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이야기

-* 삼척 준경묘 소나무 (2) *-

paxlee 2010. 1. 8. 21:37

 

                         [김규의 나무기행] 강원도 삼척 준경묘 소나무(2)

국보 제1호 숭례문 복원 위해 20여 그루 벌채
“어명이오!” 외쳐 나무에게 벨 수밖에 없음을 알려

지난 호에서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가 정적을 피해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한 후, 아버지 이양무가 죽자 명당자리를 찾았고, 어떤 스님의 말을 듣고 준경묘를 쓰게 된 사연을 이야기했다. 이안사는 아버지를 여의고 명당의 음택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풍수로 보면 발복이 바로 나타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다시 의주로 도피한 이안사


고려 말에는 삼면의 바다에 왜구들이 들끓었다.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고려는 중앙군을 파견하긴 했지만 모든 지역에 손길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지방에서는 일종의 향토군인 민병들이 자체방어에 나서곤 했다.


이안사가 자리 잡은 삼척에도 왜구들의 침탈이 잇따랐다. 이안사는 배 15척을 만들어 왜구를 방비했다. 얼마 후 원나라 야굴이 여러 고을을 침략하니 두타산성을 지켜서 난리를 피하였다(朝鮮王朝實錄). 이안사가 배를 15척이나 만들었다는 기록을 보면 이주민이긴 하지만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아마 관민 합동으로 배를 만들었고 이안사가 지휘를 맡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 1 혼례 소나무 옆의 쭉 뻗은 미인송들. 2 거북등처럼 갈라져 건강한 소나무 수피.

어쨌든 이안사는 삼척에서 상당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또 다시 전주에서 부닥친 산성별감이 새로 안렴사(按廉使:안찰사·지방5도의 장관)가 되어 삼척지방에 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기구한 운명이었다. 화가 미칠까 두려워진 이안사는 동북면 의주로 이주했다. 이때도 170호가 또 따라갔다.


역사에 대한 해석은 결과론적이지만 이안사의 동북면 의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훗날 이성계가 그곳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는 데 단초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안사가 의주에 정착하자 고려에서는 이안사를 의주병마사로 삼아 원나라 군사를 방어하게 하였다. 이때 원나라 산길대왕이 쌍성(영흥)에 둔을 치고 철령 이북을 취하려고 하였다. 그는 싸움을 거는 대신 사람을 두 번이나 보내어 원나라에 항복하라 하자 이안사는 1000호를 거느리고 항복(고려 고종 41년, 1254년)하고 말았다.


이안사가 원나라에 귀순한 이후 그 자손들은 원나라에서 살았다. 이안사의 아들 행리, 손자 춘이 대대로 원나라의 관리를 지냈다. 춘의 아들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도 원나라 쌍성총관부의 천호(千戶)로 있었다.


▲ 정이품송 혼례 소나무.

그러나 이자춘은 원이 고려 출신 이주민들에게 차별정책을 실시하자 점차 원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주원장이 명을 일으켜 원은 명에 의해 중원에서 밀려나고 있는 형국이었다. 원의 힘이 약화되자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실시하여 동북면의 쌍성총관부와 긴밀한 관계가 있던 기씨 세력을 제거하려 했고, 이를 위하여 동북면 유민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자춘은 공민왕의 이런 의도를 간파하고 1355년 공민왕을 만나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치면 자신이 돕겠다고 약속한다. 그 이듬해 이자춘은 아들 성계와 함께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략을 도와 99년 만에 실지를 회복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이때의 공적으로 이자춘은 대중대부사복경이 되어 개경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1년 뒤인 1356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어 다시 동북면으로 돌아가 일대를 장악한다.


묘를 잃어버리다


1392년 동북면 세력을 바탕으로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왕이 되자, 왕가에서는 선조들의 묘를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안사에서 이자춘에 이르기까지 수 대를 고려에 왕래하지 못하였으므로 이양무의 묘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는 삼척군을 목조 이안사의 외향(外鄕)이며 선대 묘가 안치된 곳이라 하여 군(郡)에서 부(府)로 승격시키고 홍서대(紅犀帶)를 하사하였다. 홍서대는 길이 1.2m, 폭 3.5cm의 붉은빛이 나는 허리띠다. 한때 실전되었으나 영조 23년(1753년)에 다시 발견되어 영조는 이를 친견하고 국가의 유물로 정하였다.


태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양무의 묘는 오랜 세월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실묘(失墓)되고 말았다. 제왕의 명령을 하늘같이 받들고 조상을 모시는 일이 중했던 시절, 선조의 묘를 찾지 못하는 것은 매우 불경스러웠다. 그래서 태조, 태종, 세종 등 역대 왕들은 이양무의 묘를 찾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 영경묘역의 소나무도 아주 빼어난 금강송들이다.

