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K2의 비극 스토리 *-

paxlee 2008. 12. 9. 19:59

지난 2008년 8월초 히말라야에서 가장 험난한 봉우리인 K2(8611m)에선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한국원정대 3명을 비롯해 11명이 한꺼번에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난 것이다. 그 내용을 풀 스토리로 소개한다.

  

 

8월4일 새벽, 플라잉점프 K2원정대 김재수 원정대장은 캠프4 철수지시를 내렸다. 이틀을 기다렸지만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파키스탄 정부가 파견한 헬기가 이틀 동안 관측을 했지만 더 이상 움직이는 물체를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정상공격 때 잠시 쉬어가려고 설치한 캠프4에서는 더 이상 머물 여유도 없었다. 인간의 의식까지도 말살시키는 8000m 이상 고지에서 나흘을 보낸 대원들이 드디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 사태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팔려 멍해 있던 고미영 대원이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다른 대원들도 말없이 눈시울을 적셨다. 해발 7000m 넘는 고지에서 몰아치는 강풍은 눈물마저 사그라지게 했다. 캠프3을 지나면서 그때까지 강인한 모습으로 대원들을 이끌던 김재수 대장이 목을 놓아 울었다. “동진아, 효경아, 경효야….” 그러나 그렇게 시간을 보낼 수만은 없었다. 대원들은 다시 베이스캠프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살붙이 같던 그들을 이제는 영원히 가슴 속에 묻어야 했다. 밤 10시가 되어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베이스캠프에선 일행의 도착에 맞춰 네팔인 쿡 ‘나왕’이 눈물의 음식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왕은 장손이었다. 이번 사고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셰르파 쥬믹과 셰르파 파상은 그의 사촌들이었다. 일행은 그가 어떤 기분으로 요리를 했을지 알았지만 모두 침묵한 채 마음속으로만 고마워할 뿐이었다. 8월 4일은 마침 고미영 씨의 생일이었다. 원정대는 정상 등정을 기념하고 그녀의 생일까지 축하해 줄 요량으로 몇 병의 소주를 베이스캠프에 남겨두고 있었다. 그런데 ‘정상주’로 마시려던 그 술이 위로주가 될 줄이야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K2의 비극 풀 스토리(2)-지루한 기다림, 정상, 그리고 고통의 시작 

 

  *지루한 기다림

 

 플라잉점프 K2원정대 1진은 지난 5월27일 서울을 떠나 미리 K2 베이스캠프(4900m)에서 고소적응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어 5월초 로체(8516m)를 오른 고미영 씨가 6월10일 서울을 출발해 21일 합류했다. 원정대에는 70세의 이원섭 변호사와 지난 해 여성 최고령으로 에베레스트(8848m)를 오른 송귀화 씨도 참여했다. 일행은 이날 베이스캠프에서 간단한 잔치를 했다. 쿡 나왕은 한국말도 잘 했고 한국 요리도 능숙하게 했다. 불고기나 잡채는 물론이고 닭도리탕도 잘 만들었다.

 

 진용이 갖춰지자 곧바로 공격준비를 시작했다. 6월23일 해발 6150m에 캠프1을 구축했고 25일엔 6700m에 캠프2를 세웠다. 이어 베이스캠프와 캠프1 캠프2를 오가며 고소적응훈련을 반복했다. 7월6일엔 7400m 고지에 캠프3까지 구축했지만 날씨가 따라주지 않아 철수했다. 7월10일부터 다시 날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며 움직였지만 역시 강풍이 몰아쳐 다시 물러났다. 베이스캠프에서 날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며 다시 며칠을 보냈다. 눈앞의 목표를 두고도 움직이지 못하는 대원들은 온 몸이 근질근질했다.

 

이러다가 아예 시도도 못해보고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악명 높은 K2의 강풍이 단 한 팀도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해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려를 깨고 결전의 날은 다가왔다. 각국이 수집한 기상 정보를 분석한 결과 7월말에서 8월초에 기상 여건이 좋아질 것으로 나왔다. 7월 25일 베이스캠프에 있던 각국 원정대의 리더들이 모였다. 7월31일을 D데이로 잡았다.


