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백수의 일상 - 105.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1>

paxlee 2021. 2. 16. 15:30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고미숙 교수의 글쓰기 특강>

 

고전평론가 고미숙 교수는 20여 년간의 공부공동체 활동을 통해 경험해 온 고전 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비전과 노하우를 담은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보통 글쓰기를 여행이나 운동 등

여러 취미 활동 중 하나이거나 조금 전문적인 취미로 생각하기가 쉽지만, 글쓰기는 취미 활동 중 하나가

결코 아니며, 다른 활동들과는 다르게 어떤 본질적 능력과 연결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사람은 왜

글을쓰며, 인간의 본성과 글쓰기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왜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읽고 써야

하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실전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노하우를 들려준다.

이 책은 모두 2부로 구성되었다. 1부 ‘이론편’에서는 읽기와 쓰기의 관계에 대해서도 단순히 쓰기 위해서는

많이 읽어야 한다는 정도를 넘어 쓰기는 읽기의 연장선이자 반전이며, 도약이기에 읽으면 써야 한다면서,

삶과 세계에 대한 통찰로 가득 찬 고전들을 맹렬히 읽고 쓸 때 글쓰기는 양생술이자 구도이며 또 밥벌

이가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부 ‘실전편’은 실제 진행했던 글쓰기 강의의 녹취록을 토대로 한

것으로, ‘칼럼 쓰기’, ‘리뷰 쓰기’, ‘에세이 쓰기’, ‘여행기 쓰기’ 등 네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글쓰기 각각의 핵심적인 특징을 이야기하고 구체적인 조언을 전한다.

 

“읽기가 생명의 활동이 되려면 써야 한다. 여기 또 지독한 오해가 있다. 쓰기를 읽기 다음에 두는 것이다.

읽은 다음, 아주 많이 읽은 다음에야 쓰기가 가능하다는 오해 말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읽기와 쓰기는 동시적

이다. 읽은 다음에 쓰는 것이 아니라, 쓰기 위해 읽는 것이다. 아니, 그래야 한다. 쓰기가 전제되지 않고 읽기만

한다면, 그것은 읽기조차 소외시키는 행위다. 그런 읽기는 반쪽이다. 책을 덮는 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저 몇 개의 구절만이 맴돌 뿐이다. 그래서 어차피 잊어버릴 거 뭣하러 읽지? 많이 읽어 봤자

다 헛거야, 라는 ‘북(book)-니힐리즘’에 빠질 수 있다.

 

쓰기를 전제하고 읽으면 아주 달라진다. 부디 해보시라. 쓰기는 읽기의 방향과 강한 밀도를 전면적으로 바꿔

준다. 결코 니힐리즘 따위에 걸려들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구경하는 것과 창조하는 것 사이의 차이라 할 수

있다. 구경꾼은 영원히 구경만 할 뿐이다. 창작자도 구경을 한다. 하지만 그 구경 역시 창조의 일환이다.

마찬가지로 쓰기를 염두에 두면 읽기의 과정이 절실해진다. 읽기 또한 쓰기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1부 「2장 안다는 것 ― 읽고 쓴다는 것」 중에서)

“자존감을 회복하는 길도 어렵지 않다. 자신을 외부와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 계속 연결하여 확충

해 가면된다. 성공과 경쟁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존재의 심층적 차원에서 ‘초연결’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독서법이다. 내가 읽는 책이 곧 ‘나’ 자신임을 아는 것.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내가 곧 세계가 되고 별이 되고 우주가 된다. 그 자체가 이미 힐링이다. 세상을 경쟁과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내 존재의 광대무변한 토대이자 배경으로 여기게 된다. 그 유동성

속에서 자존감이 충만해진다. 모든 책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1부 「3장 읽는다는 것, 그 거룩함에 대하여」 중에서)

“읽으면 써야 한다. 들으면 전해야 한다. 공부도, 학습도, 지성도 최종목적은 글쓰기다. 다른 무엇일 수 없다.

그런데, 왜 이런 분할선을 방치하는가? 자본의 은밀한 전략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자본은 거의 모든

장벽을 다 철폐했다. 자본의 이동에는 국경도 인종도 지역도 없다. 대신 훨씬 더 근원적이고 심오한

분할선이 있다. 상품을 만드는 자와 소비하는 자. 영화를 만드는 자와 관람하는 자. 스포츠맨과

관객, 음식을 드는 자와 맛보는 자 등등. 이런 인식에 사로잡혀서인가. 인문학 공간에서도

지식을 전파하는 이와 지식을 구경하는 이 사이의 장벽이 견고해진 것 . 쓰는 자와 읽는 자,

말하는 와 듣는 자? 학연, 지연, 계층보다 더 선명한 구획! 그야말로 새로운 계급의

탄생을 목격한 것이다.”(1부 「4장 쓴다는 것, 그 통쾌함에 대하여」 중에서)

