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가 퍼온글

<단편소설> 다대포에서 생긴 일 [상]

paxlee 2014. 9. 22. 18:19

 

<단편소설>  다대포에서 생긴 일

 

Asian Games에서 꽃핀 남남북녀의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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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신문” 부산특파원 박진호 기자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 북한 응원단을 밀착 취재하라는 지시를 서울 본사로부터 받았다. 주로 여자들로 구성된 북쪽 응원단은 일부러 북한 당국이 예쁜 여자들만 골라서 보낸듯 하나같이 다 예뻤다. 그래서 그들은 아시안게임에 손님을 끌어드리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남쪽 사람들은 북쪽 응원단이 북한이라는 이질적인 사회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대해 호기심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그 보다는 그들의 아름다움에 더 매료되어 있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입장권을 사서 경기장으로 몰려들었다. 입장권이 안 팔려 고민하던 아시아경기 조직위원회는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북한 선수-임원-응원단의 부산 체재 비용을 전부 남측에서 부담한 것에 대해 북측 응원단은 충분히 보답을 하고있는 셈이었다.
 
남쪽 총각들은 북쪽 아가씨들을 “무공해 꽃미녀”라고 불렀다. 그 청초한 아름다움이 좋다는 것이다. 남쪽 기준으로 보면 화장은 좀 촌스럽게 했지만, 짙은 속눈섭을 단 것 외에는 얼굴이나 가슴에 칼을 댄 것 같지 않고, 또 입술 속에 콜라젠을 주입하거나 머리를 염색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들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남쪽 총각들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박진호 기자도 그런 총각들 중의 하나였다.
 
박진호가 자기 가슴에 큐피드의 화살을 쏜 북쪽 아가씨를 처음 발견한 것은 북한 응원단이 부산 다대포 항에 도착하는 것을 생중계하는 TV 화면에서였다. 그는 텔레비젼 화면에서 가지런한 이를 들어내놓고 환하게 웃는 한 아가씨를 보고 요즘말로 한 방에 뿅! 가벼렸다. 그녀가 다른 북한 아가씨들처럼 그렇게 진한 화장을 하지 않은 것이 박진호의 마음에 더 들었다. 그녀의 눈은 쌍꺼풀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순진하고 아름다운 눈이었다. 숱 많은 까만 머리는 목덜미까지 내려와 있었고 머리칼 두 가닥이 하이얀 이마를 살짝 덮고 있었다. 정말 예뻤다. 물론 이름도 모르는 아가씨였다. 그는 일단 그녀에게 “이상형”이라는 가명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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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9월 28일 부산 다대포항에 도착한 북한 만경봉호에서 화사한 빛깔의 한복을 차려입은 북한 응원단 여성들이 북한의 응원단 브라스 밴드의 공연을 보고 있다./ 조선DB

북한 응원단은 만경봉 92호라는 배를 타고 동해를 17시간이나 항해한 끝에 부산 다대포 항에 도착해 있었다. 박진호는 신문기자로서의 취재도 취재지만, 그 이상형 아가씨를 실제로 보기 위해 다대포항 여객선 선착장으로 자기 차 코란도를 몰고 갔다. 마침 선착장에서 열린 북한 응원단 환영식 행사가 끝나고 응원단 아가씨들이 버스를 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고운 색갈의 화사한 한복 차림이었다. 해운대 그랜드호텔에서 있을 환영 오찬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다.
 
박진호는 TV에서 본 그 이상형을 찾았다. 그러나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러 대의 버스 주위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버스 안을 드려다 보았다. 이상형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왜 보이지 않는 걸까? 혹시 배멀미를 심하게 해서 배에 남아 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마지막 버스에 이르렀을 때, 운전기사 뒤쪽 세 번째 자리 창가에 앉아있는 이상형이 눈에 띄었다. 그는 첫 사랑 소년같이 가슴이 뛰었다. 그는 이상형이 앉은 자리 밑으로 다가가 큰 소리로 “이름이 뭐에요!”라고 소리 질렀다. 두꺼운 버스 유리창 때문에 이상형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 보이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박진호는 휴대전화를 꺼내 문자 멧시지로 “이름?”이라고 써서 버스 유리창에 가까이 갖다 대었다. 그제사 이상형은 버스 유리창에다 손가락으로 “한송이”라고 천천히 썼다. 버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이?”라고 박진호가 재빨리 또 문자 멧시지를 써보였다. 한송이는 먼저 오른쪽 손가락 두 개, 다음에 왼쪽 손가락 세 개를 펴보였다. 이래서 박진호는 그의 이상형 아가씨 한송이가 스물 세 살의 꽃다운 나이임을 알았다. “나는 박진호”라고 그가 다시 문자 멧시지를 써보이는 순간 버스는 떠나가버렸다. ‘한송이가 내 이름을 보았을까?’
 