 *정상, 그리고 고통의 시작

 

 드디어 정상 공격이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각국 원정대는 부산하게 움직였다. D데이 보다 앞서 움직여야 전초기지에서 예정일에 정상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원정대는 7월27일  베이스캠프를 출발, 28일 캠프2에 도착했다. 캠프2에서 기상이 좋지 않아 하루를 머문 뒤 30일 캠프3까지 진출했다. 31일 오후 3시15분께 8000m고지에 도착했다.  캠프4를 설치했다. 텐트를 설치할 수 있게 눈덩이를 깎아내 자리를 평탄하게 하는 일은 김재수 대장과 고미영 씨가 맡았다.

 

셰르파들은 먼저 루트를 개척한 뒤 짐을 가지러 내려갔고 다른 대원들보다 그들이 체력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대원들은 캠프2까지는 모두가 비슷한 속도로 움직였으나 이후엔 고소적응이 완벽하게 된 김재수 원정대장과 고미영씨의 속도가 빨랐다. 캠프4는 말이 캠프지 잠시 쉬어가는 장소다. 텐트 두동을 쳤지만 누울 만큼의 공간 여유는 없었다. 대원들은 텐트 안에 모여앉아 물을 끓여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10시간 정도의 휴식을 취한 후 원정대는 정상공격을 준비했다.

 

 원정대원 11명을 1차공격조 5명, 2차공격조 6명으로 나누고 셰르파 4명은 조별로 2명씩 배정했다. 1차공격조는 고소적응이 완벽하게 돼 있는 김 대장과 고미영 씨 외에 대원들 중 체력조건이 아주 뛰어나 항상 함께 움직이는 황동진 등반대장과 김효경 박경효 대원이 뽑혔다. 밖은 살을 에는 강풍이 몰아치며 공기도 희박한 급경사 지역이다. 게다가 그 동안 내린 눈으로 루트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 새로 러셀(russel: 눈이 많이 쌓인 산에서 선두가 눈을 헤치고 다져가며 길을 내는 일)까지 해가며 루트를 개척해야 했기 때문에 월등한 체력과 고소적응이 된 대원들이 먼저 나선 것이다.

 

 이제 나서면 돌아올 때까진 식사를 할 수 없었다. 대원들은 식수와 확보장비 산소통 등을 챙겼다. 주머니마다 사탕을 쑤셔 넣었다. 하루 정도를 버티게 해줄 비상식량이었다. 새벽 1시, 각국 원정대의 셰르파 9명이 먼저 루트를 뚫으려 나섰다. 새벽 3시10분께 김 대장을 비롯한 대원들이 텐트를 나섰다. 다른 나라의 원정대도 비슷하게 움직였다. 캠프4까지 오는 길도 험난했지만 이곳부터는 베테랑들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진짜 난코스다.

 

대원들은 앞서 나간 셰르파들과 곧 합류했다. 새벽 다섯 시께 고산지대의 협곡을 의미하는 꿀르와르(couloir) 하단에 도착했다. 1시간여에 걸쳐 꿀르와르를 지나자 정상으로 가는 도중의 1차 난관인 고도 8211m 인근의 보틀넥(bottleneck)에 도착했다. 보틀넥엔 말 그대로 병목현상이 생겼다. 로프가 모자라 이미 지나왔던 곳에서 로프를 다시 걷어오느라 많은 시간이 지연되면서 4시간 정도가 지난 뒤에야 보틀넥 통과에 나섰다.

 

위험한 구간에서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로프를 고정해 가며 오르는 보틀넥은 K2의 악명을 높이는 데 한 몫을 한 구간이다. K2는 1986년 13명을 비롯해, 지난해까지 66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80~90도의 직벽 위에는 빙하가 급경사에서 이르러 갈라지면서 형성된 아파트만큼이나 큰 세락(serac;얼음기둥)이 대원들에게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듯 위협하고 있었다. 발밑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수십 수백 길의 크레바스(crevasse)가 곳곳에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고미영 씨는 이 구간을 통과가면서 “러시안 룰렛 게임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세락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무사히 통과하면 행운이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보틀넥 중간에서 대원들은 산소를 바꾸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다시 이동을 하는 순간 저 뒤에서 따라오던 한 외국인(세르비아)이 가파른 경사면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의 시신을 수습하던 파키스탄인 하이포터도 휩쓸려 내려갔다.

