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백수의 일상 - 129. <이어령, 80년 생각>

paxlee 2021. 3. 19. 05:44

 

《이어령, 80년 생각》은 편집장이자 이어령 교수의 마지막 제자인 김민희 작가가 2016년부터 2020

년까지 100시간 훌쩍 넘게 인터뷰해 만든 이어령 탐구의 결정판이다. 창조적 생각의 지도를 그려온

석학 이어령 교수의 삶의 궤적과 그의 두뇌를 한 권으로 탐닉할 수 있는 기회다.

 

책 속에는 여섯 살 질문쟁이 꼬마가 디지로그와 생명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패러다임을 제시하기까지

‘생각의 성장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이어령이라는 한 사람이 어떻게 창조적

생각의 지도를 그려왔는지, 그만의 지도를 그리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묻는 사람·지은이 김민희
인터뷰 매거진 〈톱클래스(topclass)〉 편집장이며. 학자와 예술가, 경영자와 문화창조자 등 다양한 분야

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 600여 명을 인터뷰했으며, 현재 〈톱클래스〉에 ‘김민희의 속 깊은 인터뷰’

연재 중이다. 이화여대 국문과를 나와 동 대학원 국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줄곧 언론계에 몸

고 있다. 이어령 교수의 마지막 제자로, 학부 교양강의 ‘한국인과 정보 사회’, ‘한국 문화의 뉴패러다임’
을, 대학원 마지막 전공강의인 ‘기호학의 이해’를 수강했다. 〈월간조선〉 〈주간조선〉 기자를 거쳤으며,
《성공신화-파버 카스텔》 《신 인재시교》를 썼다.

 

이 책에서 이어령 교수는 김민희에 대해 “저널리스트로서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글을 쓰되,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며,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문체를 지녀 한국의 츠바이크나 앙드레 모루아가 될자질을 갖

췄다”고 평했다. 이 책을 시작으로 한 시대에 새로운 불씨를 놓은 창조적 인물론 시리즈를 편찬, 평전

장르가 미약한 한국 출판계에 새 바람을 넣고 싶다는 사명감 어린 포부를 갖게 됐다.

 

한 사람 이어령
작가이자 문학평론가, 언론인이자 교육자, 행정가이자 문화기획자 등 전방위를 넘나드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 통섭형 지식인이다. 1934년생으로, 서울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단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6년부터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로 30년 넘게 몸담았다. 28세에 〈한국일보》 논설위원
으로 데뷔해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중앙일보〉 고문으로 오랫동
안 재직했다.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총괄기획위원, 초대 문화부장관,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 유네스
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대부터 80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고비마다 굵직한 모토를 한국 사회에 던져왔다. 20대에는 ‘우상의
파괴와 저항의 문학’, 30대에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로 대표되는 한국 문화론, 40대에는 일본 문화론인
‘축소 지향의 일본인’, 50대에는 88서울올림픽 슬로건 ‘벽을 넘어서’, 60대에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
화는 앞서가자’, 70대에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접목을 말하는 ‘디지로그’, 80대에는 ‘생명이 자본이다’,
그리고 88세인 2020년에는 마지막으로 ‘눈물 한 방울’이라는 키워드를 남겼다.

 

‘창조’는 새로움이다. 창조라는 말은 모든 존재의 최초에만 단 한 번 명명될 수 있는 거룩한 단어다. 정보
와 빅데이터가 범람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야말로 창조적 사고가 관건이다. 뻔한 정보와 기계적 사고
로 무장한 인재가 아니라 자기 머리로 자기만의 생각을 할 줄 아는 인재야말로 이 시대가 꼭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어령의 생각의 탄생’을 말하는 이 책은 지금 시대에 더욱 긴요하다.
이 책의 쓰임새는 이어령 교수의 다음 말에 담겨 있다. 자신을 일컬어 천재 운운하는 이들에 대해 펄쩍 뛰
면서 하는 답변이다.

