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백수의 일상 - 106.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2>

paxlee 2021. 2. 17. 08:37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문제는 ‘감이당’의 ‘대중지성’ 프로그램이 요일별로 있고, 그걸 1년 동안 진행하다 보니까 이런 장기

프로그램에 접속을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 번 놓치면 또 일 년을 기다렸다가 참여해야 하니

까요. 그래서, 아주 짧게 단기적으로 여러 가지 글쓰기 강의를 열었죠. 그런데 거기서 또 리뷰,

에세이, 여행기 등을 쓰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거기서 또 알았죠. 글쓰기에 대한

욕구가 대단하다는 걸요. 역시 사람은 남의 말 듣는 것보다 자기가 생산하는걸 좋아

한다는 걸 다시 확인했습니다. 이게 본성인 겁니다. 남이 천 걸음 걷는 거

구경하는 것보다 내가 걷는 한 걸음이 중요하고 이게 바로 존재의 명령입니다.


글을 쓰면, 사람들에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하게 된 건, 공동체가 있어

서이기도 하고, 또 한가지는 2008년 무렵부터 대학 바깥의 인문학 광장이 크게 열렸기 때문이에요. 환경

적인 영향도 크죠. 자본의 잠식이 대규모로 변했고, 안정적인 일자리는 점점 사라지고요. 일이 없고

정처 없는 상태가 확대된 거죠. 이게 꼭 나쁜 걸까요? 역설적으로 그렇게 되면서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늘었어요. 거기에 곳곳에 도서관들이 들어섰어요.


2003년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내고 강의를 다닐 때만 해도, 그 도서관들이 모두

공사 중이었습니다. 그 도서관들이 모두 지어진 거죠. 그런데 이 도서관들이 정말 근사한 곳에 생겼습니다.

시골에 디지털 도서관이 생기기도 하고, 도시에는 꼭 숲이나 공원 있는 공간에 들어섰고요. 그런 공간이

열린 겁니다. 이 말은 무언가 하면 ‘평생학습’이 가능한 공간이 무료로 열린 겁니다. 도서관뿐이 아니에요.

구청이나 지자체에서도 인문학 공부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습니다. 20여 년 동안 강의를 하러

다녀보니 그렇습니다. 그럼 그렇게 열린 공간에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럼 거기에 뭐가 있어야 할까요?

학습 프로그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강사가 있어야 하죠. 2008년부터 제가

점점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반 사기업에서도 강연요청이 많이 옵니다. 교사 연수, 공무원 연수 같은 곳에서도 요청이 오고요. 이 많은

강의들을 누가 담당해야 할까요? 실제 강의를 주최하는 곳에서는 ‘이제 부를 사람 다 불러서 누구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앞으로 이 부분에서 많은 강사풀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감이당에서 하는 공부가 그렇습니다. ‘글을 써라, 그리고 강의를 해라’라는 거죠. 그래서

글을 쓰고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강의를 할 기회를 주고요. 일종의 자기훈련의

기회를 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각자가 자기 지역이든, 또는 자기 세대든 자기가 활동하고 싶은

공간에서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만들기를 바라는 것이고요. 그게 바로 감이당의 비전입니다.

 

5. 2부 실전편에서는 네 가지 장르의 글쓰기(칼럼, 리뷰, 에세이, 여행기)에 대해 구체적인 조언을 해주고

있는데요. 네 가지 글쓰기 각각의 핵심적인 특징이 있다면 한 번 더 짚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장르를 관통하는 글쓰기의 대원칙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실전편’은 감이당에서 했던 제 강의를

녹취한 게 기반이 되었습니다. 강의를 8주, 10주 단위로 했고요. 강의는 조별로 진행되었는데,

튜터들이 각 조들을 관리하는 식이죠. 이렇게 가면 이탈자가 거의 없습니다.

함께 산을 오르면 서로 격려해주면서 끝까지 함께 오르는 것과 같은 원리인 겁니다.