 

 그 세르비아인은 20여분 뒤 캠프3 근처에서 동료들에게 발견돼 현장에 안장된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눈 깜빡할 사이에 700여m를 굴러 영원히 돌아올 수 있는 길로 간 것이다. 사고가 있었지만 돌아설 수도 없었다. 한국팀은 이미 보틀넥을 거의 건너고 있었던 데다 서로 비켜가기로 어려운 좁은 길에 외국인들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게다가 후퇴한다는 것은 올해 K2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보틀넥을 통과했다.

 

한국팀은 앞서가던 네덜란드팀의 윌코(Wilco van Rooijen)를 추월했다. 윌코는 나중에 한국팀은 제일 강하고 속도가 빨랐다고 진술했다. 보틀넥을 지나면서 한국 팀은 정상 등정을 확신했다. 하늘은 쾌청했다. 중간 중간 난구간이 있었지만 암벽이나 빙벽등반에 이력이 분은 그들에겐 거칠 게 없었다. 일행 중 처음으로 박경효씨가 5시30분께 정상에 도착했고 3명의 대원이 5시40분께 합류했다. 서로 기쁨을 나누며 사진을 찍었다. 셰르파 쥬믹은 위성전화로 만삭의 아내와 통화를 했다. 곧 출산할 것이라고 했다.

 

이날 정상은 장갑을 끼지 않아도 추위를 전혀 느끼지 않을 정도로 햇볕이 강했다. 땀이 나서 셔츠가 젖을 정도였다. 건너편 브로드피크(8047m)는 물론이고 중국 쪽의 광활한 대륙도 보였다. 50~60km 정도는 확실히 보일 정도로 시계가 좋았다. 그런데 대원 중 한 명이 느리고, 힘겹게 올라오는 게 보였다. 빨리 하산할 수도 있었지만 날씨가 워낙 좋아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그대로 돌아설 경우 그에게 영원히 실망감을 안겨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팀보다 30분 늦게 도착한 노르웨이팀의 여성 산악인 세실리아가 먼저 하산을 시작했다. 세실리아(노르웨이)는 7대륙 최고봉과 3극점을 오른 최초의 여성이다. 그녀의 남편은 뒤늦게 오다가 중간에 그녀와 만나 하산했다. 그런데 나중에 세실리아를 앞서 내려가던 그녀의 남편은 보틀넥 구간에서 세락이 무너지면서 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팀은 정상에서 오후 7시 10분에 하산을 시작했다. 그 때까지 네덜란드나 이태리 팀은 정상에 도착하지도 못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강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런데 로프 없이 등정했으므로 하산하는 길이 걱정이었다. 내려가는 길은 오르막보다 훨씬 위험했다. 로프 없이 움직인다는 것은 목숨을 내거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마침 한국팀 셰르파 쥬믹이 70m로프를 가지고 있어서 70m씩 나누어 이동하기로 했다. 먼저 김 대장이 내려가 확보를 해 놓으면 대원들이 따라서 내려가고 셰르파 쥬믹이 뒤에서 로프를 회수하며 내려오고, 다시 김 대장이 내려가 확보를 하고 로프를 회수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한걸음 한 걸음 내려왔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시간이 지체됐다. 그런데 여기에 외국인들이 따라붙었다. “그들은 산소도 없고 거의 지친 상태였다. 이 로프가 없었으면 아무도 못 내려왔을 것이다. 그들 때문에 로프를 회수하며 오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김재수 대장의 설명이다. “그 로프가 없었더라면 아마 외국인들은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을 것이다. 70m 로프가 그처럼 고마울 수가 없었다." 김 대장은 덧붙였다. 가장 경사가 심한 구간을 하강하여 고정로프가 있는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곳까지 내려오니 새벽 1시가 됐다. 벌써 마지막캠프를 출발한 지 22시간이 지났다.

