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다양한 문화

-* 유방암 아줌마들의 유쾌한 히말라야 등반기 *-

paxlee 2012. 12. 30. 19:03

                유방암 아줌마들의 유쾌한 히말라야 등반기

 

아홉 명의 아줌마들이 히말라야에 다녀왔다. 랑탕-코사인쿤드 코스 중 가장 높은 봉우리인 해발 5,003m 체르코리다. 일반인도 오르기 어려운 이 봉우리에 도전한 이들은 한국유방암환우회 합창단원들. 이들의 믿지 못할 도전기를 전한다.

 

 

한국유방암환우회 합창단의 히말라야행은 농담처럼 시작됐다. 화요 등산모임 중 누군가가 “히말라야가 그렇게 아름답대.”라고 말했고, 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우리도 그 산에 갈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그날 이후 산에 오를 때마다 이들은 “히말라야도 가봐야 되지 않니?”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농담처럼 시작한 ‘히말라야’ 이야기는 현실이 됐다. “그래, 가보자!”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하더니, “다른 환우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프로젝트를 짜서 다녀오는 것이 어떨까?”로 발전했다. 이들의 꿈은 구체적으로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유방건강재단과 아모레퍼시픽에 낸 사업계획서가 채택됐다. 1천만 원의 지원비가 나왔고, 13박14일로 일정도 잡혔다. 그런데 정작 제일 중요한 체력이 의문이었다.
“히말라야에 간다는 기대만 가득 찼을 뿐, 실전을 생각하니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북한산도 못 가본 제가 히말라야를…. 다행인지 몰라도 동네 뒷산조차 못 가본 사람들도 있었어요.” (주광재)

히말라야 등반을 4개월 앞두고 일명 ‘사전 체력훈련’ 시간표가 세워졌다. 주말마다 북한산으로, 도봉산으로 등반훈련이 이어졌다. 강원도 산악훈련도 두 차례 다녀왔다. 사전 체력훈련 기간 동안 스무 명의 지원자 중 아홉 명이 남게 됐다. 김명자·김지윤·동신영·박경희·윤종숙·이갑녀·이병림·이순영·주광재 씨다. 49세 동신영 씨가 막내고, 63세 박경희 씨가 맏이다. 여기에 신발끈여행사 한왕용 산악대장과 서울대 암병원 노동영 원장도 합류했다. 한 산악대장은 히말라야 14좌를 세 번이나 오른 전문가이고, 노 원장은 한국 유방암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명의다. 단원들 모두 노 원장에게 수술을 받고 건강을 되찾았다. 사실 노 원장이 따라나선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하루에 외래 환자만 1백여 명을 보고, 수술 스케줄도 빡빡한 그가 2주의 시간을 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 그러나 환우들의 제안에 그는 흔쾌히 “함께 갈게요.”라는 답을 보내왔다.

 
항암 치료만큼이나 힘든 고산병

김명자 씨는 “‘다녀올 수 있을까? 등반하다가 죽는 사람도 있다는데…’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내가 암도 이겨낼 수 있었는데 못할 게 뭐 있어?’ 하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도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동신영 씨는 “모르고 갔다”며 웃었다. “히말라야는 평소 동경했던 산이고, 환우들이 가는 쉬운 코스라고 해서 덜컥 지원하게 됐어요. 암 투병을 하면서 자신감을 잃었고 위축된 마음이 있었는데, 산행을 하면서 히말라야를 오를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시작은 쉬웠고 진행은 순조로웠지만, 히말라야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최대 복병은 고산병이었다. 산소 부족으로 인해 두통과 구토, 메스꺼움 등이 단원들에게 엄습해왔다. 김명자 씨는 단원 중 가장 먼저 고산병을 앓았다. “산을 오르다 보니 숨이 안 쉬어졌는데, 그게 고산병인 줄 몰랐어요. 고산병은 각자 약한 부위로 오는지 제 경우에는 눈이 빠지도록 아팠어요. 머리가 띵하고 걸음을 뗄 수 없을 정도였는데, 결국에는 쓰러졌죠. 언제 회복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됐어요. 그런데 고산병에는 약이 없대요. 고도에 맞춰서 내 몸이 적응해가는 거라고 해요.”