“아, 그때 알았다. 글쓰기는 나처럼 제도권에서 추방당한 ...이들의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수행해야 할 근원적 실천이라는 것을. 인식을 바꾸고 사유를 전환하는 활동을 매일, 매 순간 수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역시 써야 한다. 쓰기를 향해 방향을 돌리면 그때 비로소 구경꾼이 아닌 생산

자가 된다. 들으면 전하고, 말하면 듣고, 읽으면 쓴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 온전히 구비되어야 할

활동들이다. 신체는 그 모든 것을 원한다! 어느 하나에만 머무르면 기혈이 막혀 버린다.

막히면 아프다. 몸도 마음도. 통즉불통(‘통’하면 아프지 않다/아프면 ‘통’하지

않는다)? 글쓰기가 양생술이 되는 이치다.”(1부 「4장 쓴다는 것, 그 통쾌함에 대하여」 중에서)

“실제로 글을 쓴다는 건 인생과 세계를 마주하는 것이다. 산다는 건 결국 누군가를 만나고 이 세상에 대해

알아 가는 과정이다. 글쓰기는 그걸 언어와 문자로 하는 것뿐이다. 글쓰기에서 제일 중요한 건 사람에

대한 관심이다. 또 세상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게 안 되면 글이 제대로 나오

기가 어렵다. 자신 안에서, 자의식의 굴레 안에서 맴돌기 십상이다.”

(2부 「1장 칼럼 쓰기: 1,800자의 우주」 중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라고 하면 ‘공부를 생업으로 할 생각이 없는데 그걸 왜 읽어요?’ 이런 식으로 반문하는

분들이 더러있다. 이게 공부가 뭔지 모르는 현상이다. 내가 육체노동을 하든 공무원이 되든 혹은

택배를 하든 공부하지 않는 삶은 불가능 하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소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기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데 어떻게 자존감이 생길까? 자존감이 있어야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을 진실하게 대할 수 있다. 진실한 태도를 만들어 내는 그 힘, 그게

바로 집중력이고 책을 읽어야 되는 이유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힘과 지혜는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어야 한다. 즉, 책을 읽는다는 것, 글을 쓴다는

건 일생을 살아가면서 늘 꺼내 쓸 수 있는 최고의 자산을 확보하는 것이다.


글을 써서 밥을 버는 것도 되고, 다른 노동을 하는 데도 그 노동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을 가지면 거기서 또

밥이 생긴다. 이런 순환은 밥과 글과 책의 순환. 이것을 염두에 두고, 그러면 지난주에 텍스트를 선택했

잖아요. 선택을 했고, 왜 선택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해서 말로 전달해야 하는 것이 됩니다.

가능하면 자기가 메모한 것을 참조하되 술술 이야기를 기록하면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써야 한다! ”(2부 「2장 리뷰의 달인-되기: 텍스트와의 ‘활발발’한케미」 중에서)

 

푸코의 『말과 사물』 같은 책을 보면 푸코에 대한 존경심과 적개심이 동시에 들어요. 그러나 ‘끝까지 읽겠다’

이런 마음, 믿음이 생깁니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독서의 근육이 아주 커지는 겁니다.

예를 들면 등산하고 같아요. 남산을 맨날 돌다가 도봉산을 갔다고 하죠. 도봉산 자운봉을 가는 그

지점이 굉장히 힘듭니다. 그건 즐거움이 아니죠. 아주 힘듭니다. 그런데 믿습니다. 여길 넘어

가면 내 안에 능력이 생긴다. 그리고 자유가 생긴다고요. 자유는 능력에서 생기는

거니까요. 거길 가봐야 아는 겁니다.

 

그러니까 글을 써야 니체, 스피노자, 푸코, 불경, 주역 이런 사유의 길들을 나아가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쓰질 않으면 맨날 ‘어려워’ 타령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렵지 않은 책만 읽게 되는 거고요.

내 고정관념과 통념을 계속 강화하면서요. 그게 아니라면 ‘이런 건 해서 뭐해’가 되겠죠. 글

쓰기는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다 걸려 있어요. 교육문제, 청년문제 등등. 교육은 왜

스스로 언어를 창조하는 능력을 키워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지 않을까? 만약 그렇게

방향을 잡으면 대학교육기간 내내 작문을 해야 합니다. 배우는 전공이

뭐든, 문과든, 이과든, 의대든, 공대든 상관없이 그 공부가 자기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인식하는 훈련을 하는 거죠. 이게 사실 지성의 핵심입니다.

