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가 퍼온글

아름다운 완전주의자 김서형

paxlee 2019. 2. 5. 06:56

 

아름다운 완전주의자 김서형

“악역 아껴줬으면...나는 '예서'보다 유리 멘탈"

"우리는 ‘스앵님'을 아껴야해요"
"노력하고 또 노력, 이래도 나를 캐스팅 안 해?"
"샤를리즈 테론, 샤론 스톤 보며 악역의 포즈 연기"
"염정아와는 리허설만 해도 기가 다 빠져나가"
"예쁘진 않지만 좋은 배역 맡으며 멋있어져"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전대미문의 악녀 ‘김주영'을 현실감 있게 소화한 아름다운 완전주의자 김서형(47세)./사진=고운호 기자

 

자식의 서울 의대 입성을 앞둔 가장 화려한 날. 장총으로 제 머리통을 날려버린 영재 엄마(김정란 분)의 피투성이 시신을 눈 아래 내리 깐 채 jtbc 드라마 ‘SKY캐슬'은 시작했다. ‘we all lie’라고 울려 퍼지는 주제가와 달리, ‘스카이캐슬' 사람들은 거짓말에 서툴다. 그들은 우아하게 자기를 감추기보다 욕망의 직설화법을 택한다. 그들은 열등감과 수치를 드러내는 데 부끄러움이 없다.

보통 사람인 시청자들이 ‘스카이캐슬'에 그토록 열광했던 이유는 소위 상류층 전문직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속물근성을 훔쳐보며 마음껏 비웃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언제든 등 돌릴 수 있는 이 완벽한 이웃들의 삶은 처절한 코미디다. 샤넬 트위드 재킷에 의사 가운을 입고도 머리끄덩이를 잡고 ‘아갈머리를 찢어버릴라'고 위협하는 모습이라니.

자식을 ‘서울 의대'에 보내려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부모들은, 목표지에 도달하기 전엔 웬만해선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다. 까마득한 계층의 사다리를 걷어내려던 내부 고발자 ‘혜나'가 캐슬의 가장 높은 곳에서 떠밀려 죽은 후에야, 그들은 비로소 당황하며 되묻기 시작한다.

‘빅 브러더' 김주영 ‘스앵님'이 세뇌하듯 경고했던 그 말 "감수하시겠습니까?"의 의미를.

"어머니,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내가 합격시켜줄 테니까, 얌전히, 조용히, 가만히 있어. 죽은 듯이." "감수하시겠습니까?"

이 블랙 코미디의 최전선에서 중산층의 고막을 황홀하게 후비던 최면술사, 자식 가진 부모를 마음껏 조종했던 입시계의 ‘빌런’이 나는 몹시 궁금했다. 검은 옷을 입은 사제처럼, 왜 그녀가 말하면 뭐든지 믿고 싶어지는 걸까? 새끼를 맡긴 자는 새끼를 맡은 자 앞에서 왜 항상 저자세인가?

"부모라면 기다려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가슴을 때리는 호통과 "너, 니 새끼 서울 의대 보내는 거 포기 못 하잖아?" 싱싱한 미끼로 부모를 농락하던 그 농밀한 발성. 두 개의 목소리는 우리 안에 있던 빛과 어둠의 동굴에 닿아 깊은 파장으로 반복재생되곤 했다.

 

 

“한서진이나 저나 서로 갖고 놀려고 했잖아요.” 자식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궁지에 넣으려고 했던 비극의 제로섬 게임은 대한민국 부모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사진=고운호 기자
데뷔 이래 가장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김서형을 만났다. 토요일 오후 3시,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그녀가 걸어들어왔다. 다스베이더 같은 어두운 모습은 간데없고, 멀대처럼 키 큰 여자는 연하고 수수한 3월의 버드나무 같았다.

