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의 다양한 문화

-* 알피니즘, 그들은 왜 오르는가 [4] *-

paxlee 2012. 11. 15. 22:01

 

          알피니즘, 그들은 왜 오르는가 [4]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의 길. 외왕이 고개를 돌리면 내성이 된다
 
동양의 고전을 보면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나눈 경우가 있다. ‘장자’(莊子)를 보아도 내편이 있고, 외편이 있다. ‘황정경’(黃庭經)이라는 도교의 경전을 보아도 내경(內徑)과 외경(外經)으로 나뉘어 있다. 갈홍(葛洪)이라는 연금술사가 쓴 ‘포박자’(抱朴子)를 보면 신선이 되는데 있어서 두 길이 있다고 하면서 내단(內丹)과 외단(外丹)의 길로 나누어 설명한다.

왜 안과 밖을 나누었을까? 그리고 이 안과 밖은 각기 따로 노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러한 안과 밖의 분류는 어떤 공통의 목표 지점을 향해 가는 데 있어서 안과 밖이라는 노선이 각기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노선 차이는 결국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는 경지로 결합된다.

내편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닦아 성인이 되는 길을 암시하는 것이고, 외편은 통치를 하는 제왕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편은 내면적 수양의 세계이고, 외편은 외부세계를 정복하고 통치하는 길을 제시한 셈이다.

▲ 크레바스를 건너는 산악인들(사진 양정산악회).

 
이러한 맥락에서 서양의 알피니즘을 보자면 알피니즘은 등산(登山)의 길이고, 동양에서 도를 닦기 위하여 산에 들어간 행위는 입산(入山)의 길이었다. 이를 좀 더 밀고 나가면 서양의 등산은 외왕(外王)의 길이라고 한다면, 동양의 입산은 내성(內聖)의 길이라고나 할까.

등반에서 기록의 의미는 사라져

필자가 보기에 알피니즘은 스포츠, 예술, 탐험의 3가지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8,000m급 고산에 오르려면 강력한 체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스포츠의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등산이 스포츠와 다른 부분은 등산가가 지니는 고유의 이데아, 즉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간다’는 명언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대가(代價)를 바라지 않는 이상주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가적 면모가 있다. 그리고 인간이 도달하기 어려운 지점을 가 본다는 점에서는 탐험가와 같다. 이 3가지 측면 가운데 알피니즘은 세 번째인 탐험가의 측면이 가장 높다. 사실은 이게 중심이다.

유럽에서 알피니즘은 18세기 후반부터 눈 덮인 만년설의 산 몽블랑을 등정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암시하는 바는 무엇인가?  18세기는 유럽이 본격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기 시작한 시기다. 이때부터 제국주의가 시작된 셈이다. 식민지를 확장하려면 강한 체력, 대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정신, 불굴의 용기를 아울러 갖추어야 한다. 등산은 이러한 삼박자를 훈련하고 고양시키는 데에 최적의 방법이었다고 보인다. 스포츠, 예술, 탐험이 모두 결합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21세기에 들어와 인간이 지구상에서 가보지 않은 곳은 없다. 오대양육대주의 극적인 장소를 모두 밟아 보았다. 이제 탐험은 끝났다. 그리고 서양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정복하던 제국주의도 끝이 났다. 알피니즘을 지탱하던 탐험가의 기록주의, 즉 몇 개의 고산을 올랐고, 몇 미터의 고산을 올랐다는 기록의 의미는 예전보다 급격하게 그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는 시점이다.

인간이 가보지 못한 곳이 많았고, 정복해야 할 영토가 많았던 시대에는 등산이 그러한 욕망을 대신해서 성취해 준다는 만족감을 주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시대가 지났다고 본다. 바꾸어 말하면 식민지를 확장하던 외왕의 시대가 가고 내성의 시대로 전환되고 있다는 게 필자의 관점이다. 스포츠와 예술의 면모는 아직 유효하지만 탐험가가 중시하는 기록의 의미는 사라졌다.