이런 노력 끝에 세종대에 이르러 이양무의 묘를 찾게 되었다. 삼척주지(三陟州誌)에는 “옛날 호장(戶長) 김윤식이 소장하였던 고적(古蹟)에 의하면 세종 29년(1447년) 10월, 강원감사 이심과 도사(都事) 황효원, 삼척부사 이윤손 등이 어명으로 묘를 찾고 있을 때, 그 지역에 살던 촌로 고봉생, 조흥보, 최산봉 등이 자료를 제공하기를 목조황고묘(穆祖皇古墓)는 노동(蘆洞)에 있고, 황비묘(皇妃墓)는 동산(東山)에 있으며 삼척부에서 40리쯤 떨어진 활기동에 목조가 살던 구거지(舊居地)가 남아 있다고 증언하였다.

 

이곳은 두메산골 깊숙한 곳인데 논밭과 뽕밭이 있고 이 지방 사람들이 댁기(宅基) 댁전(宅田)이라 불렸는데 예로부터 전해진 이야기다”라고 기록돼 있다. 또한 <어사홍서대기적(御賜紅犀帶記蹟)>을 보면 성종 19년(1488년)에 왕명에 의하여 묘를 수축하려다 중단하였고, 명종 2년(1555년)에는 양묘(兩墓)에 수호군을 각기 2명씩 두었다. 선조 13년(1580년)에는 양묘를 개축하였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그렇게 애써 찾은 묘는 복잡한 사정으로 선조의 묘로 확정하지 못하였다. 그 후 태백 황지, 안동 등에 양묘가 있다 하여 관리들을 보내 탐문 수색하였으나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고종 35년(1898년)에 양묘를 확정하고 대대적인 묘역 정비공사를 실시했다. 두 곳의 묘는 3,300척으로 경계를 정하고 제각을 건축하였다. 묘비와 부속건물도 갖추었다.

 

이양무의 묘를 준경묘(濬慶墓)라 하고, 부인의 묘를 영경묘(永慶墓)라 정했다. 1년 후인 1899년에는 활기리 99번지에 제실을 축조하고 목조의 사적비를 세웠다. 상임수호군 4명을 배치하여 양묘를 수호하게 하고 매년 청명일에 제향토록 하였다. 이양무가 묻힌 해를 1232년으로 추정하면 1899년 묘비가 세워지기까지 667년의 세월이 흐른 셈이다. 왕실의 묘를 이렇게 오랜 세월 만에 찾은 것은 아주 드문 일이라 하겠다.


문화재복원용 목재 1순위 소나무

왕실이 무너진 후, 준경묘·영경묘는 1960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준경묘영경묘봉향회가 설립되어 매년 4월 20일 제향하고 있다. 1981년 8월 5일에는 강원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었다. 묘역 주변은 국유림으로 산림청에서 관리해왔다. 산림청과 별도로 문화재청은 지난 10년간 국유림 준경묘의 조림사업에 40억 원을 투입한 바 있다.


그동안 준경묘·영경묘의 소나무는 왕실과 국가에서 보호·관리해왔기 때문에 잘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주요 문화재를 복원할 때마다 벌채 1순위로 지목되곤 했다. 주요 문화재 복원에 다른 나무를 쓸 경우 내구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2002~2004년 경복궁 근정전 보수공사를 할 때,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근정전 주기둥 4개 가운데 온전히 보존된 것은 단 한 개에 불과했다. 그것은 소나무였으며, 전나무를 쓴 세 개의 기둥은 모두 썩어 있었다. 고종 4년(1867) 경복궁 중건 당시, 고작 11m짜리 소나무를 구하지 못해 강도가 한참 떨어지는 전나무를 쓴 결과였다. 그래서 문화재 보존에는 우리 소나무를 써야 한다는 것이 철칙으로 되어 있다.


▲ 하사전리의 영경묘 제실은 중수 중이었다.

준경묘는 1961년 숭례문 해체 복원 때도 가장 큰 소나무였던 ‘장수 솔’을 대들보로 바쳤다. 2006년에는 문화재청이 광화문 복원용으로 이곳 소나무를 쓰려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준경묘영경묘봉향회와 지역주민의 반대에 부딪쳤다. 반대가 심하자 문화재청은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산림전문가들은 준경묘 숲은 너무 빽빽하게 나무가 들어서 있고, 병에 취약해 간벌 차원에서도 어느 정도 베어내는 게 숲의 생태에 바람직하다고 입을 모은다.


2008년 2월 방화로 국보 1호 숭례문이 완전 소실되고 복원문제가 떠오르자 봉향회와 주민들이 3차례 회의를 거듭한 끝에 벌채를 허락했다. 국보 1호 복원에 동참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숭례문 복원에 사용될 소나무 20그루가 2008년 12월 10일 준경묘에서 벌채되었다.


“어명이오!”