1월의 겨울은 해가 짧고 2층 카페는 자연광이 들지 않아 실내는 어둑어둑했다. 블랙커피 한 잔으로 목을 축이던 그녀가 이를 드러내고 배시시 웃었다. 역광에 그늘진 실루엣이 ‘커피 광고'의 한 장면 같았다. 인터뷰 내내 그녀가 가장 많이 내뱉은 말은 ‘많이 울었다'와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았다'였다.

쫓기는 사람 같은 눈빛으로 "매 장면 신애리의 환영과 싸웠다"고 "사실은 난 예서 보다 약한 유리 멘탈"이라고, "매번 과대평가된 김서형을 좇아가느라 힘들었다"고 스스로를 코너로 몰다가도, 불쑥 기억난 듯 "나는 캐릭터를 어떻게 마케팅해야 하는지 선험적으로 알고 있었어요." 홀연히 자기신용을 드러내며.

상류층 가정을 쥐고 흔든 후 통렬하게 반성하게 만드는 이 검은 옷의 외부자는 김서형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 힘들다. 빅토리아 저택처럼 우아한 이목구비를 쳐다보며 그녀에게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그런 악역을 어떻게 감수하셨습니까?

"감수하지 않았어요(웃음). 처음엔 두 번이나 거절했어요. 이런 역할을 하면 내가 어떤 고통을 받는지 알아서 나는 못 한다고 했어요(웃음). 아무리 매력적이라도, 나 이거 하면 아파서 쓰러진다고. 그랬더니 다 받아주겠대요, 우리 사무실 식구들이. 하하. 그런데 저, 너무 많이 울었어요."

배우가 악인을 연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캐릭터를 사는 동안 배우는 그 행위가 악랄할수록 박수받고, 저주받은 만큼 사랑받는다. 타인의 삶을 망가뜨릴수록 자신의 삶도 파괴된다는 이치를 알기에, 악을 연기하는 배우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그렇게 김서형이 ‘김주영 선생'으로 사는 동안, 미움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고 꼭 미움이 전부일 것 같지도 않은 일들이 성곽의 모퉁이마다 널려있었다.

 

 

포커페이스의 달인. 믿음을 주는 배우 김서형. 2008년 ‘아내의 유혹'의 시청률을 40%까지 끌어올리기도 했다./사진=고운호 기자

 

-전적으로 감수했다는 증거지요(웃음). ‘어머니,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할 때 굉장한 확신이 느껴졌어요. 그 표정, 그 발성이 주는 최면 효과가 대단하더군요.

"모르겠어요. 모르겠어. 휴… 김주영에 대해서는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 많았어요. ‘전적으로' ‘감수하시겠습니까?' 이런 말투를 엄마와 아이들이 어울려 사는 현대물에 써야 하니까… 다들 가족으로 뭉쳐서 지지고 볶는데, 나 혼자 이런 사극 말투로 균열을 일으킨다는 게…"

-‘캐슬'의 패밀리들을 바깥에서 조종하는 외부자였으니까요.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일종의 빅브라더랄까요.

"김주영이 한서진을 대할 땐 아래로 보듯 하죠, 태도가. 하하하. ‘감수할 수 있느냐?'는 말도 앞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얘기잖아요. 표정이나 분위기로 중압감을 줬는데, 그게 코미디에서 잔뜩 패러디되더라고요(웃음)."

-염정아 씨와의 기 싸움이 팽팽했어요. 상대를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더군요.

"우리 둘이 만나면 알 수 없는 분위기가 생겼어요(웃음). 리허설 때부터 그 텐션이 어마어마해서, 기가 다 빠져나가곤 했어요."

캐슬 사람들은 다 김서형이 쳐놓은 그믈 안에서 아우성쳤다. 그들은 그녀가 없는 공간에서도 그녀를 대놓고 숭배하거나 경멸했다. ‘그 여자' 혹은 ‘스앵님'이라는 이름으로.

-괴테의 ‘파우스트'의 멤피스토 같다는 평도 있더군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분이 어땠나요?