 

 보틀넥 구간 중에 옆으로 비스듬히 가는 150m 길이의 크레바스 구간이 앞에 있었지만 이미 올라가면서 어느 정도 루트를 다져놓은 상태였다. 게다가 C4의 불빛도 보였다. 미국 팀이 달아놓은 반짝이 등이었는데 밤새 반짝이고 있어 대원들이 한밤중에 길을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됐다. 보틀넥 마지막 구간에 도착하니 정상에 가면서 설치했던 고정로프가 사라졌다. 일행이 정상에 갔다 오는 동안 세락이 무너져 내리면서 휩쓸고 내려간 것이다. 그 험한 구간을 로프도 없이 내려가야 하나?

 

그런데 누군가가 설치해 놓은 3.5mm 로프가 발견됐다. 노르웨이팀의 세실리아가 앞서가던 남편이 변을 당한 뒤 탈출을 하면서 매어놓은 것이었다. 김 대장은 이미 안전지대까지 왔고 로프까지 찾았으니 캠프4로 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설치된 로프로 하강한 뒤 비교적 경사가 덜 급한 구간을 이동하면 됐기에 2~3시간이면 캠프4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 대장과 고미영씨가 먼저 이동을 시작했다.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강풍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캠프4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보고 방향을 잡아가며 이동했다.

 

캠프4에 도착할 무렵 앞서가던 김 대장은 발가락 동상을 치료하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마중 나온 셰르파들을 만난 그는 뒤따라오는 고미영 씨에게 가보라고 지시하고 먼저 텐트로 들어갔다. 그런데 잘 따라가던 고미영 씨가 갑자기 길을 잃었다. 30분 정도면 캠프4에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던 부분에서 캠프4의 불빛을 따라갔는데 갑자기 불빛이 사라졌다. 그래서 되돌아서 올라가면 다시 불빛이 멀어져 있고 내려오면 또 사라졌다. 눈보라는 더욱 거세졌고 발도 점점 시려왔다.

 

두 시간 동안 이런 과정을 반복하던 고 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 두시가 후면 날이 밝을 테니 바람 피할 곳이나 찾자는 생각으로 움직이던 중에 저만치 불빛이 보였다. 소리를 질렀다. “헬프 미.” 누군가가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한국팀 셰르파였다. 고 씨는 긴장이 풀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양팔을 부축했다. 캠프4에 도착하니 새벽 5시30분이나 됐다. 고 씨가 헤매던 시각, 김 대장은 캠프4에 먼저 들어가 곧 고 씨가 오니 따뜻한 물을 준비하라고 대원들에게 지시했다.

 

그 역시 너무 지쳐서 따뜻한 물을 마시고 잠시 기다리다 깜빡 졸았다. 그런데 5분이면 올 줄 알았던 고 씨는 1시간이 지나도 오질 않았고 1시간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조바심이 극도에 달했을 무렵 드디어 고 씨가 도착했다. 김 대장은 왜 이렇게 늦었냐고 역정을 냈다. 동료애가 듬뿍 담긴 화풀이였다. 고 씨는 자신이 중간에 너무나 헤매다가 늦게 왔기에 당연히 다른 대원들은 왔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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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2의 비극 풀 스토리(3)-풀리지 않는 수수께 

 

 *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그들은 왜 멈췄을까?  김 대장은 아직도 의문에 잠겨 있다. “안전지대까지 잘 왔는데 왜 둘만 내려오고 나머지는 어떤 이유로 못 내려왔는지 모르겠다.” 고미영씨도 같은 의견이다. “왜 그 위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비박(침낭 없이 입은 채로 자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는 것에 불과하다. 늦게 내려오면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절단해야 한다. 그걸 알 텐데 왜 안 내려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튼 문제는 거기서부터 불거졌다.

 

대원들이 밤에 내려왔더라면 한국 팀은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동이 트고 8시경이 되자 보틀넥 윗부분에 9명이 머물러 있는 게 카메라에 잡혔다. 고미영 씨와 8000m급 5개봉을 함께 한 경험 많고 능숙한 셀파 쥬믹이 대원들과 함께 있었다. 즉시 구조가 시작됐다. 셰르파 3명(빅파상, 스몰파상, 치링)이 무전기와 산소 구조장비 등을 짊어지고 먼저 떠났다. 10시 30분 경, 빅파상이 무전으로 대원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접근했다고 전해왔다.

