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다양한 문화

-* 산티아고 순례길 *-

paxlee 2010. 9. 23. 13:14

                                

-< 세계의 걷고 싶은 길 산티아고 순례길 >->-

 

일에 지치고 사랑에 허기진 당신의 등을 떠밀어 보내주고 싶은 길.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땀 흘렸고, 파올로 코엘료의 삶을 바꾼 길. 그리고 당신과 나, 이름 없는 이들의 비밀을 기다리고 있는 길. 눈물로 떠나 웃으며 돌아오게 되는 길. 그 길의 이름은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의 순례길이다.

 

삶의 흐름을 바꾸기도 하는 공간의 이동

 

살다보면 그런 날이 온다. 다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고, 가던 길을 그냥 가기에는 왠지 억울한 순간.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나이'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그런 날. 꼭 그렇게 절박함이 목까지 차오르지 않아도 괜찮다. 방향타도 없이 떠밀려 온 속도전에서 벗어나 느리게 숨 쉬고 싶을 때, 짧지만 짜릿한 일탈을 꿈꿀 때, 길 위의 자유 그 불온한 냄새가 그리워질 때, 당신은 어디로 향하는가. 공간의 이동이 삶의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는 것을 아는 당신, 몰래 품어온 이름이 있는 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기로 한다. 

 

 

 

 

진한 역사의 향기가 배어있는 길

천 년의 세월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조개껍질을 매달고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온 길이 있다.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였던 야고보(스페인식 이름은 산티아고)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쪽의 도시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로 가는 길이다.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길은 ‘카미노데프란세스(프랑스 사람들의 길)’이라고 불리는 코스. 프랑스 남부의 국경 마을인 생장피데포르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까지 이어지는 800km다. 모든 갈림길마다 노란 화살표와 조개껍질로 방향을 표시해준다. 덕분에 길을 걷기보다 길에서 헤매기 바쁜 길치들조차 최종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다다를 수 있다. 마을마다 있는 '알베르게'라 불리는 순례자 전용 숙소에서 잠자리와 취사를 해결할 수 있어 유럽의 비싼 물가도 가뿐하게 극복할 수 있다. 그 길에는 전설보다 오래된 교회와 십자군 전쟁의 흔적, 성당기사단의 비밀과 마녀로 몰린 여자들의 화형대, 로마시대의 돌길까지 상상력을 자극하는 자취로 가득하다. 진한 역사의 향기가 배어있는 길이다.

 

 

 

 

길이 품은 풍경은 다양하다. 도전 의식을 고취하는 첫 장벽 피레네 산맥을 무사히 넘어 나바라(Navarra)를 지나면 푸른 포도밭이 일렁이는 라 리오하(La Rioja). 스페인이 자랑하는 양질의 와인생산지역이기에 내내 붉어진 얼굴을 피할 수 없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황금빛 밀밭이 지평선을 이루며 펼쳐지는 메세타(Meseta)는 금빛 머리칼을 지닌 누군가를 떠올리며 걷게 되는 고독의 평원. 그 사이 세월의 더께로 반짝반짝 빛나는 돌길이 깔린 옛마을과 위풍당당한 교회를 지나고 양떼들과 함께 걸어가는 푸른 초지와 구릉이 이어진다. 오랜만에 만나는 도시의 풍경이 낯설게 다가오고, 다시 작은 마을을 지나 나무와 숲이 우거진 산을 넘으면 마침내는 바다로 향하는 길목이다. 북유럽 사람들이 그토록 질투하는 스페인의 태양이 지긋지긋해질 무렵, "햇볕을 위해 기도하되, 비옷 준비를 잊지 마라."는 땅 갈리시아(Galicia)에 들어서게 된다. 흩뿌리는 가는 비를 맞으며 참나무 숲길을 걷고 나면 마침내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의 대성당 앞에 서게 된다. 

 

 

나누는 기쁨, 베푸는 행복을 체험하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가 품은 최고의 비밀은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이상하다. 아플 때 약을 나눠주고, 목마를 때 물을 건네고, 배고플 때 밥을 해준다. 지친 다리를 사심 없이 주물러 주고, 냄새나는 발바닥의 물집을 따주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도울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자원봉사 협회에서 파견이라도 나온 듯,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사람들이 여기 저기 가득하다. 잠시 어리둥절했던 당신도 곧 친절 바이러스에 감염돼 나누는 기쁨, 베푸는 행복을 체험한다. 그렇게 만나는 이들을 통해 마음의 빗장이 열리고, 추억이라 이름 붙은 기억들이 쌓여간다.