"혼자 있을 때든 같이 있을 때든 혹은 제가 없을 때든 저는 크게 보여야 했어요. 감정을 감추고 사이보그처럼 연기하지만, 상대에게 전해지는 진폭이 굉장히 큰 인물이었어요. 사실 다른 사람의 마음보다는 제 마음을 조절하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저는 드라마 ‘아내의 유혹'의 신애리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이 컸습니다."

 

 

현대 무용수처럼 위엄 있는 김서형의 포즈는 이 ‘막장’같은 풍자극에 클래식한 맛을 더했다./사진=고운호 기자

 

-‘김주영'은 훨씬 현대적이고 복잡하고 위엄을 갖춘 여성이에요. 당신은 ‘아내의 유혹’의 신애리에서 아주 멀리 와 있어요. 그걸 믿기가 어렵던가요?

"10년이 지났지만, 내가 신애리 이상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 그런 불안이 제게 늘 있어요. 그동안 ‘샐러리맨 초한지’ ‘기황후' ‘자이언트' ‘굿와이프' 등 많은 드라마를 했지만, 저의 그 10년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아요(웃음). 매 순간, 두려움이 올라왔어요. 혹시나 이전의 흔적이 내 연기에 묻어나오는 건 아닐까… 혹시 내가 고급스러운 신애리를 연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트라우마가 있었죠."

-이제 그만 신애리는 잊으세요. 충분히 달랐어요.

"제가 김주영을 잘 해냈다면 그건 10년의 세월 덕이에요. 그동안 전문직 여성도 하고 시대극도 하면서, 조용히 그 캐릭터를 쌓아와서죠. 그런데 역시 김주영은 뛰어넘기 힘든 여자였어요(웃음)."

-악역의 클래스가 역대급이죠. 모든 상대의 마음에 반응해가면서요. 당신의 상대역은 누구라고 생각했나요?

"감독님이 얘기한 건 딱 하나였어요. 김주영과 한서진은 같은 인물이라고. 일종의 쌍둥이 자매 같달까요. 저는 이미 젊었을 때 딸 케이를 최고의 영재로 키우려다 망가뜨려 봤어요. 한서진은 10년 전의 김주영이에요. 그 끝을 아니까 계속 다그치는 거예요. "감수하시겠습니까?"라고. 자식을 자기 욕망으로 채우려는 엄마들, 잘났다고 떠들어도 내 앞에선 다 우스운 존재들이니 손바닥 안에 있는 거죠. 게다가 둘 다 자기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자식을 그 지경으로 몰고 갔으니까요."

-둘은 같은 사람이다…

"네. 한서진이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하시는데, 저는 누가 살인을 저질렀느냐보다는… 그 둘은 공범이라고 생각해요. 결국 비뚤어진 생각은 참된 노력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지고 만다는 사실이 다행인 거죠."

-염정아 씨도 김서형 씨도 둘 다 발성과 딕션이 좋고 ‘신경증'적인 장악력이 있어요. 그녀를 경쟁 상대로 생각했나요?

"아니요(웃음). 가장 비슷한 사람이라, 언니가 TV에 나오는 걸 그저 열심히 봤어요. 저와는 제한된 공간에서 만나니까. 언니가 아이들에게 가는 모습, 식구들과 사는 모습… 제가 비상구를 못 찾을 땐 그 모습을 보고는 했어요. 엄마로서 병적인 모습, 그런데 제가 훨씬 더 병적이더라고. 하하하."

-어떤 장면에서 쾌감을 느꼈지요?

"한서진이 선짓국집 딸 곽미향이라는 사실을 알고 박장대소할 때요. 아 하하하하. 그 장면이 저는 정말 좋았어요(웃음)."

 

 

최소한의 근육을 움직여 상대를 자극하는 김서형의 미니멀한 연기./사진=고운호 기자
시청률이 20%를 넘어갈 때는 배우들도 현장에 와서 소란과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고. "우리 이보다 더 어떻게 더 잘해?" 걱정과 환호를 오가며. 선의의 경쟁에 신경줄이 바짝 타들어 가면서도.