 

이들과 함께 구조에 나선 원정대원 2명은 8,000미터 이상의 고소에선 적응이 안 된 상태라 느리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12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스몰파상이 흥분한 목소리로 다급하게 “멤버들이 당했다”고 외쳤다. 대원들이 보틀넥 마지막 부분에서 하강 후 걸어오는 도중 세락이 무너져 내려 덮친 것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이었다. 눈사태가 몰아치며 2명의 셰르파를 휩쓸었다. 그곳에서 벗어나 있어 변을 모면한 2명의 셰르파(스몰파상, 치링)는 사촌형들의 마지막 순간을 목격하고는 눈물만 흘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탈리아 유명산악인 마르코는 완전히 탈진해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기에 참혹한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운명의 여신은 그렇게 사람들의 생사를 갈라놨다. 김 대장은 순간 빠른 판단을 해야 했다. ‘이미 붕괴되었던 세락이 다시 무너진 것은  곧 이어 3차, 4차로 이어질 것이다’ 그는 즉시 구조를 나섰던 대원들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얼마 안 돼 다시 세락이 무너져 내렸고 얼음 조각들이 연달아 쏟아져 내리더니 그 위로 눈사태가 덮쳤다.

 

눈사태가 잠잠해지면서 대원들은 다음 날까지 인근을 수색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고 직후 파키스탄 정부에서 보낸 군 헬기 2대도 이틀 동안 현장을 돌면서 관측했지만 움직이는 물체를 찾는데 실패했다. 3일 자정이 넘도록 고민하던 김 대장은 다시 결정을 해야 했다. 8000m 고지에서 벌써 나흘 가까이 버텼다. 더 있으면 나머지 대원들도 위험했다. 그래서 그 밤이 밝기도 전에 하산을 명령했다. 내리막이라고는 하지만 쉽지 않았다. 급경사라 하강을 해야 했다.

 

게다가 조금만 잘못하면 낙석이 쏟아져 내렸다. 헬멧을 썼더라도 작은 돌멩이 하나가 밑에 있는 사람에겐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 밑으로 내려가면서 위까지 봐가며 힘든 하강을 계속했다. 베이스캠프까지 12시간이 걸렸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자마자 김 대장은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대한산악연맹에 연락해 가족에게 비보를 전하도록 했다. 대원들이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다음날 하루 종일 비가 왔다. 두 달이 넘게 머무는 동안 줄곧 눈이 내렸는데 하늘도 이들의 슬픔을 아는 듯했다.

 

베이스캠프의 분위기는 우울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는 “I'm sorry"였다. 여러 팀이 사고를 당했다. 사고를 면한 팀은 아예 중간에 목표를 포기했거나 공격을 늦춘 경우였다. 어디 가서도 섣불리 얘기를 꺼내기가 어려운 분위기였다. 원정을 나가면 돌아올 때까지 집에는 전화 한 통화 제대로 하지 않는 김 대장이었지만 변을 당한 동료들의 집에는 전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죄송합니다”라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유족들은 “시신이라도 수습해 돌아오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시신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도박인데다, 설령 찾는다고 해도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는 그 벼랑으로 시신을 끌어내리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헬기가 접근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고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발가락은 동상으로 시커멓게 죽어가고 있었다. 일행은 베이스캠프 근처 메모리얼힐을 찾았다. 스테인리스 쟁반에 영면한 대원들의 이름을 새겨 걸었다.

 

김 대장은 눈물을 머금고 유품을 챙겼다. 세 사람은 유난히도 비슷했다. 모두가 술고래였지만 담배는 전혀 피우지 않았다. 게다가 셋 다  일기를 썼다. 일기를 들춰보지도 않고 그대로 챙겼다. 황동진 대장의 수첩에는 둘째 아이가 그린 그림이 고이 접힌 채 들어 있었다. 한쪽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다른 한 쪽에는 끝없는 낭떠러지가 그려진 그림에는 “아빠 떨어지면 안 돼” 라는 글귀가 있었다. 김 대장은 다시 눈물을 쏟았다. 서둘러야 했기에 헬기를 불렀다. 헬기는 K2베이스캠프에서 두 시간 가까이 떨어진 브로드피크 베이스캠프 근처로 온다고 했다.

