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77세 김우중 '새로운 도전' [2]

paxlee 2013. 4. 30. 21:06

   ◇화교 네트워크에 대항한다

―왜 국내가 아니고 해외인가.

"우리나라는 운명적으로 많이 밖에 나가야 한다. 한국 사람은 유태인이나 중국인과 맞붙어서 이길 정도로 우수하다. 덮어놓고 나가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500명을 키웠다 치자. 혼자 하면 리스크가 있다. 중국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도와주며 투자한다. 우리도 (YBM) 동기들끼리, 회원들끼리 같이 투자하는 식으로 운영하면 화상(華商)과도 경쟁할 수 있다. 우리 연수생들이 (성장해) 중견 기업가가 되면 서로 투자하면 된다. 리카싱(李嘉誠·홍콩의 부동산 재벌)이 세계 최고 부자라는데, 그는 돈 많은 거 외에도 (중국에) 투자한 것도 엄청 많다. 서로 투자하고 공생하는 거다."

―회장님 본인은 이제 못 하니까, 후진을 양성해 대신 '제2의 세계 경영'을 하도록 하겠다는 건가.

"(YBM 청년들에게) 사업을 하더라도 여기를 베이스로 해서 하라고 한다. 본사가 여기로 와야 한다는 거다. 남자고 여자고 간에, 여기에 뿌리를 내려 결혼도 여기서 하고 죽을 때까지 산다는 생각을 하라는 거다."

―YBM은 어디까지 클 수 있나.

"우리나라는 (글로벌) 중견기업 역할이 중요하다. 연간 매출 200억달러, 300억달러 하는 기업이 많이 나와야 한다. 만약 500개 했는데, 200개가 성공했다고 하자. 본사를 여기로 하고, 한국에 투자하고, 싱가포르에서 기업 공개하고…. 그런 식으로 가면 커지지 않겠나."

―YBM을 베트남에서만 하는 거 아니죠?

"내년에 미얀마에서도 시작하고 인도네시아까지 갈 생각이다. 우리나라에는 아세안(ASEAN) 나라가 제일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미얀마·베트남·인도네시아가 제일 크다. 땅이나 인구, 머리 면에서 (세 나라가) 제일 중요하다. 투자할 때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한 50년간 가장 빨리 커질 수 있는 나라들이다."

―아세안 중에 왜 미얀마인가.

"(다른 경쟁자보다) 먼저 들어가야 (성공하기) 좋다. (옛 대우도) 항상 (신흥 시장에) 처음 들어갔다. 미얀마는 시장 개방을 한 지 얼마 안 된다. 우리로선 묘미가 있다. 그래서 거기 가서 사람을 고용하고, 외화를 벌어주는 수출이 중요하다. 미얀마는 땅이 크니까 식량 사업 등을 할 수 있다. 앞으로 미얀마에선 한국의 농과대학 출신을 뽑아서 보내 가르칠 예정이다. 고무나무 같은 사업 말이다."

 

	지난 24일 베트남 하노이사범대학에서 특강을 마친 김우중 전 회장이 한국에서 온 청년 연수생들과 함께 강의실을 나오고 있다.
 
지난 24일 베트남 하노이사범대학에서 특강을 마친 김우중 전 회장이 한국에서 온 청년 연수생들과 함께 강의실을 나오고 있다. 세계시장을 섭렵했던 왕년의 비즈니스 거인을 청년들은 마치 아버지를 대하듯 웃고 떠들며 왁자지껄하게 배웅했다. /하노이=오종찬 기자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고급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김우중 사관학교'를 만든 셈인데.

"내가 해온 게 있기 때문에 쉽다. (YBM 청년들이) 15년 안에 창업하기를 기대한다. (청년들이) 자신이 생기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백화점에서 파는 모든 물건을 다 할 수 있다."

―교육이 스파르타식으로 강행군이라던데.

"제일 문제는 요즘 젊은이들이 한국에서 (편하게) 자랐기 때문에…. 여기에 적응해서 일을 해내도록 해야 한다. 그게 제일 어렵다. 아침 5시 반부터 밤 10시까지 훈련한다. 이렇게 10개월간 공부시킨다. 이걸 따라오라, 배겨내라는 거다."

―정리 정돈을 특히 강조하신다고 들었다.

"남자들은 군대 갔다 와서 정리 정돈을 잘하는데 오히려 여자들이 문제다. 여기 있는 청년들에게 내 방에 와서 보라고 한다. 어떻게 돼 있는지 말이다. 공장이 자기 집보다 깨끗해야 한다. 나는 (대우 시절) 공장을 인수한 뒤 리노베이션하고 이발소까지 만들었다. 지저분한 머리로 일하면 흐트러진다. 창고 정리 못하면 가망성 없는 회사다. 투자를 많이 하는 것보다 청소 잘하는 공장이 성공한다."

―아버지가 자식 대하듯 자상하게 신경 쓴다고 하던데.

"교육생들을 한 달에 4번은 만난다. 학생들 잠자리가 편해야 하는데 이불 홑청도 내가 직접 골랐다. (대학 기숙사에) 뜨거운 물이 안 나와 샤워 시설을 마련했다. 신발장도 만들어 1인당 한 칸씩 5켤레씩 놓도록 해주었다."

―이들을 채용한 현지 기업 반응은?

"이곳 기업들은 (YBM 졸업생들을) 현지 직원 채용이 아니라 본사 직원 대우로 뽑는다. 해외 수당까지 주고, 서울에서 온 직원과 똑같이 해주겠다, 한국서 온 사람과 갈등이 안 생기도록 하겠다는 거다."

―요즘 청년들은 삶의 조건을 따지는데 여기까지 와야 할 절박한 이유는.

