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 서울의 산 [11] *-

paxlee 2009. 4. 9. 00:09

   

- 4.  낙산(駱山) (1) -

 

- 낙산 정상의 낙산공원 -

 

낙산은 종로구 이화동, 동숭동, 창신동, 동대문구 신설동, 성북구 보문동, 삼선동에 걸쳐있는 산으로 산의 모양이 낙타와 같다하여 낙타산(駱駝山), 낙산(駱山), 타락산(駝駱山)이라 하기도 했다. 낙타는 속칭 약대라 하는데, 이산 중심부 125m 고지가 약대의 등과 같이 솟아 있기 때문에 분여진 이름이다. 낙산에는 낙타유방에 해당한다는 두곳의 약수터가 있었다. 이화동약수와 신대약수로 옛날에는 사시사철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낙산은 조선 초 도성을 수축할 당시 경복구의 동쪽에 위치하여 주산인 북악의 좌청룡이 되었다. 따라서 성곽이 그 능선을 따라 수축되었는데, 주봉의 북쪽 끝은 홍화문(혜화문)이, 남쪽 끝은 흥인문이 각각 설치되었다. 낙산은 한양도성의 동산으로 서쪽의 인왕산과 대치되어 조선 명종 때 학자 남사고(南師古)가 동으로 낙산, 서로 아현을 가리키며 반드시 붕당이 생길 것이라 하였다. 낙산은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전에는 숲이 우거지고 깨끗한 수석과 약수터가 있어 산책로롤 많이 이용되었다. 효종 때 황의 아우 인평대군의 거소인 석양루(夕陽樓)를 비롯하여 이화정(梨花亭), 영조때의 문인 이심원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등은 왕족, 문인, 가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또한 낙타유방의 약수가 있던 낙산 서쪽 산록의 쌍계동은 암석이 기이하고 수림이 울창하며 맑은 물이 흐르는 절경으로 삼청, 인왕, 백운, 청학과 더불어 도성ㅇ 내 5대 명승지로 꼽혔다.

 

근세에는 만국평화회의 에 참여한 헤이그밀사 이상설으 별장이 낙산에 잇어, 이곳에서 고종의 명령을 받고 일제의 강제적 외교권 박탈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자 네덜란드로 따나기도 하였다. 또 1926년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이 낙산을 주산으로 동숭일대에 위치 하였었다. 광복 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1947년 이화동 1번지에 이화장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낙산은 비록 높이는 낮으나 모습은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고 잇어 많은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현대사의 진행과정 속에서 산 중턱까지 아파트가 들어서고 산 정상까지 서민주택이 들어섰으며 도로가 개성괴어 있다. 낙산삼거리가 형성되어 마을버스가 운행되는 등 산으로서의 모습은 찾기 힘들 정도로 변화를 하였다. 단지 정상에 노인정과 낙산근린공원에 휴양시설이 있어 서울 도성안을 전망할 수 있을 뿐이다. 낙산 정상에서 한 지맥이 뻗어 숭인동 58번지 일대에서 95m 높이의 산봉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마도 주산인 북악산아래 청와대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좌청룡인 낙산이 정상까지 주택가가 형성하고 정상은 낙산공원으로 되어 있어 낙산이 좌청룡의 역할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게 된 것에 원인이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원인이라면 역대 서울시장이 낙산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주택가가 형성되도록 방치한 것을 유념해야 갈 것 같다.

  

 

 

 - 낙산 정상 낙산공원을 왕래하는 마을버스 -

 

1. 사적과 문화재

 

1) 도성(都城)

 

      - 낙산 서울성곽 -

 

2) 삼군부 총무당(三軍府總武堂)

낙산의 동쪽 기슭 삼선동1가 한성여고 옆 삼선공원에 서울특벽시 유형문화재 제37호인 삼군부총무당이 있다. 이 건물은 고종 5년(1868)에 건립된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본당이었던 총무당으로서 당초 광화문 앞 서쪽 현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었다. 조선 말기의 전형적인 관아 건물로 서울에 있는 관아에서 흔히 보이는 양식으로 되어 있다. 총무당은 그 좌우에 청헌당(淸憲堂)과 덕의당(德義堂)이 있었다. 

 

덕의당은 그 흔적조차 없어졌고, 청헌당은 1967년 광화문의 현 정부종합처사 신축 때 육군사관학교 교내로 이전되었다. 삼군부 청사는 고종 17년(1880)에 통리기무아문의 청사가 되었다가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 이후로는 시위대 청사로 사용하였고 , 1910년 이후에는 일제의 조선보병대사령부로 사용되었다. 그후 1942년 경기도 공무원연성장으로 사용되다가 서울시 직업훈련원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3) 이화장(梨花莊) 

 

 

 

낙산 서남 기슭 이화동 1번지에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6호 이화장이 있다. 1945년 10월 16일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이승만이 기거할 집이 없어 돈암장과 마포장 등에 옮겨 살면서 불편한생활을 하였다. 이에 뜻있는 인사들이 1947년에 이화장을 사서 이승만에게 기증 하였다. 이화장은 이미 조선 중종 때 배밭 가운데 지어진 정자로 봄이면 주위가 온통 하얀 배꽃으로 뒤덮였던 이화정이란 정자가 있었던 곳이다. 이승만은 이화장에 살면서 대통령 재임중 가끔 들러 정원과 뒷산을 산책하였다.

 

1960년 4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28일에 이화장으로 이사하였으며, 5월 29일 화와이로 요양차 떠났다. 이화장은 5.500평방메터의 넓은 대지에 몸채인 ㄷ자형 한옥과 조각당 등 부속건물로 이루어진 저택이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설던 본관은 1930년대 건축의 한옥 기와집으로 1988년에 기념관으로 개관하여 역사자료 및 평소에 사용했던 가구와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본채와 부속건물, 정원, 산책로와 이대통령의 유품은 1987년 무궁화여성동우회와 유족에 의해 공개되고 있다.