 

짐을 채 반도 챙기지 못한 채 베이스캠프를 떠났다. 정상 공격을 늦추고 기다리고 있던 싱가폴팀이 나중에 그들이 남겨둔 텐트를 대신 사용하기로 하였고, 남겨진 물건들은 불태웠다고 밝혔다. 일행이 칠라스를 거쳐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하자 다시 비가 내렸다. 이들이 서울로 들어오는 날도 비가 내렸다. 귀국 직후 대원들은 빈소가 마련된 김해로 내려갔다. 자비를 털어 훈련을 시키고 어렵게 원정비용을 마련해 이끌고 간 그들의 빈소도 김 대장이 비용을 내 마련했다. 김해로 가는 길에 김 대장은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보내려고 그 돈을 들여 훈련시켰단 말인가?’

 

 

*K2에 영면한 사람들

 

 김 대장은 잃어버린 세 사람의 얼굴을 지울 수가 없다. 고 황동진 등반대장은 94년 처음 만났으니 14년의 교류가 있던 셈이다. 그와는 지난 해 처음으로 로체를 함께 올랐지만 익히 잘 알고 있었다. 1년 전부터는 매주 만나서 잠을 자지 않고 20시간씩 걷는 훈련도 했다. 이번에도 산에서만 두 달여를 줄 곳 함께 지냈으니 집안 내력까지 훤히 안다. 고 박경효 대원은 같은 지역 출신이라 더 자주 만났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늘 함께 했고 지난 해 에베레스트도 함께 올랐다.

 

당시 10명이 정상을 밟아 단일 팀 최다등정 기록은 물론이고 20대에서 60대까지 함께 오르는 기록도 세웠다. 이번 K2 원정을 함께 한 송귀화씨는 당시 60대에 에베레스트를 오르며 여성 최고령 기록을 세웠다.

 울산 출신인 고 김효경 대원은 선배의 소개로 받아들였다. 테스트를 해본 결과 충분한 자질을 갖췄다. 학교 다닐 때 복싱을 한 그는 체력이 대단했다. 훈련테스트에서 대원들 가운데 전 종목 1위를 했다. 근성이나 정신력도 강했다.

 

묘하게도 셋은 항상 1조로 함께 움직였다. 다른 대원들은 체력적으로 그들을 따라가지 못했다. 김 대장이 그들 셋을 1차공격조에 편입시킨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번에 셰르파 쥬믹과 빅파상이 함께 희생됐다. 쥬믹의 아내는 남편이 정상에 서던 날, 아들을 순산했다. 유복자가 된 셈이다. 김 대장은 동상치료를 마치는 대로 네팔로 건너갈 예정이다. 국적이 다르고 산에 오르는 목적도 달랐지만 대원으로서 존중한다는 것이다.


 *가장 험난한 산 K2

 

 K2에는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등반가의 공동묘지’니 ‘죽음을 부르는 산’ 이니 하는 끔찍한 말들이다. 지난 해 K2를 올랐던 김창호 씨는 “K2는 마지막에 우리의 발목을 낚아챘다. ‘등정’이라는 말보다 성난 K2가 쳐 놓은 죽음의 거미줄에서 빠져나오려는 ‘생존’이 먼저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만큼 K2는 어려운 산이다. adventureStats.com에 따르면 이번에 공격한 팀을 포함해 K2정상을 밟은 사람은 모두 299명이다. 그런데 77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정상을 밟은 사람의 25.7% 만큼이 희생됐으니 이만저만 큰 대가가 아니다. 공교롭게도 최근에 사망한 17명은 모두 보틀넥에서 눈사태나 추락으로 변을 당했다.  그 만큼 보틀넥은 K2에서도 위험한 구간이었다.

 정상을 밟은 뒤 하산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만도 32명이나 된다. 비율로 보면 정상을 밟은 사람의 10% 이상이 희생됐다는 얘기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에선 정상 정복 후 하산하다 사망하는 비율이 2.5%에 불과하다.

