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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트레킹 코스| 김포 첫째 길] (1) *-

paxlee 2010. 8. 25. 22:14

 

           [DMZ 트레킹 코스| 김포 첫째 길]

         조선시대 포진지 ‘덕포진’ 명승으로 거듭나

DMZ(Demilitarized Zone·비무장지대). 전쟁의 상흔을 그대로 간직한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DMZ는 수십 년간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통제된 지역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만의 공간으로 거듭나, 세계적인 생태 보고(寶庫)로 주목받고 있다. 그 세계적인 생태보고를 바로 옆에서 걸으면서 볼 수 있도록 ‘DMZ트레킹코스’ 만들어졌다. 격세지감이다.

DMZ는 서해안의 임진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강원도 고성에 이르기까지 총 248㎞에 달한다. 한반도 허리를 비스듬히 가르고 있다. 백두대간과 한북정맥의 큰 산줄기가 DMZ를 가로지르고, 임진강과 한탄강, 북한강 등 주요 강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 서해로 빠져든다. 한반도의 가장 중심지역인 DMZ를 선보이는 트레킹코스는 김포, 고양, 파주, 연천 등 경기도의 4개 시군을 거쳐 가도록 개통했다.

 

김포시엔 3개 코스 38.4㎞가 이어져 있고, 고양엔 2개 코스 24.5㎞, 파주엔 4개 코스 56.3㎞, 연천군엔 3개 코스 62.2㎞ 등 12개 코스 총 181.4㎞로 연결돼 있다. 김포의 대명포구에서 출발한 트레킹 코스는 고양~파주를 거쳐 경원선 남한의 종점인 연천군 신탄리역 ‘철마는 달리고 싶다’ 이정표 앞에서 끝이 난다. <박스 참조>

이 중에서 가장 접근성이 좋고, 역사성이 있으며 동시에 교통도 편리한 김포 첫 코스를 이번달에 소개하고, 다음호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고 임진강의 주상절리를 감상할 수 있는 연천의 두 개 코스를 소개한다. 먼저 김포 첫째 길이다. 첫째 길은 대명항~덕포진~쇄암리 신촌~김포CC~문수산성까지 이어지는 총 15.4㎞의 거리다.

한반도 최초의 벼 재배지로 알려진 김포에서, 육지의 최북단 항구로 알려진 대명항에서 출발이다. 대명항은 한국관광공사 추천 겨울바다 7선에 꼽혔을 정도로 주변이 아름다운 경치로 둘러싸여져 있다. 항구에 도착하니 역시 신선한 바다 향기가 코를 스쳐 지나간다. 드넓은 바다를 보는 순간 가슴마저 시원해진다. 

첫째 길 입구 주변은 아직 공사를 하는 듯 다소 어수선하다. 동행한 경기 2청 특별대책지역과 한태우씨가 “지금 한창 함상공원을 조성 중이며, 올 8월 완공과 동시에 개장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럴 듯한 함정이 철제 울타리에 가려져 있다. 철제 울타리가 벗겨지고 함정이 모습을 드러내면 그것만으로도 볼만할 것 같다.

함정은 주변의 특색을 살린 해병대 상륙함정이라고 한다. 1944년 제작된 함정은 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하고, 한국전이 끝난 직후 1955년 우리 해군이 인수해 월남전에 7회나 참전하는 등 62년간의 임무를 완수한 한국군 현대사와 궤를 같이한 함정이라고 소개했다. 

함상공원 바로 옆 들머리는 철책문에 들어가는 것으로 길은 시작된다. 다소 긴장감이 들지만 이내 익숙해진다. 문을 들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름다운 길이 연속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덕포진 언덕길에 한쪽은 바다, 한쪽은 들판이 시원스레 길을 열고 있다. 



덕포진은 한양으로 통하는 바닷길 요충지

덕포진, 이름만 들어도 뭔가 있을 것 같다. 덕포진은 조선시대 진영으로, 한양으로 통하는 바닷길의 요충지였다. 마주 보는 강화도의 초지진과 김포의 덕포진 양쪽에서 외적의 침입을 포로 쏘며 저지하는 군사진영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한강과 임진강 수로침입을 막기 위해 조선 선조 때 창설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구한말엔 강화만을 거쳐 서울로 진입하려는 미국(신미양요)과 프랑스군(병인양요)과 치열한 공방을 벌였던 지역으로 역사적 가치와 유물사적 의의가 있는 곳이다. 지금 사적 제292호로 지정돼 있다.

잠시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1866년은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펴면서 천주교를 박해할 즈음이다. 급기야 대원군은 프랑스 신부들을 포함하여 수천 명의 천주교도를 국가 기강을 해이하게 한다는 명목을 씌어 처형했다. 프랑스는 이 사건을 빌미로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을 조선에 급파해 한 달 동안 강화도를 점령하고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를 빼앗아 갔다.