 

길의 끝에 서면 증명서가 선물로 주어진다. 하지만 그 길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당신 자신이다. 800 km를 걸어가 만나는 대성당에서 천 년 된 돌기둥에 기대어 눈물 흘리는 당신. 삶에 대한 희열과 감사로 압도되는 그 순간을 겪고 나면 세상은 달라 보인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당신은 이미 변해있다. 돌아오는 길,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 문명 전체가 나아가는 방향에 등 돌릴 힘이 당신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길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당신 자신이다

 

이제는 너무 유명해져버렸지만 여전히 영적인 힘을 간직한 길. 작은 배낭 하나에 모든 걸 담아 집을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 삶이 던진 질문들에 정직하고 용감하게 답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된 길. 그러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이 찾아오는 길. 일생에 한 번은 꼭 걸어야 할 순례의 길이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 800 ㎞ 도보순례
 
 
낯선 길을 혼자 걸을 때 가장 큰 장애는? 당연히 안전에 대한 근심걱정이다. 아무리 길이 아름답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특별하다 해도 안전하지 않다면 무슨 소용일까. 그렇다면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안전도는? 설마, 순례자의 길인데… 예전엔 이 길을 걷기만 해도 교황청에서 평생 지은 죄를 다 사면해줬을 정도로 성스러운 길이라는데! 빙고!

단언하건대 세상에 이보다 더 안전한 길을 찾기는 쉽지 않다. 먼 옛날, 처음 이 길에 순례자들이 몰릴 무렵에는 신의 음성을 듣기 전에 다른 목소리를 먼저 들어야 하기도 했다. 찬거리를 찾으며 울부짖는 늑대의 울음소리 혹은 순례자의 여비를 노린 무장 강도단의 살벌한 위협 같은. 하지만 그건 이미 전설로 남은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 이 길은 소심한 A형 여자가 혼자 걸어도 아무 일 없다. 겁쟁이 그녀가 타고난 ‘길치’이기까지 해도 걱정 없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으므로. 노란 화살표나 가리비 조개 모양만 따라가면 산티아고에 도착하게 되니까(야곱의 시신이 배에 실려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 조개들이 그의 몸을 덮어서 보호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가리비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상징이 되었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가는 순례의 길에 위험요소는 따로 있다.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이 지구에서 가장 높은 한국인이기에 더 거부하기 힘든 유혹. 바로 포도주다. 스페인은 유럽에서도 이름난 와인 생산지다. 특히 순례길에서 만나는 라 리오하(La Rioja)와 나바라(Navarra) 지방은 양질의 포도주를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는 곳이다. 당연히 포도주 인심도 후하다. 이라체의 수도원은 길가에 붉은 포도주가 물처럼 흐르는 수도꼭지를 준비해 놓았다. 목마른 순례자들이 환성을 지르며 달려들어 ‘주의 피’를 받아 마신다. 밥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서면 "Agua o vino(물 아니면 포도주)?"라고 묻는다. 물과 포도주가 같은 가격으로 제공되니 자연히 포도주를 선택하게 된다. 스페인의 태양에 그을린 얼굴이 알코올 기운에 다시 붉어지니, 거울 따위는 아예 들여다보지도 말자.

세상의 끝에서 신발을 태운 순례자들이 바다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고 있다.


이 길에는 포도주 말고도 스페인의 토속 음식으로 유명한 마을들이 있다. 로그로뇨(Logrono)에 들어서면 우선 라우렐 골목을 찾아가자. 스페인의 대표적인 간식거리인 타파스를 파는 작은 가게들로 유명하다. 어이없을 정도로 작은 골목이라 찾기가 쉽지 않으니 주의깊게 거리 간판을 들여다보자. 작게 썬 바게트 빵 위에 절인 멸치나 양송이, 새우, 샐러드 등을 올린 타파스를 와인 한 잔과 곁들여 마시노라면 혈관에는 이미 스페인 피가 흐르는 것 같다. 갈리시아 지방 멜리데의 문어요리 ‘뿔뽀’를 빼놓을 수는 없다. 고춧가루와 소금을 쳐 삶아낸 문어의 담백한 맛은 ‘문어의 재발견’이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스페인식 해물볶음밥 빠에야도 갈리시아 지역이 원조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마을들은 저마다 한두개씩의 전설을 품고 있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의 전설을 들어보자. 때는 14세기. 젊고 잘생긴 독일인 청년이 산티아고로 성지순례를 가던 길이었다. 일행은 청년의 부모님과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온 하녀. 주인집 아들에게 연정을 품은 이 하녀. 어느 밤, 저돌적으로 마음을 고백했다. 청년은 냉담하게 모욕을 주며 처녀를 거절했다. 분노와 수치심으로 한을 품은 하녀는 성당의 금술잔을 청년의 가방에 넣었고, 결국 청년은 절도죄로 붙잡혀 교수형을 당하게 된다.

