 원정대의 리더들이 모였다. 7월31일을 D데이로 잡았다.
*정상, 그리고 고통의 시작
드디어 정상 공격이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각국 원정대는 부산하게 움직였다. D데이 보다 앞서 움직여야 전초기지에서 예정일에 정상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원정대는 7월27일 베이스캠프를 출발, 28일 캠프2에 도착했다. 캠프2에서 기상이 좋지 않아 하루를 머문 뒤 30일 캠프3까지 진출했다. 31일 오후 3시15분께 8000m고지에 도착했다. 캠프4를 설치했다. 텐트를 설치할 수 있게 눈덩이를 깎아내 자리를 평탄하게 하는 일은 김재수 대장과 고미영 씨가 맡았다.
셰르파들은 먼저 루트를 개척한 뒤 짐을 가지러 내려갔고 다른 대원들보다 그들이 체력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대원들은 캠프2까지는 모두가 비슷한 속도로 움직였으나 이후엔 고소적응이 완벽하게 된 김재수 원정대장과 고미영씨의 속도가 빨랐다. 캠프4는 말이 캠프지 잠시 쉬어가는 장소다. 텐트 두동을 쳤지만 누울 만큼의 공간 여유는 없었다. 대원들은 텐트 안에 모여앉아 물을 끓여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10시간 정도의 휴식을 취한 후 원정대는 정상공격을 준비했다.
원정대원 11명을 1차공격조 5명, 2차공격조 6명으로 나누고 셰르파 4명은 조별로 2명씩 배정했다. 1차공격조는 고소적응이 완벽하게 돼 있는 김 대장과 고미영 씨 외에 대원들 중 체력조건이 아주 뛰어나 항상 함께 움직이는 황동진 등반대장과 김효경 박경효 대원이 뽑혔다. 밖은 살을 에는 강풍이 몰아치며 공기도 희박한 급경사 지역이다. 게다가 그 동안 내린 눈으로 루트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 새로 러셀(russel: 눈이 많이 쌓인 산에서 선두가 눈을 헤치고 다져가며 길을 내는 일)까지 해가며 루트를 개척해야 했기 때문에 월등한 체력과 고소적응이 된 대원들이 먼저 나선 것이다.
이제 나서면 돌아올 때까진 식사를 할 수 없었다. 대원들은 식수와 확보장비 산소통 등을 챙겼다. 주머니마다 사탕을 쑤셔 넣었다. 하루 정도를 버티게 해줄 비상식량이었다. 새벽 1시, 각국 원정대의 셰르파 9명이 먼저 루트를 뚫으려 나섰다. 새벽 3시10분께 김 대장을 비롯한 대원들이 텐트를 나섰다. 다른 나라의 원정대도 비슷하게 움직였다. 캠프4까지 오는 길도 험난했지만 이곳부터는 베테랑들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진짜 난코스다.
대원들은 앞서 나간 셰르파들과 곧 합류했다. 새벽 다섯 시께 고산지대의 협곡을 의미하는 꿀르와르(couloir) 하단에 도착했다. 1시간여에 걸쳐 꿀르와르를 지나자 정상으로 가는 도중의 1차 난관인 고도 8211m 인근의 보틀넥(bottleneck)에 도착했다. 보틀넥엔 말 그대로 병목현상이 생겼다. 로프가 모자라 이미 지나왔던 곳에서 로프를 다시 걷어오느라 많은 시간이 지연되면서 4시간 정도가 지난 뒤에야 보틀넥 통과에 나섰다.
위험한 구간에서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로프를 고정해 가며 오르는 보틀넥은 K2의 악명을 높이는 데 한 몫을 한 구간이다. K2는 1986년 13명을 비롯해, 지난해까지 66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80~90도의 직벽 위에는 빙하가 급경사에서 이르러 갈라지면서 형성된 아파트만큼이나 큰 세락(serac;얼음기둥)이 대원들에게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듯 위협하고 있었다. 발밑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수십 수백 길의 크레바스(crevasse)가 곳곳에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고미영 씨는 이 구간을 통과가면서 “러시안 룰렛 게임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세락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무사히 통과하면 행운이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보틀넥 중간에서 대원들은 산소를 바꾸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다시 이동을 하는 순간 저 뒤에서 따라오던 한 외국인(세르비아)이 가파른 경사면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의 시신을 수습하던 파키스탄인 하이포터도 휩쓸려 내려갔다.
그 세르비아인은 20여분 뒤 캠프3 근처에서 동료들에게 발견돼 현장에 안장된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눈 깜빡할 사이에 700여m를 굴러 영원히 돌아올 수 있는 길로 간 것이다. 사고가 있었지만 돌아설 수도 없었다. 한국팀은 이미 보틀넥을 거의 건너고 있었던 데다 서로 비켜가기로 어려운 좁은 길에 외국인들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게다가 후퇴한다는 것은 올해 K2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보틀넥을 통과했다.
한국팀은 앞서가던 네덜란드팀의 윌코(Wilco van Rooijen)를 추월했다. 윌코는 나중에 한국팀은 제일 강하고 속도가 빨랐다고 진술했다. 보틀넥을 지나면서 한국 팀은 정상 등정을 확신했다. 하늘은 쾌청했다. 중간 중간 난구간이 있었지만 암벽이나 빙벽등반에 이력이 분은 그들에겐 거칠 게 없었다. 일행 중 처음으로 박경효씨가 5시30분께 정상에 도착했고 3명의 대원이 5시40분께 합류했다. 서로 기쁨을 나누며 사진을 찍었다. 셰르파 쥬믹은 위성전화로 만삭의 아내와 통화를 했다. 곧 출산할 것이라고 했다.