 

이때 이들이 약탈해 간 귀중한 유물이 지금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외규장각 도서 일체다. 조선군대는 덕포진에 진을 치고 프랑스군과 대치한 끝에 결국 프랑스군이 철수했다. 이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다.

1871년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다 평양 주민과 충돌하여 셔먼호가 불에 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신미양요가 일어났으며, 미국은 5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를 공격하고 초지진을 점령했다.  

두 사건 다 덕포진과 마주 보는 강화 초지진을 외국군에 내줬으며, 덕포진은 우리 군대가 외국군과 대치하는 해상 군사요충지로 중요한 역할을 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역사의 현장은 온데간데없고 포진지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덕포진을 걷다 보면 먼저 7개 포대가 강화도 남장포대를 향하고 있다. 조금 더 가면 5개 포대가 강화 초지진과 맞서 있다. 마지막으로 3개 포대가 강화 초지진과 남장포대를 향해 있다. 해상로를 이용해 침입해 오는 적을 강화도 초지진과 합심해서 양쪽에서 포를 쏘아 바다에서 섬멸하겠다는 전략으로 조성된 진영이다.

마지막 포대진지 가기 전에 파수청이 있다. 파수청은 각 포대에 공급할 불씨를 보관하던 장소다. 이 파수청에서 각 포대진지로 부랴부랴 불씨를 실어 날랐던 것이다. 파수청 바로 옆에 있는 이정표에는 그 역사적 사실을 간략하게 전하고 있다. ‘(전략) 이 건물은 포대와 돈대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포를 쏘는 불씨를 보관하는 장소인 동시에 포병을 지휘하던 장대로 생각된다.’

이 조그만 길의 현장에서도 한국사의 비극이 그대로 몸으로 전해졌다. 덕포진의 역사는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수십 년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내버려져 있었다. 단절된 역사를 김포의 열성적인 향토사학자가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떠올렸다. 그 당사자가 지금 덕포진 문화해설사로 있는 김기송씨다. 그가 아니었으면 덕포진과 파수청은 아직 땅 밑에 묻혀 있을지 모른다.

김기송씨는 군에서 제대한 지 얼마 안된 1970년 초 할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손돌묘를 찾으러 다녔다. 그즈음 경기도 공보실장으로 있었던 이재곤씨로부터 덕포진에 대한 역사적 사실도 들었다. 손돌묘와 비슷한 지역이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다음날부터 사비를 들여 덕포진과 손돌묘를 동시에 찾기 시작했다.

 

문화해설사 김기송씨가 덕포진·파수청 찾아

다행히 손돌묘는 쉽게 찾아 1970년 묘를 복원하고 그해 4월 6일 김포군의 공보실장과 관련 공무원 및 주민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처음으로 성대한 제사를 올렸다. 그러나 덕포진은 문화재 발굴허가가 나지 않아 작업을 중단해야 했다. 그렇게 9년의 허송세월을 보냈다.

김기송씨는 그대로 있지 않았다. 끈질긴 설득으로 9년 뒤인 1980년 문화재청 전문위원들과 함께 드디어 덕포진과 파수청을 발굴해 내는 개가를 올렸다. 문화재청에서는 1981년 8월 20일 사적 제292호로 지정하고 유물까지 발굴한 뒤 원형 복원공사를 끝냈다. 당시 중·소포 6문과 포탄 7개, 조선시대 화폐인 상평통보 2개가 출토되었으며, 건물터 안에는 주춧돌과 화덕도 있었다.
 
발굴된 6문의 대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2문, 덕포진 유물전시관에 2문, 전쟁기념관에 1문, 독립기념관에 1문씩 보관 중이다. 하마터면 영원히 묻힐 뻔한 우리의 역사가 열정의 향토사학자인 김기송씨 개인의 노력에 의해 다시 세상의 빛을 본 것이다. 그의 이름은 김포시에서 발간한 책자 곳곳에 등장한다.

김기송씨는 “우리 역사를 우리가 찾지 않으면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다”며 “어릴 적 할머니와 주변으로부터 들은 얘기를 끝까지 추적해 결국 찾아낼 수 있었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그는 “누군가 끈질기게 찾으면 어떤 역사적 현장도 못 찾을 게 없다”고 덧붙였다.

지금 길을 걸으며 그 역사와 역사를 찾는 한 인간의 열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그의 열정을 생각하니 아름다운 길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한쪽 방향으로 철책이 있지만 바다를 끼고 도는 길은 더할 나위 없이 여유롭다. 철책 안으로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지역이라 거칠지만 아름답게 보인다. 더욱이 호기심까지 자극한다. 아이러니하지만 전장의 흔적이 지금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아름다운 길로 변해 있다.

덕포진 끄트머리에 고려시대 뱃사공 손돌의 묘가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김기송씨가 발굴했다. 손돌은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피란할 때 뱃길을 잡은 뱃사공이었다. 묘지가 있는 바로 앞 바다는 물살이 센 곳이라 험한 물길에 불안을 느낀 왕은 뱃사공이 몽골의 사주를 받아 이 길로 인도한다고 의심해 그의 목을 베라고 어명을 내렸다.
 