아들을 잃고 슬픔에 빠진 부모는 그래도 산티아고까지 성지순례를 마친다. 산티아고에서 돌아오는 길, 신앙심 깊은 부모는 기적을 체험한다. 바로 십자가에 매달린 아들이 살아 있었던 것. 흥분한 부모는 마을의 신부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리며 아들을 십자가에서 내려달라고 한다. 막 저녁식사를 시작하려던 신부는 부모를 무시하며 답한다. "만약 당신 아들이 아직 살아 있다면 이 식탁의 구운 닭 두마리도 살아 있겠구려." 구운 닭에게 포크를 들이미는 순간, 닭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식탁에서 뛰어내렸다. 아들은 구제되고, 그후 이 마을은 살아 있는 닭 두마리를 성당 안에 보관하는 풍습을 몇백년째 이어오고 있다. 전설은 또 다른 전설을 낳기도 하는 법. 그 닭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산티아고로 가는 길 내내 행운이 함께 한다고 해 닭장을 올려다보며 닭들의 은총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재미있는 건, 옆 나라 포르투갈에도 똑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는 것.

놀기 좋아하는 스페인 사람들이기에 축제를 빼놓을 수는 없다. 길의 초입에서 만나는 팜플로냐. 만약 7월초에 이 마을을 지나가게 된다면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놀아야 한다. 해마다 7월6일부터 1주일간 열리는 산 페르민 축제는 이 작고 오래된 마을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축제다.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는 스페인 사람들의 광기(!)를 체험해보고 싶다면, 소와의 달리기에 도전하자. 매일 아침 8시에 돌이 깔린 좁은 골목길을 소와 함께 달리는 이 축제는 헤밍웨이가 자신의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 소개해 유명해졌다.

가리비 조개 모양의 이정표를 따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길


저녁이 내리면 흰 옷을 차려입고 붉은 스카프를 맨 사람들이 맥주잔을 들이키며 밤새워 인생을 노래한다. 이때 소비되는 알코올의 양은 자그마치 300만ℓ. 해마다 축제 기간 중 수십명의 부상자와 사망자를 양산하는 악명 높은 축제이기도 하다. 단, 축제 기간에 이곳을 찾는다면 압도적인 쓰레기 더미에 먼저 눈이 가 고풍스러운 마을의 아름다움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운이 좋다면 사아군의 마을 축제처럼 주민들 전체가 중세시대 의상으로 분장하고 중세를 배경으로 한 연극을 공연하며 벌이는 작은 축제를 여기저기서 만날 수도 있다. 이테로 델 카스티요 마을의 순례자 전용 숙소인 알베르게는 매일 밤 순례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세족식을 거행한다. 세족식은 그 자체가 가장 뜨겁고도 감동적인 축제다.

순례의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는 스페인이 자랑하는 아름다운 도시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지정문화유산으로 오래된 건물과 돌이 깔린 어여쁜 광장, 장엄한 대성당으로 유명하다. 그곳에는 둘러볼 곳이 너무나 많다. 최소한 사흘은 그 도시에 머무르며 몸과 마음의 휴식을 취한다. 산티아고 역시 해마다 7월25일이 되면 도시 전체가 축제의 무대로 변한다. ‘성 야곱의 날’인 그날은 종일토록 광장에서 공연과 춤판이 벌어지고, 불꽃이 밤하늘을 가른다.

산티아고에 도착해 며칠을 어슬렁거린 후에는 다시 신발끈을 묶고 걷기 시작한다. 사흘간 이어지는 90 ㎞의 길. 또 어딜 걷느냐 항변하겠지만 어쩌면 여기서부터가 진짜 순례일 수도 있다. 로마 사람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던 피니스테레로 가는 길이다. 길의 끝으로 갈수록 길은 저 홀로 아름다워진다. 유칼립투스와 전나무가 우거진 숲을 건너 바다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남해 바닷가의 작은 마을 같은 동네가 나온다. 피니스테레, 그곳은 순례를 마감하며 순례자들이 신발을 태우는 곳이다. 신발이라고는 한켤레밖에 없는 가난한 순례자는 그저 남들이 태우는 신발의 고무냄새를 맡으며 바다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볼 뿐이다. 이미 과거가 된 지난 한달을 뒤로하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꿈꾸며. 그 모든 일들이 끝나면 그때는 돌아오는 일이 남는다." 무수히 떠났으되 결국은 돌아오게 된, 눈물겨운" 일상으로 발길을 돌리게 된다. 이 길을 걸으며 보고, 느끼고, 감동받은 감명은 머리와 가슴에 지울수 없는 각인으로 새겨진다.
 
                      - 출처 / 검정고무신 blog.chosun.com/p8510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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