이갑녀 씨도 히말라야 등반 3일째 되던 날, 속이 메스꺼워졌다. 고산병의 전조였다.
“일행들이 하나둘 정상에 오르는 모습이 보이는데, 저는 창자가 꼬이는 것처럼 뒤틀리듯 아팠어요. 그래도 참고 걷다 도저히 못 참겠기에 몇 번이나 토하고 또 토하며 기다시피 적당한 바위에 앉아 하늘을 봤어요. 고산병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여기가 내 무덤인가보다.’ 하는 두려움도 느꼈죠. 정상이 100m 앞이었지만 포기하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고산병은 누구나 겪은 병이었지만, 단원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었다. 어떤 단원은 고산병으로 인해 일치감치 산행을 포기하고 내려갔고, 또 어떤 단원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산행을 했다. 죽을 만큼 힘든 고통도 서서히 적응되어갔다. 가장 먼저 고산병을 앓은 김명자 씨는 웃음으로 고산병을 이겨냈다.

“고산병이 심했을 무렵, 프랑스에서 온 트래커들과 어울릴 기회가 있었어요. 제 병으로 단원들에게 누를 끼친 것에 대한 미안함을 보답하고자 네팔 민요를 부르기 시작했죠. 노랫소리에 네팔 포터가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환호 소리에 저도 나서서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노래를 마치자 프랑스 트래커들은 노래를 했고, 저희는 ‘아리랑’으로 화답했어요. 그렇게 댄스 배틀을 벌이다 보니, 어느새 고산병이 사라져 있더군요.”
김명자 씨에게는 노래와 춤이 명약이었다. 그녀는 “아마 노래하고 춤추고 웃는 동안 몸이 활성화되면서 산소 공급이 된 것 같다”고 추측했다. 노동영 원장도 고산병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고산병을 호되게 앓으며 오히려 환우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고산병을 먼저 겪어 서서히 적응하고 있던 김지윤 씨가 노 원장을 도왔다.

“히말라야 정상에 오르던 날은 제가 암 진단을 받은 지 8년 되는 날이었어요. 정상에 오르니 8년 전 그때처럼 눈물이 났어요. 하지만 그때와는 다른 성분의 눈물이었죠. 그동안 저희가 노동영 박사님의 도움을 받아 건강을 되찾았는데, 히말라야 등반에서는 저희가 모시고 간 격이 됐어요. 제가 박사님께 나름의 방법을 가르쳐드리기도 했죠. ‘나도 박사님께 해드린 것이 있네.’ 하는 뿌듯한 마음이 들었어요.”
동신영 씨 역시 고산병으로 고생하면서 암 투병 당시를 떠올렸고 힘을 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고산병인 줄 몰랐는데, 너무도 고통스럽더라고요. 그걸 겪으면서 ‘내가 병으로 고통을 겪었지만, 산행에서도 겪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병림 합창단 대표는 고산병을 이겨낸 단원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했다.
“고산병 증세는 항암 치료 받을 때의 고통과 비슷해요. 치료 때의 힘든 고통을 이겨냈기에 고산병을 더 잘 극복했을 거예요.”
 
 
히말라야의 고통은 삶의 희망으로

이갑녀 씨는 “히말라야에 다녀오고 나서 우리의 가슴은 삶에 대한 희망으로 채워졌다. 세상에 살아남는 것이 내 가족에게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정상에 올랐든 오르지 못했든, 히말라야에 다녀온 환우들은 모두 자신감을 얻고 돌아왔다. 병으로 인해 움츠러들었던 마음은 ‘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변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핑크 히말라야》라는 책에 담겼다. 히말라야 등산기뿐 아니라 아홉 명의 생생한 투병기까지 실려있다. 핑크는 유방암 조기 검진 캠페인을 상징하는 색이다. 이들은 책을 펴내고 서울대 암병원 로비에서 출판기념회와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아홉 명의 등반가들에게 이 책은 단순한 책이 아니었을 것이다. 김지윤 씨는 자신이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책을 받아들고는 눈물을 흘렸다.