이날 정상은 장갑을 끼지 않아도 추위를 전혀 느끼지 않을 정도로 햇볕이 강했다. 땀이 나서 셔츠가 젖을 정도였다. 건너편 브로드피크(8047m)는 물론이고 중국 쪽의 광활한 대륙도 보였다. 50~60km 정도는 확실히 보일 정도로 시계가 좋았다. 그런데 대원 중 한 명이 느리고, 힘겹게 올라오는 게 보였다. 빨리 하산할 수도 있었지만 날씨가 워낙 좋아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그대로 돌아설 경우 그에게 영원히 실망감을 안겨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팀보다 30분 늦게 도착한 노르웨이팀의 여성 산악인 세실리아가 먼저 하산을 시작했다. 세실리아(노르웨이)는 7대륙 최고봉과 3극점을 오른 최초의 여성이다. 그녀의 남편은 뒤늦게 오다가 중간에 그녀와 만나 하산했다. 그런데 나중에 세실리아를 앞서 내려가던 그녀의 남편은 보틀넥 구간에서 세락이 무너지면서 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팀은 정상에서 오후 7시 10분에 하산을 시작했다. 그 때까지 네덜란드나 이태리 팀은 정상에 도착하지도 못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강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런데 로프 없이 등정했으므로 하산하는 길이 걱정이었다. 내려가는 길은 오르막보다 훨씬 위험했다. 로프 없이 움직인다는 것은 목숨을 내거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마침 한국팀 셰르파 쥬믹이 70m로프를 가지고 있어서 70m씩 나누어 이동하기로 했다. 먼저 김 대장이 내려가 확보를 해 놓으면 대원들이 따라서 내려가고 셰르파 쥬믹이 뒤에서 로프를 회수하며 내려오고, 다시 김 대장이 내려가 확보를 하고 로프를 회수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한걸음 한 걸음 내려왔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시간이 지체됐다. 그런데 여기에 외국인들이 따라붙었다. “그들은 산소도 없고 거의 지친 상태였다. 이 로프가 없었으면 아무도 못 내려왔을 것이다. 그들 때문에 로프를 회수하며 오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김재수 대장의 설명이다. “그 로프가 없었더라면 아마 외국인들은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을 것이다. 70m 로프가 그처럼 고마울 수가 없었다." 김 대장은 덧붙였다. 가장 경사가 심한 구간을 하강하여 고정로프가 있는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곳까지 내려오니 새벽 1시가 됐다. 벌써 마지막캠프를 출발한 지 22시간이 지났다.
보틀넥 구간 중에 옆으로 비스듬히 가는 150m 길이의 크레바스 구간이 앞에 있었지만 이미 올라가면서 어느 정도 루트를 다져놓은 상태였다. 게다가 C4의 불빛도 보였다. 미국 팀이 달아놓은 반짝이 등이었는데 밤새 반짝이고 있어 대원들이 한밤중에 길을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됐다. 보틀넥 마지막 구간에 도착하니 정상에 가면서 설치했던 고정로프가 사라졌다. 일행이 정상에 갔다 오는 동안 세락이 무너져 내리면서 휩쓸고 내려간 것이다. 그 험한 구간을 로프도 없이 내려가야 하나?
그런데 누군가가 설치해 놓은 3.5mm 로프가 발견됐다. 노르웨이팀의 세실리아가 앞서가던 남편이 변을 당한 뒤 탈출을 하면서 매어놓은 것이었다. 김 대장은 이미 안전지대까지 왔고 로프까지 찾았으니 캠프4로 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설치된 로프로 하강한 뒤 비교적 경사가 덜 급한 구간을 이동하면 됐기에 2~3시간이면 캠프4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 대장과 고미영씨가 먼저 이동을 시작했다.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강풍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캠프4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보고 방향을 잡아가며 이동했다.
캠프4에 도착할 무렵 앞서가던 김 대장은 발가락 동상을 치료하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마중 나온 셰르파들을 만난 그는 뒤따라오는 고미영 씨에게 가보라고 지시하고 먼저 텐트로 들어갔다. 그런데 잘 따라가던 고미영 씨가 갑자기 길을 잃었다. 30분 정도면 캠프4에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던 부분에서 캠프4의 불빛을 따라갔는데 갑자기 불빛이 사라졌다. 그래서 되돌아서 올라가면 다시 불빛이 멀어져 있고 내려오면 또 사라졌다. 눈보라는 더욱 거세졌고 발도 점점 시려왔다.
두 시간 동안 이런 과정을 반복하던 고 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 두시가 후면 날이 밝을 테니 바람 피할 곳이나 찾자는 생각으로 움직이던 중에 저만치 불빛이 보였다. 소리를 질렀다. “헬프 미.” 누군가가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한국팀 셰르파였다. 고 씨는 긴장이 풀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양팔을 부축했다. 캠프4에 도착하니 새벽 5시30분이나 됐다. 고 씨가 헤매던 시각, 김 대장은 캠프4에 먼저 들어가 곧 고 씨가 오니 따뜻한 물을 준비하라고 대원들에게 지시했다.
그 역시 너무 지쳐서 따뜻한 물을 마시고 잠시 기다리다 깜빡 졸았다. 그런데 5분이면 올 줄 알았던 고 씨는 1시간이 지나도 오질 않았고 1시간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조바심이 극도에 달했을 무렵 드디어 고 씨가 도착했다. 김 대장은 왜 이렇게 늦었냐고 역정을 냈다. 동료애가 듬뿍 담긴 화풀이였다. 고 씨는 자신이 중간에 너무나 헤매다가 늦게 왔기에 당연히 다른 대원들은 왔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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