내면의 히말라야를 정복하는 것은 내성의 길

갈홍이 쓴 ‘포박자’를 보면 외단과 내단 이야기가 나온다. 외단은 수은과 납을 제조하면 불사약을 만들 수 있고, 인간이 이 약을 복용하면 신선이 될 수 있다는 노선이다. 그러나 많은 도사들이 이 불사약을 제조하고, 복용하다가 수은과 납 중독으로 사망했다. 당(唐)나라 때에는 수천 명의 불사약 제조 도사가 수은 중독으로 죽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이후부터 내단으로 방향이 전환된다. 내단은 인체 내의 기(氣)를 함양시켜 장생불로하자는 노선이다. 그 비결은 심장의 불(火) 기운과 신장의 물(水) 기운을 절묘하게 결합시키는 방법이다. 이것이 내단이 추구하는 노선이었다. 내단으로 전환하고 나서는 수은과 납중독으로 사망하는 도사는 거의 사라졌다.

불사약은 외부의 약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내면의 오장육부에 있다는 통찰이었다. 고로 신선이 되려면 약물을 만들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세계를 주시해야 한다. 등산에서 입산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동양에서는 알피니즘(등산)이 발달하지 못했다. 유럽의 조산(祖山)인 몽블랑이 없어서 그랬던 것일까. 그대신 동양에서는 입산이 발달하였다. 입산은 도를 닦기 위해 산에 들어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히말라야 산이 있다.

불교에서 인간의 제7식(識)인 에고(ego)를 ‘말나식’(識)이라고 부른다. 도 닦는다는 것이 이 에고, 즉 7식을 녹이는 일이다. 아상(我相) 소멸이 도통이다.

히말라야의 ‘말라’는 ‘말나식’의 ‘말나’와 발음이 거의 비슷하다. 필자의 주관적인 해석에 의하면 히말라야는 인간의 에고와 업장(業障)을 상징하는 산이 아닌가 싶다. 인간 내면의 업장 크기가 히말라야처럼 쌓여 있다는 말이다. 히말라야를 삽으로 몇 번 파낸다고 해서 흔적이나 있겠는가. 등산은 외부의 히말라야를 정복하는 게 과업이라고 여겼다면, 동양의 수행자들은 내면의 히말라야를 정복하는 게 수행이라고 생각했다. 외부의 히말라야를 정복하는 것이 외왕의 길이었다면, 내면의 히말라야를 정복하는 것은 내성의 길이다.

그러나 외단에서 내단으로 전환이 무엇을 말하는가?  외단에서 수많은 도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내단으로 전환했듯이 내면의 히말라야를 정복하는 입산의 길이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더 바람직하다.

입산에 대해서 우리 선조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조선 후기 장동김씨(壯洞金氏)로서 최고의 명문가였지만, 권력보다는 제자양성과 산수 유람으로 한 세상을 보내고자 했던 김창협은 “산수를 보는 것은 마치 성현군자를 보는 것과 같다”고 고백했다. 금강산을  모든 산 가운데 최고의 성인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근래에 중국 황산(黃山)과 금강산(金剛山)을 비교하곤 하는데, 두 산을 모두 올라가 보니 금강산이 한 수 위다. 왜냐하면 금강산에는 동해바다의 수기(水氣)가 밀려와 바위산의 화기(火氣)를 달래 주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운무에 쌓인 황산의 경치는 대단하지만 수기가 부족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김창협의 동생 김창흡은 한 발 더나아가 “산천은 나에게 진실로 좋은 벗이며 또한 훌륭한 의원이다(誠一好友也 亦一良醫也)”라고 했다.

등산이야말로 병을 치료해 주는 의사라고까지 생각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어유봉(1672-1744)은 “유산은 독서와 같다(遊山如讀書)”고 했다.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보는 것만 독서가 아니고 명산을 노니는 것도 또한 독서와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바위에 오르고, 노을을 감상하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독서라는 것이다. 이런 지점에서 인생이 무엇인가를 생각 안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민서(1633-1688)는 “등산은 술 마시는 것과 같다(遊山如飮酒)”고 했다. 산에 오를 때 너무 많은 일행이 함께 가면 시끄럽고 서너 명이 가면 단촐하면서 분위기가 집중되어 좋다는 뜻이리라.

‘영웅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성인이 된다’는 말이 있다. 이 문법대로 하자면 외왕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내성이 된다. 외부세계의 정복과 기록 달성을 중시하는 등산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내면수양을 중시하는 입산이 된다. 많은 희생을 겪은 후에 도교도 외단에서 내단으로 전환했듯이 말이다.

너무 외왕의 길로만 매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서양이 동양의 영토를 지배하던 제국주의의 시대도 끝났고, 이제는 동양의 입산(入山) 사상이 서양에 소개되어야 할 시기라고 본다.   

- 글·조용헌·칼럼니스트·동양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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