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 한 강 과 문 화 [1] *-

paxlee 2009. 2. 23. 13:25

                        한강의 발원지는 검용소이다.  

 

남한강(南漢江)은 강원도 태백시의 금대봉 북쪽 계곡 검용소에서 발원한 하천으로서 삼척시 하장면 부근에서 골지천(骨只川)이라는 이름으로 북쪽으로 흐르다가 석병산(1,010m)에서 발원한 임계천과 합류해 서류하고, 오대산에서 흘러나오는 오대천을 정선군 북면 여량리에서 황병산(1,407m)을 발원지로 한 송천과 만나 조양강이 되어 흐르다가 오대천과 합류한 후 남류하여 동강과 합류하여 남한강 본류를 이룬다. 영월읍에서 평창강과 주천강이 합류해 만들어진 서강과 만난 후 흐르다가 충주시에서 달천, 강원도 원주시와 경기도 여주군 부근에서 섬강·청미천과 만난 후 양화천·복하천·흑천 등의 지류를 합친 후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만난다.

 

북한강(北漢江)은 강원도(북한) 금강군의 옥밭봉(玉田峰 : 1,240m)에서 발원해 금강산의 비로봉 부근에서 발원하는 금강천(金剛川)·사동천(泗東川) 등을 합치면서 북한강 본류를 이루어 남쪽으로 흐르는데, 춘천에서 소양강, 가평 남쪽에서 홍천강 등의 주요지류와 합류한다. 양수리에서 시작되는 한강 본류는 남한강의 유로와 같은 방향, 즉 북서쪽으로 계속 흐르면서 왕숙천·탄천·중랑천·안양천·굴포천 등의 작은 지류를 합치며, 하구에서 다시 임진강과 만난 다음 경기만에 흘러든다.

 

〈한서 漢書〉 지리지에는 대수(帶水),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는 아리수(阿利水), 〈삼국사기〉의 백제건국 설화에는 한수(寒水/漢水)로 되어 있으며, '漢'이라는 글자는 중국문화가 도입된 이후에 붙여졌다. 한강은 조선초에 수도를 한성(漢城)으로 옮긴 이래 내륙수로로 중요하게 이용되어 마치 국토의 대동맥과 같은 구실을 해왔다.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한강의 기능도 크게 변화해 오늘날에는 내륙수로로서의 기능은 사라지고, 수도권의 수자원(水資源)으로서의 중요성이 매우 커졌고, 관광·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한강의 발원지는 지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1987년 국립지리원에서 물길의 길이를 측정한 결과 금대봉 아래인 태백시 창죽동 산 1-1번지의 검용소(儉龍沼)이다. 그러나 문화적 관점에서 보자면 오대산의 서대에 있는 작은 샘인 우통수(于筒水)로 보는 견해가 있다. 우통수의 존재를 처음 기록을 남긴 것은 삼국유사이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만들어진 지리서나 문인들의 시와 기문에도 우통수는 한강이 시작되는 샘으로 혹은 차를 달이는데 더 없이 훌륭한 물로 꼽히고 있다. 또 다른 견해는 고목나무샘을 지칭하기도 한다. 한강의 총길이는 514km이다. 

 

검용소는 검용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서해바다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되고자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가장 먼쪽의 상류 연못을 찾아 헤매다가 이곳이 가장 먼 상류의 연못임을 확인하고 이 연못에 들어가 용이 되려고 수업을 하였다. 그때 이무기가 연못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부림 친 자국이 지금의 검용소에서 쏟아지는 폭포인 것이며 이무기는 심심하면 인근에서 풀을 뜯다가 물을 먹으러 오는 소를 잡아 먹어 동네사람들이 이 연못을 메워 버렸다고 한다.

 

둘레 20여m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용소는 석회암반을 뚫고 올라오는 지하수가 하루 약 2천t정도 솟아 오르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흐른 물줄기 때문에 깊이 1-1.5m, 넓이 1-2m의 암반이 푹 파여서 물이 흐르는데 용틀임을 하는 것과 같으며 솟아나온 물이 곧바로 20여m의 폭포를 이루며 쏟아지는 광경은 가히 장관이다. 검용소에서 나오는 물을 검용이 내뿜는 물줄기라 하여 검용수라 하는데 한강수계에서 가장 깨끗하고 찬물이다. 사계절 9°C정도로 주위의 암반에는 물이끼가 푸르게 자라고 있어 신비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한반도의 젖줄 한강의 발원지임을 자랑하며 오늘도 서해를 향해 계속 흐르고 있다.

 

 

 

삼국시대의 한강

 

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한강유역의 득실이 나라의 흥망성쇠와 지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한강유역이 반도의 중앙부를 축으로 관류하는 큰 강인 만큼 한반도의 중심무대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군사, 경제, 사회, 외교적 제조건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 지역이 삼국쟁패의 주요 과녁이 되었고 한강유역을 점유한 국가는 영토적 확장과 더불어 국가발전의 강력한 터전을 마련한 결과가 되었다. 결국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유역을 번갈아 지배했던 사실을 전 역사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한강유역을 점유하면 나라가 번영하였고 상실하면 쇠퇴하였다.
    
고려시대의 한강

 

송악의 호족 출신인 왕건은 918년 왕이 되어 고려를 건국하고 935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문종 21년에 한강유역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당시 양주(현 서울)를 남경으로 승격시켜 개경 및 서경과 함께 3대요지가 되었다. 이후 고려말 1382년(우왕 8년) 9월에 한양천도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왜군의 창궐, 대명관계의 복잡성등 정치,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고 풍수지리설이 성행하자 도읍이 불길하다 하여 이듬해 2월에 개성으로 돌아왔다.