그래서 감이당은 조별활동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칼럼쓰기는 무엇보다 한 페이지 안에 사회적 이슈와 결합된 생각의 정수를 담아내는 겁니다. 이건 훈련이

없으면 안 되는겁니다. 그냥 사회를 논평하는 식으로 써서는 안 됩니다. 사회적 현상이 어떻게 내 몸을

통과하는지, 그게 내 일상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래서 그것이 어떻게 나를 지배하거나 이끄는지, 이런

것들을 사유해야 하는 겁니다. 즉, 문제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핵심인 거죠. 리뷰, 서평은,

세상에 서평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걸 감상적인 코멘트를 다는 식으로 하면 책과의

결합이 대단히 느슨해집니다. 리뷰는 책을 선정할 때부터의 집중력, 그 다음은 책을 읽어

나가는 집중력이 중요하죠. 최소한 세 번 이상은 읽어야 합니다.

 

첫번째 읽어서 책을 알았다는 건 대개의 경우 오해입니다. 아무리 쉬운 책도, 세 번 이상은 읽어야 합니다.

무조건 세 번이상 읽고, 리뷰를 두 페이지 써야죠.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내 스토리가

있어야 하죠. 책을 읽고 누구에게 이야기를 해준다고 하면, 스토리 라인을 짜야 하는 거죠. 이걸

훈련하는 겁니다.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나면 책을 베고 자는 거죠. 사실은 이것도 진짜로

케미를 일으킵니다. 안 믿을 것 같지만 진짭니다.(웃음) 여하튼 대충대충 해서는 안 됩니다.

이건 무엇보다 ‘관계’를 맺는 연습이거든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대충대충 하면 나중에 부끄러운 일이

산더미 처럼 쌓이잖아요.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리뷰쓰기는 책과 관계를 맺는 방법, 타자와

관계 맺는 방법을 훈련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에세이는 철학이에요. 에세이 자체가 철학이라는 뜻이거든요. 철학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나요?

철학을 하지않고 어떻게 살죠? 사람이. 정기신(精氣神) 중에 신이 바로 철학의 영역인데요. 삶의 방향,

‘내가 이렇게 살겠어’라는 걸 세우는 거죠. 이건 반드시 있어야 하잖아요. 자기 삶의 철학자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존재론,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인식, 윤리의 방향까지. 에세이는 그걸 쓰는 과정입니다.

여행기는, 요즘 여행을 많이들 다니죠. 여행을 다녀오면 온갖 의미들이 쏟아져야 하죠.

 

그런 요즘은 사진이 쏟아지고 있죠. 그리고 폴더가 늘어나고요. 그리곤 곧 고독 속에 빠져들죠. 그러지

말고 사진과 함께 이야기가 생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행기 수업은 세계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를 보면서 이야기를 어떻게 생성시키는가, 그걸 배워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여행을 가면 어떻습니까? ‘사건’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미는 어디 있죠? 바로 ‘사건’ 속에 있는

겁니다. 각자 자기의 여행기를 쓰는데, 기본이 되는 텍스트를 『열하일기』를 바탕으로 했어요, 거기

에는 사건과 이야기가 범람을 하니까, 그걸 참조하는 글쓰기였고요. 이렇게 완전히 다른 글쓰기의

장르 속에서도 원리는 딱 한가집니다. ‘차서를 지키고 차이를 생성하라.’ 모든 글쓰기를

관통하는 대원칙이죠. ‘차서’란 시간의 차이와 공간의 질서 두 가지를 합친 말입니다.

시공의 흐름이죠. 모든 일이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스텝을 밟는다는 겁니다.

연애도 그렇죠. 봄바람처럼 훅 들어왔다가 가을바람처럼 훅 꺼지고요.

그리고 길고 긴 겨울이 옵니다. 씨앗으로 되돌아가는 시간이죠.

 

사업도 마찬가지고 글쓰기도 그렇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밟아야 사람에게 잉여가 안 남습니다. 쓰다 말면

찜찜하고 뒷 골이 당기고 그렇죠. 글쓰기의 힘도 뭐냐 하면 ‘차서’를 부여하는 거예요. 기승전결이 있는

거죠. 봄은 기, 일어나고, 여름은 승, 펼치고, 가을은 전, 전환이 일어나고, 전복, 결은 마무리인데….

