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월간조선(月刊朝鮮) 2006년 12월호에 쓴 기사이다.-[1]

paxlee 2016. 11. 19. 22:07



아래의 글은 조갑제(趙甲濟)씨月刊朝鮮 2006년 12월호에 쓴 기사이다.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에도 김대중-노무현 세력
은 북핵(北核)저지는커녕 기존 대북정책(햇빛-포용정책)을 그대로 이어갔다. 마땅히 한미(韓美)동맹을 강화하고 유엔과
 협력해 대북제재에 들어갔어야 했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세력은 반미친북(反美親北) 노선을 강화했다.
--------------------------------------------------------------

   『미국이 못살게 굴어 核실험』

   
   지난 10월9일 金正日이 核실험을 한 이후 한국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예상 외였다. 金正日이 核실험을 하
면 그동안 對北 굴종적 태도를 보여 왔던 盧武鉉 대통령도 일선을 긋고 대결자세를 취할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
관측이었다. 10월9일 오후 盧대통령은 그런 자세 변화를 강하게 시사했다.
  
   『한국 정부도 이 마당에 와서 포용정책만을 계속해서 주장하기는 어려운 문제 아니겠습니까. 효용성이 더 있
다고 주장하기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난 날처럼 모든 것을 인내하고 양보하고 북
한이 어떤 일을 하든 간에 다 수용하고, 이렇게는 해나갈 수 없게 된 것 아닙니까』
  
   기자는 이 말을 듣고 나의 홈페이지(natizen.com)에 이런 글을 올렸다.
  
   <위에서 말한 인식변화를 盧대통령이 행동으로 옮기는지를 지켜보아야 국민들은 속지 않게 된다. 盧대통령의
 말을 믿으면 절대로 안 된다. 그의 실천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너무나 엄청난 태풍이 불어오니 여기에 맞서다
간 날아가 버린다」는 위기감에서 일단 피하고 보자는 뜻에서 한 변명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는 우선 인책인사를 해야 한다. 통일부 장관, 국방부 장관 등과 청와대의 안보관련 참모들을 잘라야 한다.
와대와 정부핵심 자리에 앉아 있는 386 주사파, 즉 「金正日 추종 공산주의 운동권 출신들」을 내보내야 한다.
 들이 국민들을 저주하고 미국을 공격하면서 對北 굴종정책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盧武鉉씨에 대한 국민들의 不信은 그가 金正日의 對南 공작에 적극 호응한 배경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核개발, 韓美연합사 해체, 보안법 폐지, 연방제는 金正日 정권의 4大 對南 적화전략이었다. 盧정권은 전폭적으로
이 4大 전략을 지원하고 동조했다. 이런 일들이 없었던 것처럼 치부하고 말을 만들어내어 국민들을 설득할 순 없
다. 盧武鉉의 과거정리가 필요하다>
   
盧대통령이 정책 전환을 모색하고 있던 지난 10월11일 金大中 前 대통령은 전남大 한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북한의 核보유를 악의적으로 무시하고, 압박과 경제제재를 계속하면 북한의 도발을 조장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
다. 對北 포용정책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해괴한 여론이 돌아다닙니다.
  
   北核실험은 햇볕정책이 아닌 미국이 못살게 굴고 살길을 열어 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北核실험을 두고
햇볕정책을 거론한 것은 타당한 주장이 아닙니다』
  
  
   2007년의 內戰的 상황
  
   이는 누가 보아도 盧대통령에 대한 압박이었고 곧 효력을 발휘했다. 盧대통령은 기존의 對北정책을 계속하기
로 결정했다. 금강산관광을 계속하고 통일부 장관에는 이종석 現 장관보다 더 「왼쪽」인 이재정씨를 내정했다.
한때 「脫김대중」을 모색했던 盧대통령은 金大中씨 집을 찾아가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등 굽히고 들어가는 모
습을 보였다.
  
   盧대통령이 급조했던 열린당이 스스로 수명이 다했음을 선언한 가운데 前·現職 대통령이 결속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2007년 대통령 선거의 주도권을 金·盧 두 사람이 쥐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들도 나오기 시작했
다. 권력을 쥔 현직 대통령과 유권자의 약 25%의 여론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전직 대통령이 악수하면 한국의
左派(좌파)와 호남세력이 연계되어 막강한 표집단이 될 수 있다는 계산에서 나온 말이다.
  
   문제는 「盧武鉉+金大中」 연합세력이 金正日 요소를 선거판에 끌어들여 다시 從金정권을 만들어 내려고 무리
를 할 가능성이다. 金大中씨의 이념성향과 지역기반이 金正日의 對南 적화공작과 결합된다면 한국은 지금의 「
말로 하는 內戰的 상황」에서 피를 부르는 內戰상태로 갈지 모른다는 악몽이 생긴다.
  
   애국행동 단체에선 「金正日+金大中+盧武鉉은 核개발 共犯이고 대한민국의 3敵」이란 표현을 쓴다. 일부 호남
사람들은 金大中씨를 호남사람들 손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시위도 한다.
  