-인생 캐릭터라고 확신했나요?

"저한텐 미지수였어요. 저, 사실은 예서 보다 유리멘탈이라…"

-저런, 하지만 쉽게 부서지지 않는 강화유리 멘탈인가 보죠(웃음). 어쨌든 자기를 견고하게 잘 지켜왔어요.

"평소에도 일에 대한 욕심이 해결이 안 될 때, 답답해서 많이 울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집에서 거의 매일을 울었어요. 슬퍼서는 아니에요. 김주영의 데미지가 제게 있었던 거죠. 천재였다가 바보가 된 딸 케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올 때, 그 마음을 나 혼자 갖고 있는 게 지독하게 외로웠어요. 이런 감정 노동, 배우면 당연한 건데. 제가 너무 칭얼대죠?"

날카롭게 날이 섰던 눈매가 처지도록 웃으며 그녀가 물었다.

드라마 후반부에 사무실을 찾아온 정준호에게 멱살을 잡히고 패대기쳐지는 장면에선 벽에 부딪혀 온몸에 타박상을 입었다. 저주와 악담을 퍼붓다가도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나 먼저 퇴근한다!" 얄밉게 상황을 정리할 땐, 순식간에 얼어버린 활화산을 보는 것 같았지. 시속 200km 속도로 커브를 돌다 급브레이크를 밟았는데도 흔들림이 없는 그 느낌… 그런데 TV 브라운관이라는 사각의 링에서 김서형은 에어백도 없이 맨몸으로 버티고 있었구나.

‘아갈머리 찢어버릴라'라는 과격한 입심으로 상대를 위협하는 한서진과 달리, 김주영은 속눈썹 몇 가닥으로 상대의 기를 눌러버리는 나노급 제스처를 선보인다. ‘너 따위한테 쓰다버려지지 않겠다'고. 신경증과 히스테리의 달인인 염정아와 미니멀한 동작으로 자제력 있는 ‘악인’을 연기하는 김서형이 30대에 붙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니, 만약 두 사람의 배역이 바뀌었더라면.

-표현이 과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덜한 사람도 있지요. 서형 씨는 후자 쪽인 듯합니다. 감정의 미니멀과 맥시멈을 표현하는 데 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까?

"저는 제가 이렇게 카메라를 좋아했나, 처음 알았어요(웃음). 감독님이 카메라를 세워놓은 적이 없어요. 어깨에 메고 저랑 똑같이 연기하면서 끝까지 잡아줬어요. 혜나에게 "잘 가렴"하는 장면에선 제가 혼자서 제 목을 이렇게 졸랐거든요. 그게 제 나름의 복선이었는데, 그걸 다 알아채시는 거예요. 아, 이분들이 무당이구나(웃음)."

-존중받는 느낌이었겠군요.

"신이 나죠. 스태프들의 공이 정말 커요."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는 완전주의자의 얼굴./사진=고운호 기자

 

-특별히 더 가슴에 남는 대사가 있나요?

"한서진에게 처음 물세례를 받고 했던 대사가 생각나네요. "기다려줬어야죠. 영재가 아무리 집을 떠나 가을이에게 도망쳤어도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줘야 하는 사람이 부모 아닙니까?" 그 말을 울림 있게 하고 싶었던가 봐요. 그리고 또 명상실에서 한 대사들… 예서에게 "너를 방해하는 사람은 설령 엄마일지라도, 물리치라"는. 글쎄, 모르겠어요. 나는 왜 그런 대사들에 꽂혔을까(웃음)."

궤변이든 최면이든, 그녀 안에 두 가지 모순된 목소리가 충돌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자기애는 강하지만 자존감은 약했던, 그렇게 부서지고 접합되기를 반복하던 과정에서 점점 더 강하게 반짝이는 크리스털로 조형되어가는 김서형을 보는 건 기분 좋다.