그는 사라져가는 버스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그녀가 그의 이름을 보았는지 모르지만 일단 통성명은 끝난 셈이었다. 아쉬었지만 기분좋은 순간이었다. 그는 한송이도 자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일방적으로 생각했다. 자기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고 그는 제멋대로 단정해버렸다. 한송이는 몰라도 적어도 박진호에게 그것은 love at first sight(첫눈에 반한 사랑)이었다.
 
박진호는 차를 몰고 해운대 그랜드호텔로 달려갔다. 그곳에서는 부산시장이 주최하는 북한 응원단 환영오찬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PRESS라 쓴 태그를 양복 가슴에 달고 환영회 장소로 들어가 취재하면서 한송이를 찾았다. 그는 주황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한송이를 이내 찾아내고 계속 그녀를 훔쳐보았다. 둘은 눈이 마주쳤다. 박진호가 웃어보이자 한송이도 따라 웃었다. 그는 그녀가 자기를 금방 알아본 것이 기뻤다. 환영행사와 식사가 끝날 무렵 박진호는 한송이와 또 다른 한명의 북한 아가씨를 상대로 잠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한반도신문 기자 박진호입니다. 평양음악무용대학 학생들이라던데 맞습니까?” 박진호의 첫 질문에 “아닙니다. 우린 평양외국어대학 학생들입니다”라고 한송이가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전공이 무엇입니까?”
“영어입니다” 한송이가 말했다.
“그럼 영어들 잘 하시겠네요?”
“그저 좀 합니다.” 그녀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럼 쉐익스피어 작품들도 읽었겠군요?”
“쉐익스피어가 뭡니까? 우린 그런 거 모릅니다. 우리는 실용적인 영어만 배웁니다.”
“아, 그래요? 그럼 North Korea has nuclear weapons. 북한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 뭐, 이런 영어만 배운단 말입니까?”
 
박진호의 황당한 질문에 두 북한 아가씨는 서로의 얼굴만 바라본다.
“농담이었습니다. 남자 친구 있습니까?” 박진호가 또 뜻밖의 질문을 던지자 한송이는 좀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기만 했다. 그러자 옆의 아가씨가 “네,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여주었다. 남자 친구가 있는지 없는지 알려면 여자의 손가락을 보면 알 수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박진호는 한송이의 손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반지가 없었다. 박진호는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송이에게 확인 질문을 하고싶지 않았다. 혹시 있다고 할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십여분 간의 간단한 인터뷰가 끝난 후, 박진호는 그들 두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다. 한송이의 동료가 먼저 돌아서고 다음에 그녀가 돌아서 갈 때, 그는 “한송이씨!”하고 불러세웠다. 그리고 재빨리 자기 명함에다 볼펜으로 “나는 한송이씨를 사랑합니다. 한송이씨는 이름 그대로 한 송이 꽃같이 아름답습니다”라고 써서 주었다. 그녀는 읽어보지도 않고 명함을 손아귀에 접어들고 돌아서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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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다대포항에 도착한 북한 응원단들이 하선한후 버스를 타고 부산해운대로 향하고 있다./조선DB

다음 날, 그 다음날, 또 그 다음날, 북한 응원단이 경기 종목에 따라 이 경기장, 저 경기장 으로 옮겨 다닐 때마다 박진호는 그들을 따라다니며 한송이를 만났다. 그러나 가까이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다. 일반시민들은 물론이고 기자들도 자유롭게 접근하는 것을 보안요원들이 막고 있었다. 그러나 아침에 그녀들이 숙소인 만경봉호로부터 내려와 선착장에서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타러 갈 때만은 기자들이 접근해서 그들에게 한 두마디씩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이 때마다 박진호는 한송이 손에 쪽지를 쥐어주었다. 매일 건네주는 쪽지에는 “사랑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네 번째 쪽지에는 “매일 밤 송이씨 생각에 밤잠을 설칩니다. 송이씨를 미칠듯이 사랑합니다!”라고 썼다.
 