 

“나는 천재가 아니야. 창조란 건 거창한 게 아니거든. 제 머리로 생각할 줄 안다는 게 중요한 것이지. 누구
나 나처럼 생각하면 나처럼 될 수 있어요. 진짜라니까.”
이어령 교수는 이 말을 열 번도 넘게 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이어령 교수처럼
될 수 있다니, 누가 봐도 언감생심인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심오한 지적 세계를 탐험하는 여정에 동행하
면서 시나브로 아주 조금씩 동의하게 됐다. 그를 만나고 나오면 일상의 사물이 평소와 달라 보였고, 그의
생각의 줄기를 따라가면서 ‘원래 그런 것’은 세상에 없다는 걸 하나둘 깨닫게 됐으니까. (9쪽)

 

코로나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잖아. 거리두기를 하면서 우리는 평소 잊고 있던 ‘거리’를 자각하기
시작했지. 나와 타인과의 거리, 개인과 집단과의 거리, 국민과 국가와의 거리, 자국과 타국과의 거리, 생과
사의 거리,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거리 같은. 모든 타자와의 거리를 발견한 것이지. 그동안의 삶의 방식,
그동안의 삶의 속도와 다른 삶을 살면서 잊고 있던 가치를 일깨워주고 있어. 혼돈의 시기에는 자기 자신의
성향을 새롭게 발견하기도 해. (22~23쪽)

 

“혼나는 게 무섭진 않으셨어요?” 그는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엉뚱한 질문을 한다고 어른들한테 구박도 많이 받고 혼나기도 많이 혼났지. 혼나면 물론 무섭지. 혼나는
게 무섭지 않은 사람이 어딨겄어. 그런데 나는 이런 반응에 굴하지 않았어. 지적 호기심이 워낙 컸거든.
혼나는 걸 각오하고서라도 그 질문을 해야 했지. 어린이의 눈에는 이 세상 모든 것이 경이롭게 보여요.

 

이름 모를 풀과 나무, 어둠 속에서 들리는 벌레 소리, 달빛 속의 그림자, 나는 그것들과 이야기하고 물으
면서 그 두꺼운 껍질들을 벗기고 싶은 욕망으로 온몸이 근질거렸어요. 나만 이랬을까? 아니야. 세상 모든
아이들은 다 같아요. 다만 선생님들에게, 어른들에게 길들여지면서 호기심을 잃어버린 거지. 뒤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 품었던 수수께끼를 푸는 감동을 그리스어로 ‘타우마젠(thaumazen)’이라고 해요. 타우마
젠! 호기심이 해소되는 순간, 다시 말해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 말이야. 그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어. 나도 모르게 막 탄성이 나오지.” 인터뷰 첫날,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물음표가 있었기 때문에 ...

 

“남들이 정신없이 달릴 때 홀로 멈춰 선다. 그리고 비로소 본다. 느낀다. 생각한다.”

우리 시대의 지성 이어령 교수, 그가 품어온 생각의 정수를 이어령 교수와 마지막 제자 김민희의
‘80년 창조적 생각’에 대한 생생한 대화가 이 책속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한국은 평전(評傳), 즉 한 개인의 삶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더해 평하는 월터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

나 슈테판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같은 책들의 출간이 매우 적은 편이다. 오히려 본인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더 많다. 평전이 많지 않은 것은 아마 탐구할 만한 인물이 많

지 않고, 정치나 경제 논리에 갇혀 그 인물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진영 논리를 넘어 이어령이라는 한 인물이 걸어온 치열한 80년의 분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어령 교수 역시 이 책은 회고록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창조’라는 키워드를 통해 이어령의 80년 인생

을 돌아보는 것은 맞지만, 고정불변의 과거가 아니라 아직도 팔딱거리는 생각들에 대한 ‘꿈틀대는 현재’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어령 교수는 “나는 내가 과거에 저지른 일에 대한 확신범이 아니여. 확신범이라면 유

언밖에 더 남겄어?”라고 말하며,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 것이 과거의 기록이 아닌 “80여 년 동안 온리원의

사고를 해온 한 인간의 머릿속을 탐색”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