대단원의 막을 내리면서 다른 길로 이어져야 돼요. 이게 네버엔딩이에요. 왜냐하면

시공은 멈추지 않으니까. 이걸 염두에 두고 글을 시작 하면 글쓰기도 잘될뿐더러

그다음에 내가 이걸 삶에 응용할 수가 있죠. 기승전결이 딱 된 거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잉여가 별로 없어요. 이게 핵심이에요.

 

칼럼이든 리뷰든 여행기든 차서가 잡혀 있어야 해요. 이것을 자유자재로 운용을 해서 앞부분에 결론을

먼저 제시하고 그 다음에 뭐 중간에 하나씩 펼치고 이런 식으로 갈 수도 있는데, 이건 기본을 익힌

다음에 운용을 하는 거지요. 왜냐하면 인생도 겨울에서 시작할 수가 있잖아요. 아니면 한여름에

불타는 화염 속에서 시작되는 인생도 있으니까. 그러나 이런 스텝을 밟아야 하죠,

결국은. 그게 한 가지 핵심이고. 이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익혀야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개별

개별의 차이가 있어야 하잖아요. 차서를 잡고, 그다음은, 차이를 생성해야 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문장 안에 자기 고유의 감각, 정서, 윤리, 이게 들어가 있어야 돼요.

우리가 교과서나 교장선생님 훈화를 왜 따분해할까요? 차이가 없기 때문

이에요. 그런 글, 그런 말은 들으면 바로 지루함에 빠져듭니다.


우리가 매년 봄을 맞이하지만 한 번도 봄이 동일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봄이 올 때 지루하다고 하지

않아요. 아~ 또 봄이 왔구나, 하며 반기지.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면 또 처음 겪는 것처럼 느낍니다.

왜냐하면 낙엽은 하나도 동일한 게 없어요. 봄에 피는 들풀이나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

그 어떤 것도 동일한 순간조차 없다는 거예요. 그게 주는 새로움, 이게 중요합니다.

 

우리 언어도 마찬가지예요. 글도 절대 동일한 문장을 쓸 수 없어요. 보고 베끼지 않는 한, 나도 내가 쓴

문장을 동일하게 구사하지 못해요. 그 순간에만 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하고 같을

수가 있겠어요. 우리가 속담을 인용한다거나, 많이 떠도는 그런 말, 상용어, 클리셰라고 하는

그런 식으로 쓰지 않는 한 동일한 문장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영혼이 통해도 동일한 문장을 쓸 수는 없어요. 그래서 이 차이, 이 차이를 생성하려면 자기 개성이

살아 있어야 해요. 근데 우리가 개성을 스스로 지우고 있어요. 특히 엄청난 상품의 욕망에 끌려가니까

똑같은 말을 하고, 똑같은 스토리의 이야기를 하니까 지루해서 점점 이야기를 안 하게 되거든요.

영화를 보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주면, 그게 더 재미있어요. 영화를 보는 것보다. 그래서

이게 살아 있으려면 내가 그런 상품이나 대세에 휩쓸리지 않아야 해요. 상품이나 대세의

특징이 뭐냐하면 몰개성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야 군중이 휩쓸려 가서 막 물건을 사게

되어 있어요. 몰개성이 핵심이거든요. 거기에휩쓸리지 않아야 자기 개성이 오롯이

살아요. 그런데 이거는 다른 사람이 알 수도 없고 선생이 코치해 줄 수도 없어요.

 

너의 개성이 이거야, 이렇게 해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건 정말 오롯이 자기의 몫인 거죠. 그런

점에서 글쓰기의 핵심은 어떤 종류의 글을 쓰든 ‘차서를 부여하고 차이를 생성한다’는 것입니다.

차서를 부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공통 감각, 보편적 정서의 자각이면서 정서에 접속하는 건데,

그렇게 함으로써 타인과 소통하는 길을 여는 겁니다. 그런데, 차이를 생성할 때는 나의 고유성,

독특한 임팩트가 부여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새로운 언어, 새로운 길, 이런 것

을 하나 더 발견했구나, 이런 기쁨을 주게 돼요. 너무 간단하지 않습니까? 차서를 부여하고

차이를 생성할 것, 이것만 잘 외우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