   10월9일 核실험 이후 한국의 국정방향을 對北굴종 쪽으로 이끈 키 플레이어는 金大中씨이다. 그의 역할에 의해
서 盧대통령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그 다리마저 불질러 없애 버린 느낌이다. 金正日이 核실험을 하면
대한민국 대통령은 당연히 韓美동맹을 강화하고 유엔과 협력해 對北압박과 제재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盧대통령은 이런 결속이 요구되는 순간 결정적인 反美親北 노선을 취하고 만 것이다.
  
   金正日·金大中·盧武鉉 세 사람의 이런 노선은 필연적으로 이 세 사람을 공동운명체로 묶고 있다. 金大中씨의
연결고리 역할에 의해서 남북한 정권이 공조하여 국제사회, 미국 그리고 대한민국의 헌법질서에 도전하는 형국
이 조성된 것이다. 金正日에게 돈을 주고 약점이 잡힌 상태에서 합의한 2000년 6·15 선언으로 좌익득세의 사변
적 상황을 만든 金大中씨의 위험한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鮮于宗源 검사와 보도연맹 강사
  
   여기서 큰 의문이 하나 생긴다. 金大中씨가 盧武鉉 대통령을 끌어당겨 미국과 유엔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힘과
의지는 자신의 것인가, 아니면 金正日의 작용이 들어간 힘과 의지인가? 金大中씨가 보여 준 金正日에 대한 이해
할 수 없는 일방적인 태도는 단순히 굴종적이라는 말로써 표현할 성격이 아니다.
  
   그는 지난 6월 訪北(방북)을 추진하다가 金正日로부터 매정하게 거절당해 국제적인 창피를 당했다. 그는 金正
日에 대한 강한 유감을 드러내어야 할 입장인 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북한이 공개적으로 核실험을 예고하자 金大中씨는 거의 매일 공갈치는 金正日을 편들고, 미국을 비난하는 캠페
인을 벌였다. 「북한의 核무장은 물론이고 심지어 6·25전쟁에도 미국의 책임이 있다」는 식의 극좌적 역사관을
피력했다. 「이런 사람이 과연 한국의 대통령이었나」 하는 놀라움은 연속되는 더 놀라운 발언들에 묻혔다.
  
   그의 말대로라면 미국은 그의 생명을 두 번 살려 주었다. 1973년 납치사건 때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
고를 받았을 때다. 그런 그가 미국에 대해서 「金正日을 악의적으로 무시하고 못살게 굴어 核실험을 하도록 했
다」고 공격했다.
  
   미국의 동맹국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더구나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람이 미국에 대해서 「악의
적」·「못살게」란 표현을 공개적으로 할 정도라면 金大中씨는 속으로는 미국을 원수처럼 여기고 金正日을 사모
하든지 북한을 사상적 조국으로 여기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金大中씨가 드디어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었다』라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한 지난 10월 말에 기자는 鮮于宗源
(선우종원) 변호사를 찾아갔다. 4년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鮮于변호사는 광복 직후 좌·우익 대결에서 오제도 검사와 함께 좌익 소탕에 앞장섰던 공안검사 출신이다. 그는
서울지검에서 근무할 때 「保導(보도)연맹」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여러 수사기관에서 같은 좌익사범을 돌려
가면서 조사하고 무리하게 범인을 만들기도 하는 것을 본 공안검사들은 한 번 수사를 받고 나온 좌익사범에 대해
서는 신고를 받아놓고 더 이상의 수사를 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1949년에 좌익 전략자(前歷者)의 신고를 받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20만 명 이상의 신고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을 보도연맹으로 조직한 검찰은 경찰과 협조해 교육을 하게 되었다. 보도연맹 설립자인 鮮于 당시 검사는
『공산주의자들을 전향시키는 데는 전향한 공산주의자가 강사로 나서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鮮于변호사는
 4년 전 기자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서소문의 배재학당이 있던 자리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교육을 하고 있었어요. 1950년 초로
 기억됩니다. 전국에서 道별로 두 사람의 보도연맹원을 강사요원으로 추천받게 되었어요. 나는 전남·북을 맡았는
데 이때 전남에서 올라온 강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가 공산주의 이론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는데 어떻게나 청산유수로 잘 하는지 겁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눈이
 새까맣고 얼굴은 통통한 사람이 참 똑똑해요. 첫 강의가 끝난 뒤 제가 그를 검사실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추궁했
습니다.
  
   「오늘 강의를 들어보니 의심이 간다. 최근까지 공산당 했던 사람이 그렇게 공산주의를 비판할 수 있나? 공산
주의의 문제점을 그렇게 잘 알았다면 일찍 전향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물었더니 「진심으로 전향했다」고 맹세를 하더군요. 그 뒤 이 청년을 강사요원으로 썼는데 아마 6·25
 때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보도연맹 교육에 참여했을 겁니다. 이 청년이 金大中씨였습니다』
   
글 |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