 

고려왕조 마지막왕인 공양왕때(1390년 9월) 다시 한양천도를 단행하였으나 한양천도가 있은 후 큰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일어나고, 인축이 동사했으며 신도의 문화부에 큰 범이 뛰어들어 사람을 물어가는 등 불길한 일이 자주 발생하자 1391년 2월에 다시 개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고려로서의 한양천도 문제는 종말이 맺어지고 그 완전한 실현은 1394년(조선태조 3년) 이성계에 의해 이루어 졌다.
    
조선시대의 한강

 

태조 이성계는 즉위후 불과 16일만인 1392년 8월 3일에 도평의사사에게 한양천도를 명하여 태조3년(1394년) 10월 25일(음력) 천도를 실현하였다. 한양천도의 배경은 다음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주지하는 바와 같이 풍수지리설에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는 점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개경의 지덕이 쇠패한 땅이라 망국의 수도를 하루라도 빨리 피하려는 미신적 사상인 음양지리(풍수)적 사상에 영향받아 천도를 서둘렀다는 지적이다.

 

둘째, 태조 이성계 자신이 왕위획득과 관련되는 행위에 대한 가책과 개성의 왕씨를 중심으로 한 구가세족의 반발에 대처할 필요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정황은 태조 이성계로 하여금 천도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게 하였다. 셋째, 한강을 끼고 한양의 인문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을 들 수 있다. 한 왕조가 도읍지를 선택할 때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선 지리적인 위치를 고려하고 있음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양은 지세가 훌륭하고 군사적인 방위에 있어서 천연의 요새지였다.

 

이러한 지세의 훌륭함은 일찍이 이중환도 그의 「택리지」에서 한양의 진신인 삼각산이 수려하고 맑기가 나라 안에서는 사산중의 하나라고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전근대사회에 있어서 국가재정의 운용을 위한 수입은 거의 농업생산물에 의지하고 있었다. 농업경제가 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상태에서는 현물을 조세로 수취하였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세곡의 운송에 큰 관심을 가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도로망을 포함하여 육상교통 수단이 별로 발달하지 못했던 까닭에 조세는 주로 대량수송이 용이한 조운을 통해 운송되었다. 그러므로 도읍지로서의 위치는 수륙의 교통이 편리한 곳에 있어야 함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지리적 위치 등을 고려하여 선택한 한강을 끼고 있는 한양은 천도때부터 조운의 발전은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전국의 세곡이 조운을 통하여 한강에 모였고, 한양에 거주하는 지주층이 지방농장에서 거두어 들인 소작도 대부분 선박으로 이곳에 운반되었다.

 

도성내 일반 생활품도 그 양이 많은 것은 대부분은 선박으로 한강을 통하여 공급되었다. 그리고 조선후기에 이르러 세제개혁과 아울러 대동법이 실시됨에 따라 한강은 더욱 중요성을 더하게 되었으며, 호남을 비롯하여 충청도 등지에서 수납되는 대동미는 조운선을 통하여 한강으로 수송되었다. 따라서 한강은 백관의 녹봉과 국가재원을 충당시켜 보급로가 되었다.
    
근세의 한강

 

한강변에 입주했던 최초의 외국인은 프랑스인 신부들이었는데 1887년 현 원효로4가 1번지의 6,500평의 땅을 구입하여 신학교를 건축하고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한강에 증기선이 최초로 운항한 것은 1888년이었는데, 그 뒤 1890년 독일계와 미국계의 증기선이 취항하게 되었고, 이어 중국인 거상 동순태가 100톤짜리 증기선을 들여와 용산과 인천사이를 취항하기 이르렀다. 1899년 착공한 한강철교공사는 다음해인 1900년에 완공,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철교가 놓여졌다.

 

그리고 길이 26마일의 서울역에서 인천을 잇는 경인철도가 1900년에 개통되었다. 그리고 한강에 최초의 인도교가 가설된 것은 한일 합방 6년뒤인 1916년이었고, 새 인도교는 1934년에 착공하여 1936년에 완공되었는데 폭 20미터에 길이는 10,005미터였다. 한강에 큰 홍수가 있었던 때는 1912년과 1920년, 1925년의 세차례였다,. 그 가운데 가장 큰 피해를 낸 것은 1925년(을축)대홍수로 7월 15일에서 18일까지 4일간에 걸쳐 400에서 500밀리미터의 높은 강수량을 보였다.

 

노도와 같은 홍수물은 한강 제방을 무너뜨리고 순식간에 용산, 남대문 앞 까지 일대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현재 올림픽 주경기장이 위치한 잠실동과 신천동은 부리도(浮里島)라 불리는 하중도(河中島)였다. 이 섬은 오랜 세월 동안 흐름이 약간씩 북서류하게 됨으로써 생겨난 섬이다. 1970년 4월, 북쪽 하도를 넓게 하고 남쪽의 하천을 폐쇄함으로서 하중도를 육지화하는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대역사는 100만 평이 넘는 공유 수면 매립공사가 주축이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그 주변 340만평의 광역 구획정리사업이 동시에 실시되어 1975년에 마무리 되었다. 이개발로 인해 남류하던 흐름이 폐쇄되면서 만들어진 호수가 하적호(河跡湖)인 석촌호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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