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이야기

백수의 일상 - 444. <그 많은 커피 중에 ‘오늘의 커피’가 꼭 필요한 이유>

paxlee 2022. 5. 1. 06:37

그 많은 커피 중에 ‘오늘의 커피’가 꼭 필요한 이유

 

정동욱의〈커피 일상〉


커피는 참 이상합니다. 필수영양소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 허기를 채워주는 것도 아닌데 왜들 그렇게 마시는 걸까요. 생존을 목적으로 진화한 인간에게 쓴맛은 독, 신맛은 부패한 음식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단맛을 넘어 신맛과 쓴맛까지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죠. 커피가 바로 그렇습니다. 바리스타 정동욱의 ‘커피 일상’에서는 오랜 시간 각인된 본성마저 거스르며 이 검은 액체를 거리낌 없이 사랑하게 된 이유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원두가 분쇄되며 퍼지는 향을 통해서 '오늘의 커피'의 특성을 살핀다. 사진 김다정

 

"보라색이 떠올라요."

 

"맞아요. 라벤더 향이 느껴져요."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기 위해 드리퍼에 끼울 필터를 준비하는 모습. 사진 김다정

 

새로운 커피를 출시하기 위해 시행한 샘플 로스팅의 결과를 직원들과 같이 확인하는 순간, 각자가 느끼는 커피에 관한 인상을 자유롭게 표현합니다. 로스터는 사람들의 의견을 취합해 커피 로스팅을 진행하죠. 커피의 인상을 표현할 때 나오는 단어는 과일이나 꽃처럼 구체적일 때도 있고 질감이나 색의 표현같이 추상적일 때도 있습니다. 커피를 마시고 “보라색이 떠올린다”는 표현이 나오기도 하는 이유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추상적인 표현조차 서로 공감한다는 겁니다. 커피를 색으로 표현한다는 건, 어쩌면 훈련된 바리스타가 향의 성격을 인지하고, 그 향을 연상케 하는 과일이나 꽃 혹은 다른 무엇을 인식해 그것을 다시 색으로 연결하는 인지능력의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풋사과 계열을 연상할 땐 녹색, 재스민이나 라벤더의 계열은 보라색, 자몽이나 오렌지는 주황색 등으로 연상하는 것이죠.

 

저울 위 계량컵을 올리고 원두를 붓는 과정. 사진 김다정

 

저울 위에 계량컵을 올리고 영점을 잡아 줍니다. 비교적 서늘한 아침 기온을 감안해 16.2g을 계량합니다. 그라인더의 전원을 켜고 날이 회전하는 것을 확인한 뒤 원두를 붓습니다. 좁은 날의 틈을 통과하며 원두는 미세한 가루로 부서지죠. 커피의 향이 세상에 퍼져나가기 시작하며 코끝을 자극합니다. 계량컵 옆면을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려 향을 다시 확인합니다. 이 작업은 그날 만들 커피의 특성을 살피는 일입니다. 이제 서버 위에 드리퍼 또 그 위에 필터를 얹고는 미리 끓여둔 물을 붓습니다. 필터를 씻어주며 동시에 드리퍼와 서버를 데워주는 작업(린싱 Rinsing)이죠. 분쇄해서 가루가 된 커피를 막 린싱이 끝난 드리퍼에 부어줍니다.

 

저울에 15.8g이 표시된 것을 확인합니다. 분쇄 중에 생기는 손실 때문에 원두를 계량할 때는 일정량을 더 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16.2g이 아니라 15.8g이 맞습니다. 타이머를 누른 후 잘 정돈한 커피 가루 위로 뜨거운 물을 부어줍니다. 정확히 40g을 부어준 후, 드리퍼를 들고 빙글빙글 돌려줍니다. 스월링(swirling)이라 하는 이 작업은 커피 추출이 고르게 일어나도록 커피 가루 전체에 물이 닿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30초가 되면 60g의 물을 추가로 붓고, 50초엔 70g, 1분 10초에 다시 70g의 물을 부어준 후 기다립니다.