그 네 번째 쪽지를 받은 다음 한송이는 처음으로 답장을 보냈다. 물론 아침에 선착장에서 버스를 타러 가면서 작게 접은 쪽지를 박진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난생 처음 그에게서 이성에 대한 사랑을 느꼈다. 평양시당 간부 아들이라는 29세 남자와 얼마 전 선을 본 일이 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녀가 마음속에 그리던 남성상이 아니었다. ‘나도 멋있는 남자 만나 가슴 두근거리는 연애 한번 해보고 시집을 가도 갈 것이다’라고 그녀는 늘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 가슴 두근거리는 설레임을 남조선 땅에서 경험할 줄이야! 훤칠한 키에 운동선수같이 잘 다져진 몸매, 서글서글한 미남형 얼굴 등 한송이는 박진호의 외모가 우선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으로 이렇게 대담하게 답장을 쓴 것이다. “저도 박진호 기자님이 좋습니다.”
 
북한 응원단을 항상 따라다니며 경호하는 보안요원들이 눈치를 채지 않게 쪽지를 거의 매일 교환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북한 사람들도 우리 같이 휴대전화를 다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박진호는 쓸데없는 공상을 해본다. 그러면서도 이런 간첩 접선 같은 편지 교환에 짜릿한 스릴을 느끼기도 했다.
 
쪽지 교환은 그럭저럭 가능했으나 단 둘이 만날 수는 없었다. 며칠 후면 아시안 게임도 끝이 나고 북쪽 사람들은 북으로 돌아갈텐데....박진호는 초조했다. 그래서 그는 열 한 번째 만나는 날 “우리 둘이 단둘이만 만나고 싶습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라고 쪽지에 써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밤에 일단 배로 돌아오면 다음날 아침에 경기장으로 나갈 때까지 배 안에 갇혀있습니다. 나갈 수가 없어요”라고 쪽지로 대답했다.
 
그러다가 아시안 게임이 끝나기 이틀 전 쪽지에서 한송이가 묘안을 제시했다. “내일 밤 내가 배에서 바다로 뛰어내리겠어요. 난 수영을 잘해요. 내일 밤 11시에 우리 배 선미(船尾)에서 100미터 정도 되는 지점 해안가에 차를 세우고 자동차 전조등을 두 번만 깜빡거려 주세요. 그러면 내가 선착장과 반대되는 쪽으로 배에서 뛰어내려 선미를 돌아 진호씨 있는데로 헤엄쳐 가겠어요. 죄송하지만 제가 갈아입을 옷을 좀 준비 해주셔야겠어요.”
 
기발하고 대담한 아이디어였다. 한송이가 이런 모험을 결심한 것은 박진호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증명해주는 것이다. 박진호는 행복했다. 만경봉호는 다대포항 여객선 선착장에 아주 가까이 정박하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헤엄칠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또 선미 부분은 갑판에서 수면까지 거리도 그리 높지 않았다. 문제는 선원들이나 부산 해양경찰 순시선에 발각되지 않고 몰래 배에서 뛰어내려 해안가로 헤엄쳐 가는 것이었다.
 
다음 날 밤 10시 30분쯤 박진호는 만경봉호 선미가 바로 보이는 해안가로 갔다. 한송이가 말한대로 만경봉호 선미에서 100미터쯤 되는 거리에서 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전조등을 끈채 차 안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바로 그 시각, 한송이는 같은 방을 쓰는 친구에게 “속이 좀 메스꺼워 갑판에 나가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말하고 운동복 차림으로 선실을 나왔다. 마침 중천에 반달이 떠있었으나 구름에 가려 너무 환하게 비추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팔뚝시계를 보았다. 11시 3분 전이었다. 그녀는 어스름한 달빛이 그림자를 만든 곳에 숨어서 해안 쪽을 바라보았다. 11시 정각이 되자 자동차 전조등이 두번 깜짝거리는게 보였다. 그것을 보고 그녀는 박진호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녀는 육지와 반대쪽 갑판으로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조심조심 걸어갔다. 그리고 난간 위에 한쪽 다리를 올려놓았다. 그 순간 인기척이 났다. 그녀는 즉시 도로 다리를 내리고 선실 벽으로 사뿐히 걸어가 벽에 바짝 붙었다. 인기척을 낸 것은 선원 같았다. 그 선원은 피던 담배를 난간 위로 던지면서 퇴!하고 바다를 향해 침을 한번 뱉고는 선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는 난간을 넘기 전에 주의를 살폈다. 이따끔씩 지나가는 부산 해양경찰 순시정은 다행히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단숨에 난간을 넘어 바다 위로 다이빙을 했다.
 