짧게 친 커트 머리, 기다란 코와 차가운 눈을 지닌 이혜영, 박선영 류의 ‘매니시한' 여배우들의 계보에서 김서형도 예외가 아니었다. 도도한 커리어우먼이나 악녀로 일관된 커리어. 그라고 왜 다른 욕심이 없었을까? "배우는 어쨌든 연기를 해야 하잖아요. 이해는 하지만, 해야 했지만 혹시 그 과정에서 내가 나를 반복하며 있지는 않았을까, 그런 조바심은 있었어요." 하지만 25년 차 배우로 살면서 대중들에게 섭섭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어떤 목표 의식이 있었습니까?

"민폐 끼치지 말자, 그래도 나는 조금씩 잘 쌓아가고 있다, 그런 마음. 어쨌든 목표는 롱런이잖아요. 제가 CF 퀸도 아니고, 예쁜 거로 인기를 얻는 스타도 아니잖아요. 그 과정에서 저는 제 매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지점을 알았던 것 같아요. 대중이 원하는 시선 안에서 최대치의 무언가를 해내는 법을. ‘신애리' 이후 10년간, 뭔가 확 터지진 않았어도, 김서형과 그 캐릭터는 살아남았던 거고요."

-자기를 지켜내며 일했던 거군요.

"그랬던 게 대중들이 마지막 심판자지만, 저는 사실 제 시선의 기준이 더 중요했어요. 제 나름대로 생명력을 잃지 않으려고 ‘서치'를 많이 했어요. 이를테면 샤를리즈 테론이나 샤론 스톤의 고혹적인 악역 연기. 영화의 매 장면을 다 돌려보진 않아도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를 계속 몸에 저장하는 거죠."

모든 것은 디테일에 있다고, 김서형의 몸가짐에 배인 서늘한 톤앤매너가 이제야 납득이 갔다.

 

 

“초심을 잃지 말자, 민폐 끼치지 말자"라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김서형. 학창시절 방송반에서 시작해 혼자 시를 읽고 녹음을 하며 발성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사진=고운호 기자

 

-미스 강원 출신이지요? 미인대회는 왜 나갔습니까?

"배우가 되려고요(웃음). 일단 미스코리아에 출전하려고 나갔는데, 그 해에 예쁜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미를 세 명 뽑았는데, 그중에 가장 덜 예쁜 미였어요, 제가. 하하. 서울 대회 나가려면 또 돈이 많이 필요했는데, 집안 형편이 그 정도는 안돼서 포기했죠. 당시엔 열아홉 어린 나이라 ‘아, 돈 때문에 멈춰야 하다니' 억울해했는데, 지금 보니 다른 친구들이 더 예뻤어. 하하."

-배우가 아닐 때 일상생활은 어떻게 유지해요?

"일할 때 에너지를 과하게 쏟아내서 평소엔 백지상태로 있어요. 저의 재능일진 몰라도 배우들이 준비한 걸 현장에서 빨리 흡수하는 것도 제가 제로 상태니까. 버스를 타든 산책하든 마트에 가든 저는 사람들을 가만히 관찰하는 걸 좋아해요. 군고구마 파는 아저씨가 뭘 하나 빤히 쳐다볼 때도 있어요."

-사람을, 사물을, 침착하게 바라보는군요.

"네. 제가 발랄한 면도 있지만, 사실은 정적이에요."

-SNL에 출연한 걸 봤어요.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소개팅녀' 영상을 보고 빵 터졌습니다.

"하하. 제가 그런 데서는 또 좀 제멋대로예요. SNL은 제가 예능 공간으로 살짝 들어가는 거잖아요. 놀러 가는 거니까, NG가 나도 그 모습 그대로. 왜? 난 게스트니까. 그런 공간에서까지 완벽주의적으로 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그럴 땐 또 남의 눈치를 안 봐요."