 

 등산기술이 나아진 2000년 이후 정상을 밞은 사람 대비 사망자의 비율이 에베레스트에선 1.5%에 불과한 반면 K2는 아직도 7.5%나 된다. 단순 비교로 에베레스트보다 K2가 다섯 배나 더 위험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게다가 날씨가 급변해 단 한 명도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해도 자주 있다. 2002년 2003년 2005년 등이 그런 해이다. 김재수 대장은 이번에 무너진 세락은 K2가 정상을 허락한 후 54년 동안 이번을 포함해 세 번 무너져 내렸다고 설명했다. 세락이 무너지는 확률은 그만큼 낮다고도 할 수 있는 셈이다.

 

이번 붕괴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다고 했다. 고미영씨는 “사고 직후 베이스캠프에서 브로드피크를 올랐던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이 그 쪽에서 보니 세락이 기울어져 있었다고 했다”고 밝혔다. 위험성이 그만큼 높아져 있던 셈이다. 특히 이번에 원정대가 정상을 공격하기 전 날과 D데이 이틀 동안 날씨가 갑자기 따뜻해진 것도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무너져 내린 이유로 분석된다. 보틀넥을 피할 수는 없을까. 김 대장은 “K2를 가려면 이 구간을 피할 수는 없다. 어떤 루트를 타든 결국은 이곳을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그 외길을 세락이 항상 위협하고 있는 셈이다.

 

*묻힌 기록

 

 이번에 한국 팀은 셰르파 2명을 포함해 7명이 1차 공격에서 정상을 밟았다. 한번 공격으로 이만한 인원이 정상에 오른 것은 처음이다. 이전까지 기록은 같은 원정대가 1․2차 공격을 합해 여덟 명이 올랐던 게 최고다. 사고가 없었다면 한국팀은 다음 날 대원6명과 셰르파 2명 등 여덟 명으로 다시 정상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이것마저 성공하면 한 시즌에 한 팀 15명이 정상을 밟는 것이었다.

 

K2에선 쉽게 깰 수 없는 기록을 세우기 직전에 운명이 그들을 돌려세운 셈이다. 한편 지금까지 총 11명의 여성이 K2 정상을 밟았다. 한국에선 이번에 정상을 밟은 고미영씨와 지난 해 정상에 선 오은선 씨 등 두 명이 있다. 11명 가운데 3명은 하산하는 과정에 유명을 달리했고, 다른 2명이 다른 산에서 사망했다.


 *잘못 알려진 정보들

 

 일부 외국인들이 이번에 사고를 당한 한국 팀에 대해 경험이 없다는 말을 했고 이것이 그대로 외신에 퍼져나간데 대해 김 대장은 펄쩍 뛰었다 한국팀은 K2에 가기 전에 이미 8500m급 등정을 마쳐 고소적응을 완벽히 한 상태라는 것. 특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모험을 했던 외국팀과 달리 마지막 순간에는 산소를 사용해 내려올 수 있는 체력을 충분히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외국인들이 오히려 고소적응도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무모하게 무산소 공격에 나서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주장했다.

 

보틀넥을 오를 때도 시간이 많이 걸렸을 뿐 아니라 내려올 때는 로프까지 없어 한국 팀의 하산까지 더불어 늦어졌다는 것. 등산 기술면에서도 K2의 캠프1 캠프2 구간과 흡사한 시샤팡마 남벽이나, 로프도 없고 급경사 구간인 로체의 마지막 캠프에서 정상에 이르는 구간 등을 이미 거쳤기 때문에 K2의 어느 구간에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고 했다. 경험 면에서도 김 대장은 이번 K2 등정이 8000m급 9번째 등정이기 때문에 외국 팀보다 나으면 나았지 부족하다는 것은 얘기도 안 된다고 했다.

 

대원들을 컨트롤하는 것도 20년간 히말라야 원정을 해왔기 때문에 미숙할 수가 없다고 했다. 여성인 고미영 씨가 동반한 것에 대해서도 김 대장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고 씨는 전직으로 등산을 하고 있어 매일 철저한 훈련을 한다. 다른 일을 하면서 등산을 하는 외국인들이 하는 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훌륭하다.” 그가 고 씨의 매니저 겸 파트너이자 카메라맨까지 맡은 것도 8000m급 5개를 함께 하면서 충분히 능력을 검증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 글 / 장진건 매일경제 블로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