 

드리퍼를 빙글빙글 돌려주는 스월링(swirling)을 통해 커피를 고르게 추출한다. 사진 김다정

 

물은 커피 가루를 통과하며 커피가 되어 서버로 떨어집니다. 방울방울 떨어질 때마다 일어나는 액체의 표면장력과 중력 사이의 충돌이 어딘가 아름답게 보입니다. 커피를 추출하는 일을 직업으로 둔 사람으로서, 새로운 오늘이란 새로운 문제를 받아든 학생의 기분과 흡사하게 느껴집니다. 오늘의 환경에 적합한 커피는 어제의 커피와 다르기 때문이죠. 산미가 잘 발현되지 않는 날엔 산미를 보다 살리는 방향으로 추출해야 하고, 향미가 과하게 발현되는 날에는 적절하게 만들어 줄 필요가 있어서입니다.

 

이 ‘적절함’이 참 어려우면서도 중요합니다. 결국, 바리스타가 하는 일이란 ‘오늘’과 ‘커피’ 사이의 적절한 관계를 규정하는 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는 날도 있습니다. 둘 사이가 너무나 멀고 멀어서, 도무지 사이를 좁힐 수 없는 날이죠. 혹시 ‘그런 날’을 겪은 분이 있다면, 너무 좌절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의, 그리고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잘 나와주는 커피가 있는 것처럼,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안 되는 날이 있습니다. 우리의 역할은 나쁜 날의 하한선, 좋은 날에도 그 하한선을 지키는 것에 있죠. 오늘의 커피는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그러니 같은 커피라도 ‘오늘의 커피’는 오늘만 마실 수 있는, 오늘만의 맛과 향을 가진 커피가 되는 거죠. 자, 오늘의 커피는 보라색이 떠오르는 다사야(dasaya)라는 커피입니다. 원두 봉투에 쓰인 글귀를 유심히 살피며 커피를 맛보던 손님 한 분이 다가와 말을 건넵니다.

 

커피를 추출하는데 필요한 서버, 드리퍼, 필터. 사진 김다정.

 

“정말 보라색이 떠오르네요.”

“다사야라는 커피 이름이 에티오피아어로 보랏빛 풍경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느끼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커피를 그저 쓴맛 나는 검은색 액체로만 생각했는데, 커피가 맛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게 됐네요.”

 

이 순간이야말로, 바리스타가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는 때입니다. 다사야 커피의 정식 이름은 ‘에티오피아 구지 샤키소 다사야’입니다. 컵노트는 라벤더‧블루베리‧포도‧복숭아이죠. 커피의 맛과 향에서 이러한 인상(impression)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커피에서 어떤 인상을 느끼는 그 순간을, 저는 아주 좋아합니다. 내 삶이 조금은 근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죠. 행복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그런 순간입니다. 만약 오늘 하루를 살기 위해 필요한 행복의 분량이란 것이 있다면, 오늘의 커피가 필요한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DRINK TIP. 핸드드립으로 ‘오늘의 커피’ 즐기는 법

 

드리퍼에 물을 부어 씻어주는 모습. 사진 김다정.

 

카페에서 핸드드립으로 오늘의 커피를 주문했다면, 커피가 분쇄되는 그라인더 근처에 자리를 잡으세요. 커피가 분쇄되는 순간의 향이 참 좋기 때문이죠. 커피를 추출하는 바리스타의 움직임을 슬쩍슬쩍 관찰하셔도 좋습니다. 그 모든 행동이 커피의 맛과 향을 만드니까요. 예쁜 잔에 담겨온 커피의 섬세한 맛과 향을 천천히 음미합니다. 바리스타가 건네는 카드나 혹은 메뉴판에 쓰인 커피의 정보를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느껴지는 맛과 향, 상상되는 이미지의 정체를 어쩌면 그 속에 적힌 단어에서 발견하실지도 모릅니다.

 

커피는 뜨거울 때 다 드시지 말고, 천천히 식으며 변하는 향미를 관찰하면 좋습니다. 식을수록 산미가 드러나고 단 향의 여운이 길어집니다. 또, 맛과 향이 정점이 되는 온도는 커피마다 다릅니다. 뜨거울 땐 조금 여유롭게 드시되, 딱 좋다 싶을 땐 조금 서두르셔도 좋습니다. 커피가 좋았다면, 바리스타에게 한마디 짧게 건네보는 것도 좋습니다. 아마도 행복한 얼굴을 마주하시게 될 겁니다.

 

정동욱 커피플레이스 대표. 중앙일보 : 2022.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