첨벙! 한때 학교 수영선수였던 그녀는 별로 큰 소리를 내지않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일단 물 속에 잠겼던 그녀의 머리가 수면으로 떠오르자 부산해양 경찰 순시정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났다. 그녀는 재빨리 물속으로 완전히 잠수, 순시정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10월 중순의 남도 부산 다대포항의 물은 그리 차지 않았다. 순시정이 지나간 후 그녀는 만경봉호 선미를 돌아 인어같이 조용히 해안으로 헤엄쳐 갔다.
 
한송이가 해안으로 헤엄쳐오자 박진호는 물가에서 기다리고 섰다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자기 차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옷이 흠뻑 젖은 그녀를 뒷좌석에 태우자 마자 시동을 걸고 일단 그곳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힐끔 리어뷰 미러를 보니 차 한 대가 따라오는게 보였다. 우연히 지나가는 차인지, 아니면 자기 차를 미행하는 차인지 몰라 불안했다. 그는 “송이씨, 우선 뒷좌석에 있는 그 옷으로 갈아입어요. 신발도 거기 있어요. 우린 일단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겠어요"라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한송이는 시키는대로 했다.
 
“거울로 뒤를 보면 안돼요." 그녀는 젖은 웃옷을 먼저 벗으며 말했다. “보려고 해도 어두워서 안보이니 걱정 말아요." 박진호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한송이는 먼저 젖은 운동복 상의와 브라자를 벗고 박진호가 미리 준비한 브라자와 여성 골프셔츠로 갈아입었다. 다음에 그녀는 운동복 바지를 벗었다. 그리고 팬티를 순식간에 갈아입고 그 위에 블루진 바지를 끼어입었다. 팬티를 벗을 때 그녀의 미끈한 하체가 순간적으로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었으나 박진호는 보지 못했다. 그가 전날 국제시장에 가서 산 블루진 바지와 골프셔츠, 그리고 팬티와 브라자는 대충 그녀의 몸매와 키를 말해주고 산 것들이었다.
 
“옷이 대충 맞아요?" 그가 묻자 “네. 맞아요. 맞춘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옷걸이가 좋은 사람은 원래 무슨 옷이나 다 잘 맞는 거라구요." 그가 웃으며 말하자
“옷걸이가 좋은 사람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녀가 묻는다.
“아, 참, 북쪽에선 옷걸이란 말을 모르겠구만. 옷걸이는 몸매란 뜻이에요."
“아, 네에!"
“밤이라 쌀쌀하니 거기 내 점퍼를 걸쳐요. 점퍼란 말도 모르겠구만. 거기 내가 벗어 놓은 웃옷이라도 걸치고 있어요."
“고마워요, 박기자님."
“박기자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진호씨라고 불러요, 송이씨."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 되고 말구요. 난 기자로서 송이씨를 만나는게 아니잖아요."
 
한편 만경봉호 위에선 난리가 났다. 11시 30분 취침 시각 점호 때 한송이의 룸메이트는 북한응원단 단장에게 한송이의 실종을 신고했다. 그녀가 겁먹은 표정으로 “송이 동무가 속이 메스껍다 면서 갑판에 나가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하고 나갔습니다”라고 말하자 단장은 “기래? 기럼, 어두워서 발을 헛디뎌 바닷물에 빠진 거이가?” 했다. “밖에 달이 있으니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혹시 실족을 해서 바다에 빠졌더라도 송이 동무는 헤엄쳐 나왔을 겁니다. 송이 동무는 수영을 잘 합니다”라고 룸메이트가 말했다. “기래? 기럼 그 에미나이가 어디로 갔단 말이가? 땅으로 꺼졌단 말이가, 하늘로 솟았단 말이가!“ 응원단장은 소리를 버럭 지르고 나서 한송이의 룸메이트에게 “이 일에 대해서 동무한테도 책임이 있어! 같은 방에 있는 동무의 동정을 잘 살펴야하는 거 아닌가? 어쨌든 누구한테도 절대로 말하지 말라우, 알갔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당장 큰일 나는 건 단장 자신이다. 단원들을 잘 챙기지 못한 엄중한 문책을 당할 게 뻔하다....
 
응원단장과 부단장, 그리고 만경봉호 선장은 선장실에 모여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한송이, 이 에미나이가 수영을 잘 한다니까 물에 빠져 죽었을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가? 이거야, 큰일 나지 않았소? 남조선 경찰에 신고를 할까?”하고 단장이 말하자 부단장은 “안됩니다, 기건. 우리끼리 조용히 해결해야디요, 한송이가 누굽니까? 인민군 상장(중장)의 딸 아닙니까? 기런 아이가 남조선에서 사라졌다고 남조선 신문 방송이 떠들어대면 우리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습니다!”라고 비공개를 강력히 주장했다.
 
