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이야기

백수의 일상 - 401. <악마의 키스와 쓴맛의 미학>

paxlee 2022. 4. 11. 06:32

◇커피의 실존주의 시대

 

커피의 주 기능을 각성이라고 본다면, 그 본질은 우리의 중추신경에 작용하는 카페인이다.

에스프레소가 추출되는 진한 커피액은 본능적으로 카페인을 떠오르게 한다. 커피비평가협회

(CCA) 제공

 

커피에 관한 은유가 하나 추가됐다. ‘수행능력을 향상시키는 자극제’라는 표현인데, 베이징동계올림픽에 출전한 호주대표팀에서 나왔다. 호주는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 전문 바리스타를 선수단에 포함시켰다. 경기 당일 최고 품질의 커피를 통해 선수들에게 카페인을 공급함으로써 경기력을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다. 스키선수인 필 벨링햄은 “커피는 경기력을 높이는 자극제로서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줄 것”이라고 반겼다.

 

이 말이 외신을 타고 퍼지면서 지구촌 곳곳의 바리스타들은 설레고 있다. 수많은 스포츠 종목에 팀닥터처럼 바리스타들이 배치되는 모습을 꿈꾸는 것이다. 마법과 같은 커피 효능에 대한 은유는 기원전 10세기쯤 솔로몬왕과 시바 여왕의 사랑이야기에서 시작됐다. 구약성서 ‘열왕기 상’에 시바 여왕이 예루살렘으로 솔로몬을 찾아간 대목이 나온다. 구전에 따르면 여왕이 커피 향기로 솔로몬을 침실로 유혹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에티오피아의 초대 국왕이 된다.

 

이런 탓에 커피는 ‘인류 최초의 최음제’로 비유됐다. ‘아프로디지액스’란 표기는 그리스신화의 아프로디테에서 따왔다.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가 우라노스의 남근을 잘라 바다에 버렸는데, 정액이 바닷물과 섞이면서 생긴 거품 속에서 아프로디테가 탄생했다. 기이한 사연으로 그녀의 이름은 최음제를 뜻하게 됐다. 호메로스가 기원전 700년쯤에 쓴 오디세이에서 커피는 ‘네펜테’로 등장한다.

 

이탈리아의 언어학자 피에트르 델라 발레는 1650년 출간한 ‘중동여행기’에서 “트로이에서 살아 돌아온 헬레나를 축하하는 잔치에 포도주와 함께 제공된 네펜테는 커피였다”면서 “네펜테가 근심과 두려움을 잊게 했다”고 묘사했다. 이 시기 커피는 ‘마법의 묘약’이다. 이후 에티오피아에서 커피는 ‘신이 내린 선물’로 위상을 높인다. 오로모족은 지금도 커피 의식을 치른다.

 

그들은 커피나무가 신의 눈물에서 생겨났다고 믿고 주술사의 무덤에 커피나무를 심는다. 에너지를 넘치게 하는 커피의 신통함이 신과 인간을 연결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신화의 시대를 벗어나 커피가 기록으로 나타난 것은 기원후 900년쯤 페르시아이다. 의학자 라제스가 커피를 위장병 치료제로 처방했는데, 이후 11세기 이븐 시나를 거쳐 16세기 독일 의사 라우볼프에 이르기까지 커피는 ‘위장약’처럼 직유된다. 오스만튀르크의 시대를 거치면서 커피가 대중화하자 서서히 문학적인 은유가 등장했다.

 

터키와 헝가리 속담에 커피를 ‘악마의 키스’에 비유하며, 거부할 수 없는 커피의 유혹에 역설적인 찬사를 보냈다. 18세기 탈레랑은 “커피의 본능은 유혹이다”는 말로 커피 은유에 정점을 찍었다. 매혹적이며 신비스러운 커피의 면모는 1820년대 괴테에 의해 베일을 벗는다. 색상환을 만들 정도로 색에 심취했던 괴테는 검은색 액체 속에서 인간을 유혹하는 물질이 있음을 직관하고 화학자 룽게를 통해 카페인을 발견했다.

