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이야기

-* 금강소나무숲에서 신선이 되다 *-

paxlee 2010. 10. 23. 22:54

 

                          금강소나무숲에서 신선이 되다

―울진 '길·숲·마을'
'곤장 100대'로 지킨 금강송숲 너머… 굽이굽이 '굴구지마을'

가을의 금강소나무를 만나기 위해 경북 울진으로 달렸다. 설악산에 첫서리가 내린 날이었다. 봄의 숲이 싱그럽다면, 가을의 숲은 치유와 충만의 공간. 일반 소나무보다 3배는 더 촘촘한 나이테 덕에 튼튼하기로 이름난 이 '금강역사(金剛力士)'들이 푸르게 번진 가을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200년 넘게 산 금강송만 8만 그루가 넘는 한국 최대의 금강소나무 군락지다. 그 울창한 보물[蔚珍]을 만끽할 수 있는 울진의 길, 숲, 마을을 각각 추천한다. 금강송의 정기를 먹고 자란 자연산 송이버섯들이 한바탕 잔치를 벌일 울진송이축제(10월 1~3일)는 덤이다.
가을의 숲은 치유와 충만의 공간. 금강역사처럼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울진의 금강소나무에 기대어 도시의 스트레스를 잊는다. 신선이 따로 있나, 산(山)에 들어가면 곧 선(仙)인 것을. /영상미디어 이경호 기자
◆길-두천리 금강소나무숲길

조선시대에는 보부상길로 더 익숙했던 금강소나무숲길을 걸었다. 울진 북면 두천리에서 서면 소광2리까지 13.5㎞다. 산림청에서 처음으로 국비를 투입해 닦은 길이자 국내 숲길 중 유일하게 예약탐방제로 운영하는 길이다. 지난 7월 20일 개장 이후 하루 탐방인원을 80명으로 제한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2400명가량이 다녀갔다고 울진국유림관리소 이상을(56) 계장이 전한다. 바닷가인 울진 흥보장에서 산골인 봉화 춘양장까지는 대략 60㎞, 열두 고개 3박4일 여정이다. 이번 여름에 개장한 13.5㎞ 금강소나무숲길은 이 중 바릿재와 샛재, 저진치, 너불한재까지 고개 네 개를 넘는다.

샛재[鳥嶺] 성황사(城隍祠)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등짐장수와 봇짐장수들이 제발 산도적을 만나지 말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던 곳. 고개 수만큼이나 여러 번 고쳐 지었다는 남루한 서낭당에는 "미역 소금 어물지고 춘양장을 언제 가노/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라고 노래했던 곡절 많은 짐꾼 장수들의 회한이 어지럽게 묻어 있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길인만큼, 길은 지극히 조용하고 정갈하다. 일부러 꺼두지 않아도 휴대폰은 울리지 않는 첩첩산중. 급하게 꺾은 갈지자 오솔길과 띄엄띄엄 징검다리가 도시에서 쓰지 않던 근육을 요구한다. 길 양쪽은 금강소나무뿐 아니라 굴참나무, 물푸레나무, 낙엽송 등 온갖 나무들의 천국이다.

늙어서 아름다운 건 나무밖에 없다던가. 이들이 뿜어내는 맑은 기운이 도시 육체에 찌든 니코틴과 알코올을 묽게 풀어낸다. 지난 몇년을 온전히 이 길 닦으며 보냈다는 숲길 터줏대감 이 계장은 "걷기 좋은 길보다 걷고 싶은 길로 사랑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앞서 걷는 그의 배낭에서 경쾌한 방울 소리가 났다. 산양 뱀 오소리 너구리 멧돼지 등 야생동물들이 방울 소리를 듣고 미리 피하라는 뜻이란다. 조선 중기 남명 조식 선생은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 두 개를 항상 달고 다녔다고 했다. 3년 앞으로 정년이 다가왔다는 그에게서 숲과 산에 대한 짝사랑을 읽는다.

