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이야기

와인, 라벨에 숨어있는 유럽사

paxlee 2019. 6. 9. 07:20

#52. 라벨에 숨어있는 유럽사

 12화. 와인의 명함, 라벨

 

오늘 오후 업무 미팅이 있어 협업을 해야 하는 담당자분과 인사를 나눴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호칭은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운을 뗀다.

 

처음 만난 사이이니 나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보려고 애쓴다.앞으로 긴밀히 협업을 해야 해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새로운 사람과 만남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상대의 호감을 사려면 나에 대해 설명해야 하고, 직장인에게 이러한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바로 명함이다.

 

이번 화에서는 와인의 명함에 해당하는 라벨(Label)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레이벨'이라고 읽기도 하고, '에티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 경우 구수한 한국식 발음을 좋아하니 '라벨'로 통칭하겠다.

 

와인 라벨에는 누가, 언제 수확한 포도로, 어디서 와인을 만들었는지, 언제 병 속에 와인을 넣었는지, 포도밭 이름은 뭔지, 와인 양조에 사용된 포도 품종은 무엇인지, 알코올 함량은 어떻게 되는지 등의 정보가 들어있다. 나라에 따라서는 포도밭의 등급이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쉽게 말해, 와인은 우리와 처음 대면하면 명함 대신 자신의 라벨을 우리에게 건네는 셈이다. 이를 통해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와인 가게에 가서 진열대에서 와인 라벨과 마주하게 되면 소개팅에서 얼어버리듯이 눈앞이 캄캄해질 때가 대부분일 것이다. 늘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와인은 저마다, 나라별로, 생산자별로 라벨의 타임과 정보의 양이 천차만별이라 와인 라벨을 조금 공부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와인 마스터가 될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으니, 일단 시작해보자. 와인 라벨 보는 법에 대해서 말이다.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모르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알면 확실히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와인 상식이다.

 

첫걸음이니 상대적으로 복잡한 프랑스 와인 라벨 읽는 법에 대해서만큼은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참고로 프랑스 와인 라벨의 경우에는 포도품종을 별도로 표기하지 않는다. 대부분 여러 포도품종을 일정 비율로 혼합하는 블렌딩 방식을 택해서다.

 

프랑스 와인을 살펴보면 샤또(Chateau)와 도멘(Domaine)이란 단어가 큼직하게 적혀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양조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냥 아주 후려쳐서 굉장히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자면, OB맥주, 롯데주류와 같은 표시라고 생각하면 된다.

 

통상적으로 프랑스 와인에 샤또는 보르도 지방에서 와인을 생산하는 양조장에 쓰이며, 도멘은 부르고뉴 지방에서 와인을 생산하는 양조장을 가리킨다.

 

샤또는 과거 봉건시대 양조장이 포함된 큰 저택을 가리켰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스 와인에 샤또라고 적힌 라벨에 큰 저택 그림이 들어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멘도 같은 맥락으로 추정된다.

 

그래서일까. 와인 업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프랑스 와인은 보르도(Bordeaux)와 부르고뉴(Bourgogne)에서 생산한 와인이 양대 산맥을 이룬다'라고 말이다.

 

다만 차이점도 있긴 하다. 보르도 지방에서 만드는 와인은80% 이상이 레드와인인 반면, 부르고뉴 지방에서는 레드와인용이 48% 정도, 화이트와인은 52% 정도가 된다고 한다.

 

아울러 보르도 지방 와인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어깨가 강조된 병에 와인을 담고, 부르고뉴 지방의 와인병 모양은 병 입구에서 병 바닥까지 매끈하게 떨어지면서 바닥 쪽이 큰 와인병에 병입된다.

 

와인 라벨이 중요한 이유는 생산국가의 정부 기관 혹은 와인을 공급하는 국가의 기관에 의해 승인되고 있어서다. 대부분의 와인 생산국에서는 국가적으로 와인에 대해 엄격하게 관리를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또한 와인 라벨에는 와인 라벨에는 다양한 유럽 역사 이야기가 숨어 있기도 하다.

 

여기서 모든 와인 라벨을 다 언급할 순 없지만, 대표적으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맛보기로.

 

프랑스 보르도 5대 와인으로 꼽히는 샤또 무똥 로칠드는 샤갈, 피카소 등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을 라벨로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식과 함께 찾아온 평화를 축하하기 위해 로칠드 남작이 처칠이 전쟁 중에 승리를 의미하며 사용했던 'V'자에 기초한 디자인을 젊은 화가 필립 줄리앙에게 요청했던 것이 시작으로 전해진다. 이를 시작으로 샤갈, 피카소, 키스 해링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아티스트들과 협업했고, 지금 무똥 라벨은 '예술을 위한 와인'의 경지 수준으로 끌어올려져 있다.

 

 

최근 맛봤던 이탈리아 돈나푸가타(Donnafugata) 와인도 라벨에 흥미로운 유럽사를 담고 있다. 돈나푸가타란 이름은 '피난처의 여인'이란 뜻으로 19세기 나폴리 왕이었던 페르디난도(Ferdinando) 4세의 아내,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s)에서 유래한다.

 

마리아 카롤리나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피해 시칠리아로 피난을 왔고, 그녀가 머물던 건물이 오늘날 돈나푸가타의 와이너리라고 한다. 그래서 돈나푸가타 와인 라벨에는 머리를 휘날리며 말을 타는 여성이 그려져 있는데, 마리아 카롤리나가 나폴리에서 시칠리아로 피난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비단 두 가지 사례를 들었지만, 이외에도 수많은 역사적 사실이 라벨에 녹아 들어가 있다. 그래서 와인이란 것은 생물이고, 알면 알수록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동진의 와인에 빠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