손돌은 마지막으로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워 그 바가지를 따라가면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뒤 죽임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손돌을 죽이고 바가지를 따라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한 왕은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고 장사를 성대하게 치른 뒤 사당을 세워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넋을 위로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은 바다의 물살이 빠른 여울목에 해당한다. 한국에서 물살이 가장 빠른 울돌목(명량해협) 정도는 아니지만 가끔 소용돌이를 동반한 물살이 치는 험난한 뱃길이다. 손돌의 이름을 빌려 이곳을 손돌목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까지 영호남 지방에서 거둔 세곡(稅穀)을 한양으로 운송하던 주요 해상로였고, 인천 앞바다에서 마포나루까지 올라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다.

▲ (위) 수십 년 만에 일반에 개방한 DMZ트레킹 코스를 찾은 방문객이 철책길을 따라 걷고 있다. 바로 밑에는 삼성그룹 방송팀이 코스를 촬영하고 있다. 멀리 배경에 보이는 다리가 강화와 김포를 잇는 초지대교이다.(아래) 덕포진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 따라 난 아름다운 곡선길로 방문객들이 걷고 있다. 언덕 왼쪽 사면 조금 파인 홈이 바로 포진지.
 
들길·산길·둑방길·철책길·해변길 등 고루 걸어

손돌목을 지나 넓은 평야가 나왔다. 김기송씨는 이 평야 일대와 덕포진을 묶어 교육·레저·생태 종합관광단지를 조성할 예정이라고 했다. 조감도까지 보여줬다. 전통과 테마, 미래가 공존하는 ‘관광도시 김포’의 조감도였다. 아직 토지를 매입한 것은 아니지만 점차 이행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젠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드넓은 평야엔 학들이 날아들어 즐겁게 노닐고 있다. 시간이 멈춘 세계인 듯하다. 평화와 여유가 공존하는 세상이다. 그 샛길로 시간과 함께 스쳐 지나쳤다. 바쁜 인간의 모습이다. 조그만 포구가 나왔다. 철책 안에 있지만 어업허가 받은 사람은 수시로 출입이 가능하고, 초소에 얘기하면 일반인도 잠시 안에 들어가 구경할 수 있다.

조그만 방파제까지 가까이 접근했다. 마침 썰물 때였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건강한 갯벌이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 갖가지 꾸물거리는 생물들을 볼 수 있었다. 갯벌엔 조그만 구멍들이 송송 뚫려 있었다.

바로 앞엔 조그만 섬이 하나 있다. 훌쩍 뛰면 닿을 것 같은 지척이다. 또 다른 방향의 지척엔 갈대숲이 우거진 멋진 생태갯벌이 다소곳이 모습을 보여줬다. 규모는 작지만 순천만 갯벌에 버금갈 수준이었다. 예산만 있다면 나무데크로 연결시켜 훌륭한 생태코스로 만들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조그만 섬은 이미 대기업의 사유지가 됐다고 한다. 그 섬이 바로 부래도이다. 한강에서 떠내려 왔다고 해서 부래도라 이름 붙었다고 한다. 그만큼 작은 섬이다. 면적이 20,000㎡ 정도 되며, 섬에는 조그만 성터도 남아 있다.

포구를 빠져나왔다. 민통선 철책 따라 길은 계속된다. 철책길을 벗어나 마을길로 들어섰다. 길 양옆으로는 모내기를 끝낸 벼들이 쑥쑥 자라는 듯했다. 쇄암리 마을정자에 도착했다. 쇄암(碎岩)이라는 마을이름은 해안이 잘 부스러지는 바위로 이루어져서 붙여졌다고 한다. 옛날엔 그냥 나무그늘 아래서 쉬던 쉼터가 지금은 정자로 단장했다. 한낮이라 그런지 농부들이나 사람들이 전혀 눈에 띄질 않는다.

해안선을 따라 잠시 걷다 야트막한 산길로 접어든다. 마침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웠다. 시원했다. 길은 약 50m마다 리본이 달려 있었다. 리본을 찾아 계속 따라가면 된다.

산길 왼쪽으로 무덤들이 연속으로 이어졌다. 예부터 있던 묘들이며 공동묘지는 아니라고 했다. 한태우씨는 “아마 여기가 옛날부터 이름난 명당자리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분명 무슨 곡절이 있지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공동묘지도 아닌데 이렇게 많은 묘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묘지를 지나 해안선을 따라 걷는 길이다. 지나는 길에 바다가 보이는 위치에 ‘언덕 위에 하얀 집’ 같은 아담한 집이 나온다. 가수 윤수일의 집이라 한다. 팬들을 피해 조용한 해변에 거처를 마련한 듯한 윤수일씨는 앞으로 DMZ트레킹코스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다시 거처를 옮겨야 할지 모르겠다.

- 글 박정원 부장대우 / 사진 정정현 부장 / 월간 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