인적 드문 가을 왕피천은 폭포수 같은 계곡물이 주인이다. 천둥 같은 물소리에 사위는 오히려 할 말을 잊었다. 계곡의 가을. /영상미디어 이경호 기자
숲-소광리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

트레킹을 마친 뒤 임도(林道)로 10여 분을 달린다. 금강송 군락지로 잘 알려진 소광리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이다. 사실 앞서 걸었던 금강소나무숲길은 이름과 달리 다양한 나무를 함께 만났던 길. 금강송의, 금강송에 의한, 금강송을 위한 숲을 보려면 여기 와야 한다. 수령 120년 된 소나무와 80년 된 참나무 줄기가 몸을 포개고 있는 공생목, 수령 350년·나무높이 35m·가슴높이 지름 88㎝인 잘생긴 미인송, 수령 520년을 넘긴 우람한 최고참 금강소나무…. 짧게는 10년, 길게는 500년 넘은 금강소나무들이 여의도 두 배 넓이 야산에 빼곡하다. 조선 숙종 때부터 출입을 금했고, 성종 때는 무단 벌목 한 그루에 곤장 100대를 때렸다는 금기의 숲. 덕분에 지금 이곳은 금강소나무로 꾸민 관능의 궁전이 됐다.

소광리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은 관능의 궁전. 잘생기고 쭉쭉 뻗은 금강소나무들이 여의도 두 배 면적 야산에 빼곡 하다.
왕복 두 시간 정도 걸리는 생태탐방로는 표지판도 잘 돼 있고, 안내소 설명도 친절하다. 조선시대 왕실과 국가사업에 쓸 만큼 품격을 자랑했던 금강소나무의 매력. 줄기는 곧게 하늘로 뻗었고, 지면에서 첫번째 나뭇가지까지의 높이가 높아 다른 녀석들보다 훨씬 늘씬하다. 붉은 기운이 강해 적송(赤松)으로, 속이 누런 황금색이라 황장목(黃腸木)으로도 불렸고, 봉화 춘양에서 기차를 타고 전국에 실려나갔다고 해서 춘양목(春陽木)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무엇보다 소나무의 속고갱이인 황장(黃腸)이 다른 일반 소나무의 두 배 가깝게 두껍다는 자랑. 세종실록은 "황장은 소나무의 속고갱이. 천자와 제후의 곽은 반드시 그 고갱이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견고하고 오래 지나도 썩지 않기 때문이다"고 적었다.

지금 이 숲을 찾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접근성과 보존 등의 이유로 겨울 개방을 하지 않는 소광리 숲의 개장 기간은 7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이제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다. 탐방로 정상의 미인송 위로 가을 해가 저문다. 붉은 적송이 더 붉게 타오른다. 마을의 이름은 소광(召光)리. 빛을 부르는 마을이다.

마을-왕피천 굴구지산촌마을
두천리 금강소나무숲길에 있는 성황사

산촌의 해가 뜬다. 마을이 공동운영하는 펜션의 통유리창이 다시 빛을 부른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내려왔다는 전설의 왕피천(王避川). 그 늠름한 계곡물이 한 굽이 돌아가는 산 아래 평지에 30여 세대, 63명 주민이 옹기종기 모여산다. 굴구지는 아홉 고개를 넘어야 마을이 나온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 전날 밤 울진군 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차로 15분 거리라고 현지 주민은 안내했지만, 초행길 타지인에게는 30분이 걸렸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오지(奧地)마을로 이름났던 곳. 하지만 굴구지에서 속사마을까지 왕피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길 7㎞ 트레킹 코스가 이름나면서, 걷기 마니아들의 '성지순례 코스'가 됐다.