 

4) 자지동천(紫芝洞泉)   

 

- 낙산의 지주동샘 -

 

자지동천은 낙산 동쪽 줄기 종로구 창신동 9번지에 위치한 샘물이다.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서 귀양살이 할 때, 단종왕비 정순왕후 송씨가 불가(佛家)에 입문하여 청룡사에 머물렀다. 이때 곤궁한 생활을 돕기위해 비단에 자주물을 들여서 댕기, 저고리깃, 고름, 끝동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자지란 뿌리가 자주빛을 띠는 풀 지치를 말한다. 단종비 송씨는 청룡사에서 300여m 떨어진 바위 밑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에 비단을 빨아 자주색 물을 들였다.

 

이렇게 자주물을 들여서 바위 위에 널어 말렸으므로 이 바위를 '자주바위'라 하고, 바위 밑에 있는 샘물은 '자주우물'이라 하였으며 , 마을 이름도 자줏골, 자주동이라 불렀다. 현재 화강암 바위에 '紫芝洞泉(자지동천)' 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바위 밑 틈으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인근에는 단종과 정순왕후에 얽힌 명소로 청룡사, 동망봉 등이 있다.     

 

5) 비우당(庇雨堂)  

 

- 낙산의 비우당 - 

 

창신3동 숭인동 5번지 일대를 '우산각골'이라 한다. 이곳에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수광은 '지붕유설(芝鵬類說)을 저술하였다. 낙산의 한지맥인 우산각골의 작은 산봉인 지붕 아래에 비우당을 마련하고 민족의 자존을 일깨우고 지도층의 정신개혁과 솔선수범을 촉구하는 실학을 일구었다. 이 비우당은 원래 조선 태조 때부터 세종까지 4대 35년이나, 정승을 지낸 유관(柳寬)의 집터였다. 그는 나라에서 받은 녹봉은 인근 동네 아이들의 붓과 먹값으로 쓰거나 다리를 놓고 길을 넓히는데 썼다.

 

따라서 자신의 집 지붕은 고치지 못하고 방안에서 과거급제 때 하사받은 우산을 받치고 비를 피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산각골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던 것이다. 유관이 설던 집터는 그후 그의 외증손으로 호조와 예조판서 등을 두루 지내면서도 '옷은 몸을 가리는 것으로 족하고, 밥은 장차를 채우는 것 만으로 족하다'는 철학을 몸소 실천한 이희검(李希儉)이 어어 받았다. 이희검의 아들 이수광은 '庇雨堂記(비우당기)'를 지어 당호를 짓게 된 동기롸 인근 지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2. 낙산의 사찰(寺刹)

 

가) 청룡사(靑龍寺)

 

                                 - 낙산 청룡사 대웅전 - 

 

숭인동 17번지에 위치한 청룡사는 그 동북쪽 고개너머에 있는 보문사 보다 43년 후에 세워졌으므로 '새절승방'이라 부른다. 고려 태조 5년(922)에 도선국사의 유언에 따라 왕명으로 창건하고 한양의 외청룡 산등성이에 지었다고 하여 청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제1세 주지로 혜원(慧圓)이 절을 맡은 이래 줄곧 비구니들만이 있었다. 조선건국 후 이제현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망국의 슬픔을 안고 스님이 되어 이 절에 있었다. 

 

1405년 무학왕사가 상와을 한양에 모셔오자 그 사례로 왕사가 머물던 청룡사를 중창케 하였다. 세조 때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 떠날 때 정순왕후 송씨와 이정의 우화루(雨花樓)에서 애끓는 이별을 하였다. 송씨는 스님이 되어 이곳 가까운 동망봉에 초가 암자를 짓고 남은 여생을 보냈다. 청룡사는 연산군 때 폐사되었다가 중종 7년(1512)에 법공이 중창하였다. 이와 같이 청룡사는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나) 미타사(彌陀寺)

동망봉 북쪽 기슭에 위치한 미타사는 '탑골승방'으로 잘 알려진 여승들의 사찰이다. 미타사는 고려 광종 원년(950)에 혜거(慧居)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충숙왕 원년(1314)에 혜감국사에 의해 중건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세조3년에 단종비 정순황후 송씨에 의해 3차 중수가 있었다. 이곳에는 조성 시기를 알 수 없는 6층으로 된탑이 있느느데 위 3층과 아래 3층이 시대를 달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 3층의 조성시기를 고려 때로 보고 있으며, 탑골승방의 이름이 유래된 고탑이 부재로 보고 있다. 한편 탑골승방은 1927년 최상덕이 중편소설 "승방비곡" 이곳에서 집필하여 그 연고가 더욱 깊다.

 

다) 보문사(普門寺)

보문사는 동망봉 북쪽 기슭 성북구 보문동3가 168번지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보문동의 동명이 유래되었다. 일찍이 고려 예종 10년(1115)에 담진(曇眞)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후 여러 차례 중수되었는데, 옛 건물로는 영조 때 건립된 대웅전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절이 황폐할 지경에 이르렸지만, 광복과 함께 주지 송은영이 불교의 중흥과 건물 중건에 힘써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아나가 1972년 대한 불교 보문종으로 등록하여 동양 유일의 비구니종단을 운영하게 되었다. 보문사는 스님들의 범패와 더불어 전통사찰로서 그 면모를 이어가고 있으며, 1972년에 축조된 경주 석굴암을 본뜬 석굴암이 있다.

 

                 - 참고자료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간 '서울의 산.에서 / 사진제공 / 진국의 상상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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