 

책을 읽고 글쓰기가 든든해야 자기의 전공지식을 가지고 사회에 나와서 어떤 직업을 갖든 당당하고 떳떳

하게 ‘선택’ 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게 훈련되지 않으니까 방황을 하게 되는 겁니다. 중년이

되어도 마찬가지죠. 인생이 헛헛하고, 더더욱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는 거죠. 제가 활동하는

‘감이당’에 중년들이 많이 옵니다. 그 분들 굉장히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들이에요. 그런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고 있고, 삶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모르고있습니다.

사업에 성공하는 일이 보통일이 아닙니다.

 

청년들을 막 이끌고 선도해야 하는데도 고민이 청년들과 똑같습니다. 그럼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요?

책을 읽어야죠. 책을 읽는데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쓰는 존재’가 되어서 읽어야 합니다. 인류 최고의

지성에 접속하는 것이니까요.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디까지 독서를 했을까요. 그냥

적당히 대학원에서 하던 그 수준에서 더 안 나갔을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써야 되기 때문에,

생산을 해야되니까, 계속 내 삶에 응용을 해야되니까 『동의보감』 같은 책까지 읽게

된 거에요. 그리고 지금은 『주역』과 불경을 읽어요. 그런 책들을 보면

세상에 어떻게 2,600년 전에 이런 책이 나왔을까 믿기지가 않아요.

 

인류의 지성이 이미 몇 천 년 전에 이미 거기에 도달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얄팍하고

어떻게 보면 굉장히 사춘기스러운 정서를 반복해야 하는가? 이미 그 대양이 펼쳐져 있는데 말이에요.

결국 쓰는 존재가 되어서 거기에 접속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막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쓴 스위스를 찾아가는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열하일기』를 예로 들어도 그렇습니다.

저는 인생을 『열하일기』로 역전했는데, 연암에 대해 써야 해서 읽은 거죠. 그때는 지금처럼

대중적인 번역도 없고, 전문가들의 번역본이라 정말 지금 쓰는 한국어로 쓰여 있질 않았

습니다. 그런 책 이었음에도 거기에 빠져버렸죠. 읽다보니까 너무 심오하고 재미

있었던 거에요. 『임꺽정』도 그렇습니다.

 

쓰는 사람이 아니면 제가 그걸 세 번이나 읽었을까 생각을 합니다. 써야 해서 읽었더니 거기서 헤엄치고

싶은 욕망이생기는 거죠. 이게 바로 ‘쓰기’가 ‘읽기’의 도약이라는 겁니다. 쓰지 않으면 읽기는 절대

늘지 않아요. 읽히기 위해 쓰여있고, 쓰기 위해 읽어야 그 책의 글 속에 의미를 깨우칠수 있습니다.

수년전에 '감이당'에서 ‘글쓰기를 수련하기’가 있었습니다. ‘글쓰기 수련’을 표방하면서 (공동체가) 시작

되었던 것이죠. 감이당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 중에 ‘대중지성’에서 수련하는 과목들을 소개하자면,

‘몸과 우주’를 다루는 의역학, 그리고 각종 텍스트들을 낭송하는 과목, 그리고 글쓰기, 이렇게 세 과목

입니다. 일주일에 하루, 저 세 과목을 공부하는 겁니다. 이 세 과목을 다루는 ‘대중지성’ 프로그램을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학기 체제로 운영하죠. 그런데, 어느 날보니 ‘대중지성’ 프로그램이

엄청 힘들다고 소문이 났더라고요. 일주일에 하루 하는 건데, 왜 그럴까 싶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수업이 힘든 게 아니라, 글 쓰는 걸 힘들다고 느끼는 거였습니다. 그것도 매번 발표는 하는

게 아니라, 8주 과정을 하고 에세이 발표를 한 번 하는 거예요. 한 계절에 하나 쓰는 건데 그렇게 어렵나?

그거 쓸 때 보면 거의 뭐 전쟁터 같아요. 그게 도대체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글쓰기가 어렵다기보다는

몸의 리듬을 그런 식으로 써본 적이 없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새로운 운동을 배울 때, 처음에는 다

어렵죠. 안 쓰던 근육을 써야 하니까. 그런데 그게 기본이 딱 잡히고 나면

그 다음엔 자연스러워 져요. 그거랑 같은 겁니다.


그렇게 아우성치며 힘들어했지만, 그걸 계속 유지했습니다. 지금은 좀 더 다양하고, 좀 더 힘들어졌어요.

가령 밤을 세워가며 발표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사람들 표정이 너무너무 밝았죠. 무슨

상을 주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뒤풀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요. 아무런 보상이 없어요. 그런데 다들

너무 뿌듯한 거죠. 이 뿌듯함의 이유가 뭘까요? 이것의 핵심은 내가 내 언어로 내 인생의 지도

하나를 그렸다, 바로 이거예요. 이게 주는 충만감은 다른 어떤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