“한 줄도 대필하지 않고 노력과 땀으로 썼어요.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였죠. 그동안 치료비 영수증에만 올라가던 제 이름이 책에 올라가서 감격스러워요. 제 이름이 적힌 책이 시골이든 어디든 있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몸이 아파서 넘어진 사람뿐 아니라 마음이 아파서 주저앉고 걸음마를 못 떼는 사람들에게 원동력이 되는 책이 되었으면 해요.” 다리를 다친 상태에서 히말라야 등반을 하느라 고생했던 동신영 씨 역시 자신들의 이야기가 환우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랐다.

“책을 내게 되면서 그간 있던 일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어요. 어려움 속에 있는 환우들이 저희 책을 읽고 한 줄기 작은 빛이라도 발견하면 좋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정말 감사한 일이죠.”
김명자 씨는 최근 트레킹을 하다가 넘어져 이가 빠졌다. 그런데 부러진 이를 들고 기념 촬영을 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히말라야 등반 이후 달라진 점이다.

“이가 부러진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난번에는 넘어져서 얼굴에 상처가 났어요. 여기 보세요. 화장을 하지 않으면 코 흘린 것처럼 보여요.(웃음) 히말라야에 다녀오고 나서 삶의 어려움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어요.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오를 때는 어둠 속에서 랜턴 켜고 출발해 16시간을 걸었어요. ‘어떻게 도전한 건데. 포기할 수 없어!’ 하는 마음뿐이었죠. 저희의 도전과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긍정의 바이러스가 되면 좋겠어요.”

암환자의 고통, 직접 몸으로 체험
노동영 서울대학교 암병원 원장

서울대 암병원 노동영 원장은 국내 유방암 권위자로 통한다. 그는 유방암 환우회가 설립되었을 당시부터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인물이다. 그래도 히말라야를 오르기로 한 환우 중 그가 선뜻 따라나설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일주일 정도 학회 가는 일정 이외에 이렇게 길게 시간을 내본 건 처음이에요. 휴가도 제대로 가본 적이 없었죠. 그동안 암병원을 오픈하고 힘든 과정을 거치며 6~7개월이 지났을 때라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차였어요. 저 자신에게 휴가를 준 거예요. 마침 히말라야에 오르자는 제안을 받게 된 거고, ‘웰컴!’ 하고 받아들였죠.”

노 원장에게도 히말라야행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나 계획이 없는 결정이었다. “컴퓨터처럼 리셋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환우들과 함께 사전 체력운동에도 참여했다.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백두산…. 천지가 폭발한다는 뉴스에 백두산 산행을 주저하고 있는 단원들에게 “수백 년 만에 화산이 터지는데, 그 순간 우리가 함께 있다면 얼마나 영광인가?”라는 말로 설득한 사람도 그였다. 그가 환우들과 히말라야를 등반한다는 소식을 들은 한 심장병 전문의는 “높이 올라갈수록 숨이 차고, 고산병으로 사망한 사람도 있다”며 협박 어린 충고를 해주기도 했다. 그런 말에 흔들릴 노 원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도 고산병에서 무너졌다.

“4천m 정도부터 고산병을 심하게 앓았어요. 숨이 많이 찼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배 속을 꺼내고 싶을 정도로 구토 증세를 심하게 느꼈죠.” 이런 과정에서 그는 환자들이 겪는 고통을 경험했다. 그동안 진료를 통해 간접적으로는 암의 고통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직접 몸으로 겪은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히말라야에는 그 고통을 뛰어넘을 만한 아름다운 자연이 있었다.

“가보지 않은 사람은 느낄 수 없는 청결하고도 깨끗한 느낌이 있어요. 또 고지에 올라섰을 때의 성취감과 충만감은 아마 단원들 모두 똑같이 느꼈을 거예요. 일상에서 벗어나 전혀 색다른 경험을 했어요. 하늘을 바라보면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별이 가득했죠. 자연의 순수함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네요.” 노 원장은 암 환자들에게 등산을 적극 추천하면서, 자신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에서 도전 할 것을 권했다.

“등산도 본인의 체력에 맞는 도전이라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규칙적인 운동은 암을 예방하고 치유하는 효과가 있죠. 건강을 위해서도 권하고 싶고, 일상에서 벗어나 또 다른 삶을 여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도 권합니다.”

- 여성조선 / 취재 두경아 기자 | 사진 신승희, 이콘 | 참고도서 《핑크 히말라야》(이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