하지만 평일의 굴구지는 번잡하지 않았다. 물길 트레킹은 원래 여러 차례 왕피천 계곡물을 건너가야 하는 고난도 코스이지만, 산허리 생태탐방로를 따라가는 초보자 코스도 있다. 용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모양의 기암괴석이 있는 용소(龍沼)까지는 대략 1시간 거리. 생태탐방로를 따라가다 체험을 위해 계곡물을 한 번 가로지른다. 안내를 도왔던 마을 청년회의 '막내' 김동길(40)씨가 주저없이 바지를 벗는다. 가장 얕은 곳을 골랐지만, 벌써 허리까지. 뭍으로 나온 뒤 김씨는 또 한 번 주저없이 팬티를 벗고 비틀어 짠 뒤 햇볕에 넌다. "우리 어렸을 때는 늘 이렇게 놀았더래요"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그와는 오늘 처음 본 사이. 짐짓 민망함을 숨기기 위해 같은 이름을 지닌 연세대 명예교수님을 화제에 올렸더니, "결혼 안한 것까지 나랑 똑같더래요"라며 또 한 번 너스레다. "며느리 들일 시킬 때 좋다"는 사나운 가을 햇살이 순식간에 옷가지를 말린다.

굴구지마을 뒷산에는 '치유의 숲'이라고 명명한 금강소나무숲이 있다. 소광리 숲을 제외하면 울진에서 으뜸과 버금을 다툴만한 금강송 군락이다. 마을에서는 이장 남중학(46)씨가 14개월 된 늦둥이, 대한이 자랑에 여념이 없다. 큰딸이 스물두 살이라니까 무려 스무 살 터울. 2008년 가을에 직접 캔 송이를 먹고 낳은 아들이란다. 굴구지 마을은 지금 자연산 송이 마케팅 중. 그러거나 말거나 대한이는 '대~한민국' 구호에 맞춰 박수를 치며 재롱 중이다. 바야흐로 산촌의 가을이 깊어간다.

 

 가는길/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릉에서 7번국도로 갈아탄 뒤 동해를 왼쪽에 끼고 남하하는 코스가 풍광이 좋다.

             울진까지는 대략 4시간 30분 거리. 강릉에서 두 시간 정도 걸린다.

두천리 금강소나무숲길 예약탐방제다. 사단법인 울진숲길(ulgintrail.or.kr, 070 -7718-2999)에서 신청을 받는다. 선착순 하루 80명. 무료. 인기가 높아 주말에는 이미 10월분이 예약 완료. 평일만 가능하다. 숲 해설사 5명이 구간별로 배치돼 상세하게 안내해준다. 출발지점은 울진군 북면 두천1리 232번지.

소광리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 예약 없이 입장 가능. 무료다. 울진군청에서 36번 임도를 따라 대략 40분 거리. 내비게이션으로는 울진군 서면 소광리 152번지를 찍고 도착해 북쪽 외길로 5분 정도 더 가면 된다. 그만큼 산골 오지다. 울진국유림관리소 (054)783-4008

왕피천 굴구지산촌마을 마을이 공동 운영하는 산촌체험펜션(054-782-3737)이 인기. 지난해 문을 연 통나무 펜션으로 취사가 가능하다. 방 크기에 따라 10만~20만원(성수기·주말), 8만~15만원(비수기와 평일). 직접 캔 자연산 송이도 판매한다. 울진군 산림조합 경매 가격에 준한다. 남중학 이장 (010)4134-0565, www.gulgugi.co.kr

맛집 송이가 나오는 기간에 울진의 식당은 대부분 산림조합 경매가격만 받고 송이 요리를 판매한다. 남양숯불갈비(054-783-2357)의 한우 등심가격은 1인분 1만9000원. 여기에 전날 3등급 송이 경매가격이 1㎏에 10만원이었다면, 원하는 분량만큼 가격을 추가로 받고 판매하는 식이다. 금강소나무숲길에서 가까운 장모씨암탉(054-783-5820)에서는 4000원의 저렴한 가격에 훌륭한 칼국수를 낸다. 총각김치와 배추김치도 아주 시원하다.

  • 울진=어수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