칸 영화제 레드카펫에서 과감한 의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드라마 배역에선 0.1mm의 오차도 없이 ‘핏'을 맞추면서 그 지점을 벗어나면 또 ‘내 멋대로 산다?’. 엉뚱하고 과감하네요. 영화 ‘악녀'의 레드카펫 룩도 그런 우발성의 산물인가요?

"그렇죠. 그때 머리도 삭발하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하도 말려서(웃음). 합의 본 게 ‘반삭’이었어요. 옷도 스타일리스트가 브라톱을 준비했다고 해서 블랙보다는 흰색이 낫겠다, 정도로 골랐을 뿐, 그 옷이 칸에서 또 그렇게 화제가 될 줄은 몰랐어요. 드라마 의상은 또 자세가 달라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공을 들이죠. 캐슬 퀸들이 컬러풀하고 화려하게 가니까, 저는 블랙으로 가야겠다, 결정하고선."

-옷 한 벌 피팅하는 데만 6시간 걸렸다는 게 사실인가요?

"네. 감정선에 맞게 디자인, 디테일, 원단 다 다른 것으로 꼭 맞게 입었어요. 시청자분들이 보기엔 다 같은 블랙일지 몰라도, 저는 대본의 흐름대로 장면마다 몸을 맞췄어요. 완벽주의의 끝까지 갔죠, 하하."

-롤모델이 있습니까?

"어릴 땐 이혜영 씨 얼굴을 좋아했어요. 연기하는 모습에선 ‘디어 마이 프렌즈'의 김혜자 선생님 보고 ‘아, 저분과 같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누군가를 ‘롤모델'로 우러러본 적은 없어요. 어린 나이에도 감사하게도 카리스마 있는 배역을 해냈고, 늘 김서형이 가지고 있는 한계치를 넘어섰어요. 과대평가된 김서형과 같이 살다 보니, 아, 나도 산전수전 겪으며 ‘김서형'이라는 배우를 믿어주게 된 거죠."

-남들의 기대치, 나의 기대치 사이에서 외적으로 기품을 유지하는 비결은 뭔가요?

"저는 저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정직했어요. 나의 재능, 나의 노력, 나의 실패를 꿰뚫어 보고 항상 의문을 가졌죠. 나 자신을 뛰어넘고 싶을 땐 유일하게 카메라 앞에서예요. ‘열심히 할 거야. 이래도 나를 캐스팅 안 해?’속으로 윽박지르면서, 하하. 그 외의 공간에선 말씀드렸다시피 ‘멍때리면서’ 나를 비워뒀어요."

-거울을 보면 본인의 얼굴이 맘에 들어요?

"멋진 역할들을 만나 멋있어진 것 같아요. 그런데 다시 봐도 예쁘진 않아(웃음)."

-당신의 어떤 면이 자랑스러운가요?

"열 아홉살 때부터 집을 떠나와서 가끔은 흐트러질 때도 있지만 다시 쓸어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나를 믿고 신뢰했어요. 10년 동안 나를 던지면서 일했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톱배우들도 오디션을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2017년 영화 '악녀'에서 김서형. 많은 액션을 선보이지도 않았지만 숙희(김옥빈)를 끝까지 휘두르는 인물로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영화에선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과 ‘악녀'를 대표작으로 뽑는 데 동의하나요?

"아니요. 저는 조근현 감독과 했던 ‘봄'이라는 작품을 좋아해요. ‘악녀'는 칸에 진출했으니 의미 있었지만,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은 노력과는 달리 저에게 ‘에로배우'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붙였어요(웃음). 전 분명 KBS 16기 탤런트로 시작했는데요, 하하."

-유년 시절은 즐거웠습니까?

"말 터질 때부터 배우가 되겠다고 그랬대요, 엄마 말씀이. 어릴 땐 아빠와 ‘주말의 명화’를 봤고, 아바의 노래를 들었어요. 유년기부터 고등학생 시절까지 강릉에서 보낸 게 제겐 행운이었어요. 등하교할 땐 코스모스길을 걸으며 이문세 노래를 흥얼거렸죠. 심심할 땐 고구마 서리도 하고, 힘들 땐 바다에 나가 물만 쳐다봤어요. 사춘기 시절엔 우울과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고. 그런데 그거 아세요? 저는 지금이 정말 좋아요."