"월급 올라가는 것을 보면 한국보다 여기가 훨씬 높다. 10년 지나면 (한국에서 취업하는 사람을) 완전히 압도할 것이다. (청년들이) 사정을 알면 다 온다. 여기 있는 베트남 로컬 업체에도 취업할 수 있고, 베트남 관청이나 은행도 갈 수 있다. 곳곳에 깔려서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서로 돕고 하면 (창업 성공의) 기반이 만들어지는 거다."

◇인생을 걸었다

―결국 나라 전체가 밖으로 뻗어나가야 한다는 얘기인가.

"지도자들이 어떻게 잘하느냐에 달려있다. 앞으로 지역주의가 커질 가능성이 있다. 그런 경우에 대비해서라도 아시아 경제권 구축이 중요한데, 중국도 일본도 우리와 손잡겠다고 손을 벌려오는 국가가 돼야 한다. 그러려면 국내에만 머물지 않고 해외에서 힘을 가져야 한다. 세계시장에서 강력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면 한국 경제 네트워크를 누구도 무시하지 않고 서로 손을 잡자고 할 것이다."

―사업 재기가 아니고 교육에 승부를 걸었는데….

"이거 해서 (YBM 졸업생들이) 15년 후에 독립했다든지, 중역이 되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러면 (나의) 흔적이 남는 것이다. (YBM 사업이) 20년 후 엄청나게 커져서 흔적을 남길 수 있다. 김우중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실수해서 그렇게 됐지만(대우그룹 해체를 뜻하는 듯)…. 사람은 조그마한 것이라도 (살았다는) 흔적을 남겨야 한다. (대우 해체에 대해) 나는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YBM 사업을 통해) 김우중이 이렇게 할 수 있구나를 보여주고 싶다."

―한국 사회로부터 재평가를 받고 싶은 건가.

"(청년 사업가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좋은가. 그런 마음으로 끝까지 가야 한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르니까 기본으로 모델을 만들어 놓자는 생각이다. 나는 돈을 벌려고 사업을 하지 않았다. 나라를 위해 한창 일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돈이 생겼다. 개인적으로 돈 쓴 게 없다. 우리 세대는 '희생의 세대'다. 태어나 죽을 때까지 말이다. 나라를 위해 살았다고 해주면 제일 좋다. 일관되게 난 그렇게 살았다. 지금은 (글로벌 YBM을) 시작했으니 내 꿈이 실현되도록 구십 살, 백 살까지 내 인생을 걸겠다."

 

김우중, 대우 해체 이후 14년간 어떻게 살았나 [4]

김우중 68개월 유랑·수차례 큰 수술… 사면 후 베트남 체류


추징금 18兆 선고받아 국내서 사업 再起는 불가능 전 대우 회장의 동선(動線)은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다. 간간이 신병 치료차 국내에 들어올 때마다 근거 없는 재기설(再起說)이 나돌 뿐이었다.

김 회장이 은둔한 이유는 무엇보다 건강 때문이었다. 그는 대우그룹 해체 이후 1999년 10월 중국으로 출국해 5년 8개월 동안 독일·프랑스·수단·베트남·중국 등지에서 유랑 생활을 했다. 2005년 귀국해 재판을 받을 때 링거를 맞으며 법정에 들어설 정도로 그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2000년과 2002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 병원에서 장협착증 수술, 2005년 한국에서 심장 수술과 뇌출혈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2007년 사면 이후 베트남 하노이에서 체류해왔다.

 


	1973년 대우실업 기업공개 직후(사진 위 맨 왼쪽)와 1979년 수출탑 수상(사진 아래).
 
1973년 대우실업 기업공개 직후(사진 위 맨 왼쪽)와 1979년 수출탑 수상(사진 아래).

 

김 회장은 건강 문제에 대해 "나 자신과 싸워 이겼다"고 표현했다. 건강을 회복했다는 의미다. 현재 베트남에서는 하노이와 호찌민을 오가며 글로벌 청년사업가(YBM) 1기 졸업생과 대우 출신 현지 사업가들을 만나며 지낸다. 김용원 전 대우경제연구소 회장은 "일이 없으면 못 견디는 체질인 김우중 회장은 YBM 사업을 통해 할 일을 찾았고 건강이 좋아진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또 중국·싱가포르·미얀마·홍콩 등지에서 예전에 사귄 현지의 전·현직 정·관계 실력자들을 만나기도 한다.

시간이 아까워 골프를 치지 않는다던 그는 해외 유랑을 하면서 건강관리를 위해 골프를 시작했다. 오전 5시에 일어나 9홀을 돌며 골프를 치는데, 공이 그린에 올라가면 퍼팅을 하지 않는다. 그는 "퍼팅을 하면 스트레스를 받고 건강에 오히려 나쁘다"며 "걸으려고 골프장에 간다"고 말했다.

 

	김우중 전 회장이 걸어온 길 연표
 
김 회장은 2006년 추징금 18조원을 선고받았고, 따라서 본인 명의 재산은 없다. 소득이 생기는 족족 압류당하기 때문에 국내에서의 사업 재건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20조원 분식회계 책임을 지고 있기도 하다. 다만 부인 정희자(73) 서울아트선재센터 관장과 사업을 하는 두 아들(선협·선용씨), 그리고 이수화학 김상범 회장의 부인인 딸(선정씨·48) 측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회장은 현재 하노이 외곽의 외국인이 많이 사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한 측근은 "김 회장 앞으로 들어오는 수입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 세계 곳곳의 대우맨들은 김 회장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대우 해체 후 14년이 지난 지금도 이들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 조선일보 / 수정 : 2013.04.30 0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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