 

과학혁명의 시대를 거치며 커피의 위력이 비롯되는 물질이 입증되자 문학적 상상력은 커피의 향미로 옮겨가고, 커피 자체는 일상을 일깨우는 삶의 도구가 됐다. 21세기에 커피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의 숫자를 늘리게 하는 구체적인 수단으로 우리에게 깊숙하게 들어왔다. 바야흐로 ‘커피의 실존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 악마의 키스와 쓴맛의 미학 

 

 

커피의 쓴맛은 우리에게 위협일까, 위로일까? 고통일까, 축복일까? 인류는 오랜 시간 독을 먹고 목숨을 잃는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진화적으로 위대한 장치를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쓴맛을 감지하는 능력이다. 미각으로 포착하는 다섯가지 맛 가운데 쓴맛은 목숨과 직결된다. 다른 맛들은 농도가 강하면 불편함을 느끼는 수준이지만, 쓴맛은 수위를 넘는 순간 치명적이다.

 

일상 중에 강한 쓴맛을 경험하는 일이 줄어든 것은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위험한 음식들을 우리의 주변에서 솎아낸 덕분이다. 자연에는 여전히 독이 되는 먹거리가 도사리고 있다. 쓴맛을 감지하는 인간의 수용체가 25종으로 단맛(1종)이나 감칠맛(2종)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수용체가 여러 개라고 해서 쓴맛이 다양한 느낌으로 우리의 관능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니다. 쓴맛은 추구할 감각이 아니라 단지 마셔도 될지 안 될지를 구분하는 지표로만 작동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커피에서 감지되는 쓴맛을 두고 깊이 사유하며 감상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쓴맛은 생각할수록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수십만년 전 인류가 불을 사용하면서 쓰디쓴 뿌리채소를 익혀 먹을 수 있게 됐다. 이 지점을 현생 인류가 호미닌에서 침팬지와 갈라지는 분기점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쓴맛을 극복한 이 대목이 없었다면, 인류는 쓴맛에 대한 민감성 때문에 커피를 지금처럼 즐기지 못했을 것이다.

 

커피에서 쓴맛의 원인 물질은 몸에 이로운 클로로겐산이나 트리고넬린과 같은 항산화물질이나 알칼로이드의 분해 산물로서 육체와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항염증, 항당뇨, 항암효과가 이들 덕분인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각성 효과로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고 있는 카페인은 커피의 쓴맛에 단지 10%가량 관여할 뿐이다. 디카페인커피의 쓴맛이 여전하다는 점이 경험적으로 이를 뒷받침한다.

 

관능에서도 커피 쓴맛의 진가는 새롭게 조명된다. 커피 향미를 묘사하는데 활용하는 ‘플레이버 휠’에는 8시 방향에 ‘bitter(쓴맛)’가 당당히 속성으로 올라 있다. 하지만 쓴맛은 홀로 빛나지 못한다. 신맛과 짠맛은 쓴맛을 더욱 고통스럽게 다가오게 할 뿐이다. 감칠맛은 쓴맛을 만나면 저 멀리 도망간다. 오직 단맛만이 쓴맛을 고양시킨다. 소다나 삼뿌리같은 쓴맛이 단맛을 만나면 온순해지고 혀에 감기며 초콜릿을 떠오르게 하는 속성으로 승화한다.

 

단맛 역시 쓴맛이 있으면 더욱 존재를 과시할 수 있다. 거칠거나 쓴맛에 빠져들지 않고 부드러운 초콜릿이나 생동감을 주는 허브, 쌉싸름한 호두를 떠오르게 한다는 것은, 그 커피가 향미 성분들이 풍성하다는 점을 웅변하기 때문이다. 먹지 말라는 경고인 동시에 향미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도구가 되는 ‘쓴 커피의 이중성’을 먼 옛날 오스만 튀르크인들은 ‘악마의 키스’에 은유했다. 쓴맛과 단맛이 잘 어우러질 때, 순간의 정서를 표현해도 좋다.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묘사한 ‘bitter-sweet’는 쓴맛에 보내는 찬사가 될 수 있다. 쓴맛의 미학이 커피를 더욱 즐겁게 한다.

 

[박영순의 커피 언어] 박영순 커피인문학 칼럼니스트 : 세계일보. 2022. 04.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