-20대와 30대를 잘 헤쳐온 자신이 대견한 거죠.

"네. 제가 소띠예요. 올해로 마흔일곱. 20대, 30대 때는 현장이 공평하지 않아서 분노가 컸어요. 그런 불의한 모습에 항의하다 방송국에서 제명될 뻔도 했고. 지금도 난 그런 건 못 참겠더라고(웃음)."

-‘스카이캐슬'이라는 드라마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짚어준 거죠. 우리가 쉬쉬하면서 수다 떨던 그 이야기를. 시사 프로그램에서나 나올 법한 실화들을. 돈이 있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 돈이 없어도 꿋꿋하게 사는 사람들. 본성, 욕망, 인성의 불편한 지점들을 다 드러낸 거죠."

 

 

하나의 완벽한 캐릭터가 탄생하기까지, 배우들의 인생은 저 멀리서 그 캐릭터를 향해 천천히 달려온다./사진=고운호 기자

 

-그 정중앙에 당신이 있었어요.

"감사하죠. 오해하실 수도 있는데, 여러분들이 앞으로도 악역을 아껴줘야 해요. 캔디 역할은 만나는 사람도 많고 좋은 감정을 나누지만, 악역의 감정 소비는 좀 달라요."

-우리가 김서형을 아껴야 한다?

"(손사래를 치며)그렇게 말하면 공평하지 않잖아(웃음). 악역이든 무엇이든 저는 공평하게 오디션 볼게요. 작가도 감독도 여러분도 배우 보는 눈을 넓게 가져주세요. 악역을 아끼면서요."

이제껏 본인이 가장 잘한 일은 연기를 한 것과 요크셔테리어 종의 강아지 ‘꼬맹이'를 14년간 키운 것이라고. 여리고 약한 동물을 키워보니, 모든 생명체는 믿어주는 만큼 예민하게 반응하더라고. 그러니 "여러분도 자식이 갓 태어났을 그때처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기다려주라"고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광고가 쏟아지고 있다는 소문과 달리 ‘문의'만 많다고 사랑스럽게 징징대며.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손바닥 뒤집듯 캐릭터와 배치되는 CF는 맡고 싶지 않다고, "갚아야 할 대출은 남아있지만, CF로 먹고살건 아니니까요." 생활의 냄새가 없는 완전주의자 호탕하게 웃었다.

이쪽과 저쪽은 있되, 중간은 없는 것 같은 김서형. 온몸에 자신을 채찍질해서 얻은 악의 멍 자국이 시퍼런데도, 찰과상 하나 입지 않은 것처럼 청량한 자존감을 내보이는 무중력의 자아. 이걸 순진이라 할까, 순열이라 할까.

자신의 문체를 끝까지 지켜낸 작가처럼, 총구 앞에서 마지막 동작을 완성한 무용수처럼, 가끔은 선악을 넘어서 한 인간의 미학적 의연함에 감탄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훈은 ‘계몽'이나 ‘회심' 이 아니라 일관된 ‘태도'를 목격할 때 다가온다. 비극을 기어이 비극으로 완성하려는 자, 제 몫의 절망으로 마침표를 찍으려는 ‘문제적 인간’은 보는 이들의 가슴 속에 강렬한 표상을 남기지 않던가.

영화 ‘러브액추얼리’ 스타일의 낯간지러운 대사 "미안해요, 사랑해요"를 연발하며 환타지적인 봉합을 이어가던 ‘스카이캐슬'은 역시나 더 센 욕망의 입주민과 입시 코디네이터를 소개하며 막을 내린다. "어머니,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으십니까?" 고막에 비수를 꽂듯 김서형의 마지막 대사와 함께, 이젠 정말 ‘안녕, 스카이캐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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