“부단장 동지 말씀이 옳습니다.” 선장이 거들자 단장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우리가 어떻게 조용히 해결한단 말이요? 이 넓은 부산에서 그 에미나이가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찾는단 말이요? 이거야. 정 죽갔구만!”하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려고 라이터를 켰다. 그런데 라이터가 불을 붙이지 못하자 단장은 “공화국에선 라이타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드나, 젠장!”하고 화를 냈다. 그러자 옆에 섰던 선장이 일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이 무렵 박진호의 코란도는 다대포 지역을 벗어나 해운대 쪽으로 가는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다행히 뒤따라오던 차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미행하는 차는 아닌 모양이었다.
 
“송이씨, 생각보다 대담하군요. 그 용기에 감탄했습니다.” 박진호가 거울에 비치는 한송이의 얼굴을 보면서 말하자 그녀는 “두 주일 동안이나 경기장과 배 사이만 왔다 갔다 하니까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어요”라고 말했다. 밤 11시가 넘은 고속도로에는 차들이 별로 없어서 박진호의 코란도는 거침없이 신나게 달렸다.
 
한참을 달린 후 코란도가 멎은 곳은 해운대 달맞이 고개 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노래방 “파도” 앞이었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박진호는 노래방 입구 밝은 불빛 아래서 처음으로 한송이의 전신을 자세히 바라다보았다.
 
“옷이 대충 맞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송이씨. 그걸 입으니까 몸매가 훨씬 더 예뻐요. 북에서도 블루진 입나요?” 그가 말하자, “이런 옷은 없어요. 러시아 영화에서만 보았을 뿐이야요”라고 그녀가 대꾸했다. 박진호는 자기의 오른 팔을 한송이의 오른쪽 어깨에 가볍게 올려놓고 왼손으로 노래방 문을 열었다.
 
안에 들어가자마자 한송이는 먼저 화장실로 들어가 바닷물에 젖었다 마른 머리를 다시 깨끗이 수돗물로 씻고 그곳에 비치되어있는 헤어 드라이어로 말린 다음 빗으로 단정히 빗었다. 그리고 나서 룸으로 들어가자 단골 손님인 박진호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주인 겸 마담이 “어서 오세요. 박기자님이 오늘은 대단한 미인과 함께 오셨네요” 한다. 그건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정한 칭찬이었다. 그러고 보니, 화장을 하지 않은 한송이는 더 아름다워 보였다. 화장품의 가면을 벗어 던진 그녀의 피부는 더 하얗고, 그녀의 볼은 연지 바른 것 보다 더 볼그레했다. 화장을 하지 않았을 때 예쁜 여자가 진짜로 아름다운 여자라고 박진호는 항상 생각해 왔었는데, 한송이가 바로 그런 여자였다.
 
수인사가 끝난 후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마담은 “말투로 보아 북쪽 사람 같은데, 옷차림을 보면 북한 응원단 아가씨는 아닌 것 같고, 그럼 중국에서 온 조선족 아가씬가?” 한다. 박진호는 뜨끔했으나 “맞아요. 조선족 아가씨에요”라고 받아 넘겼다. 그리고 “우리 국산 와인 한병 하고 마른 안주 좀 갖다 줘요” 했다. 와인과 안주가 들어오고 두 사람만이 룸에 남게되었을 때 둘은 와인 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했다.
 
박진호가 먼저 “조국 통일을 위하여!”라고 외치자 한송이도 따라 외쳤다. 첫날 인터뷰할 때를 빼놓고는 매일 아침 선착장에서 잠깐씩 인사말만 나누었을 뿐이지만, 여러 차례 쪽지 편지 교환으로 대화를 나눈 그들은 이미 오래 사귄 연인같이 전혀 서먹하지가 않았다. 박진호는 미리 준비해 가지고 간 신문 스크랩을 한송이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그가 그랜드호텔에서 단독 인터뷰한 기사와 칼라사진이었다.
“이 사진 마음에 들어요?”
“네, 실물보다 더 예쁘게 잘 찍어주었네요.”
“내 눈엔 실물이 훨씬 더 예쁜데요, 뭘. 이 사진을 보고 반한 부산 총각들이 청혼을 하겠으니 만나게 해달라고 신문사로 전화를 많이 걸어왔어요.”
“그래요? 영광입니다.”

 

-  글 | 조화유 재미 작가, 영어교재 저술가 / 2014-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