문화재청장, 종약원, 봉향회 관계자 등은 벌채될 소나무의 영혼을 달래는 고유제, 산신제 등의 벌채의식을 지낸 후 벌목을 했다. ‘어명’을 반복하는 것은 임금의 명에 따라 궁궐 재목으로 쓸 나무를 벨 수밖에 없는 사정을 알려 나무의 원혼을 달래주려는 마음이 담겨 있다.


당시 벌목된 나무는 키 32m, 주지름 74cm의 곧게 자란 110세 금강송이었다. 현재 지름이 60cm를 넘는 궁궐 재목은 3000여 그루밖에 안 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나무


준경묘역에서 놓치지 말아야 나무는 2001년 산림청이 정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나무’다. 이 소나무는 준경묘역 입구 오른쪽 비탈에는 서 있는데, 필자는 이 나무를 보자마자 “헉!” 하는 비명을 내질렀다. 한마디로 숨이 막혔다.


수고 30여m의 쭉 뻗은 소나무는 조금의 뒤틀림도 없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다. 수피는 거북등 껍질처럼 건강하게 갈라져 있었고 둘레는 두 아름 가량이나 되었다. 고개를 쳐들고 상부의 나뭇잎을 보니 여전히 푸르고 건강해 보였다. 전형적인 미인송(美人松)이었다. 사람들은 쭉 뻗은 미인에 눈을 박지만 필자는 이 미인송에 감탄하여 정말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나무의 연유는 이렇다.


산림청 임업연구원은 고령화로 점점 약해져가는 충북 보은군의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의 혈통 보존을 위한 배필 소나무를 구하기 위해 전국의 소나무를 뒤졌다. 그 결과 준경묘역의 소나무를 간택했다. 이 소나무는 임업연구원이 10여 년에 걸친 연구결과와 수형(樹形), 건강도 등을 고려해 간택한 나이 당시 95세, 키 32m, 가슴둘레 214㎝의 빼어난 용모를 지닌 소나무였다.


미인송의 선발기준은 곧은 몸통, 큰 키, 지면에서 맨 아래 가지에서 지면까지의 높이(枝下高·지하고라 하며 높을수록 더 좋다) 등을 들 수 있다. 준경묘역의 이 소나무는 누가 보아도 토를 달 수 없는 빼어난 미인송임에 틀림없었다.


▲ 영경묘는 비탈에 있어 명당이라는 느낌은 없다.

2001년 5월 8일, 준경묘역에서는 산림청, 문화재청, 보은군, 삼척시 등 관계자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속리산 정이품송 혈통보존을 위한 혼례식’을 가졌다. 신순우(申洵雨) 당시 산림청장의 집례로 진행된 혼례식에서는 정이품송(신랑목)에서 채취한 송홧가루(화분)를 준경릉 소나무(신부목) 암꽃에 묻히는 방합례(房合禮)를 거행했다. 그 후 임업연구원은 정이품송 준경묘 혈통의 2세 소나무를 얻었다.


한편 정이품송은 혈통보존을 위해 2002년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 서원리에 있는 ‘서원리 소나무(일명 정부인 소나무·천연기념물 제352호)’와 ‘합궁(合宮·인공수정)’하기도 했다. 서원리 소나무는 높이 15m, 둘레 3.3m, 수령 600년이며 지상 80㎝ 높이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있고 풍성하게 퍼져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조선 여인을 연상케 한다고 해서 ‘정부인송(正婦人松)’으로도 불린다.


준경묘역에는 이 혼례소나무와 함께 곧게 뻗은 미인송 수십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우리의 토종 자원으로 잘 보호해야 할 것이다. 준경묘에서 3.6km 떨어진 미로면 하사전리에는 이양무의 부인 이씨의 묘인 영경묘가 있다. 영경묘는 오십천 지류 언덕바지에 있는데 하사전리 역시 예전에는 화전민이나 살았을 법한 골짜기 마을이다.


역시 빼어난 영경묘역의 소나무


영경묘는 준경묘와 역사를 같이 하며 보존되어왔고, 그 때문에 묘역의 소나무도 잘 보호되어 왔다. 이곳에도 수만 그루의 소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어 잘 자라고 있다. 하지만 비탈이 심하고 체계적인 간벌을 하지 않아 다소 방치된 느낌이었다. 넝쿨식물들도 무성하여 소나무의 생장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각종 조사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소나무가 점점 사라진다고 한다. 현재 서울을 비롯한 도시에서는 소나무를 가로수로 많이 식재하고 있는데 이는 자원낭비라 생각한다. 계절에 비해 온도가 높은 도시에서는 소나무가 잘 적응하지 못해 가로수로는 부적절하다. 오래 못 가 죽을 것이 분명하다. 아까운 나무와 돈을 도시에서 낭비할 것이 아니라 숲속에 있는 소나무 보호에 예산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  필자 / 김규 / 중앙대에서 문학과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으며, 문화일보신춘문예(시)에 당선됐다.

   중앙대·한서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 월간 산 12월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