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백수의 일상 - 502.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

paxlee 2022. 6. 8. 06:13

내 편이냐 아니냐… 요즘 美 정치도 ‘훌리건’이 좌우한다.

 

美 언론 VOX 창립자의 정치 진단 “반대편 정당에 대한 증오로 투표”하고, 
정치에 관심 많은 유권자일수록 지지 정당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아서,
후보의 특징·공약·이념보다 ‘우리 편의 승리’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 에즈라 클라인 지음|황성연 옮김|윌북|344쪽|1만8800원

 

지난 1일 지방선거는 여당 압승으로 끝났다. ‘검수완박’ 행보를 응징하고자 하는 여당 지지자, 계양으로 간 대선 후보의 “정치 생명 ‘끽’”을 막기 위한 야당 지지자가 투표에 나섰다. 지역 밀착 공약은 잡음처럼 들렸다. 어느 순간 정치는 ‘궁지에 빠진 우리 편’과 ‘사악한 저쪽 편’의 이분법이 됐다. 미국 저널리스트로 대안 언론 ‘VOX’를 창립한 에즈라 클라인은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에서 미국 정치의 양극화를 진단한다. 그의 이야기는 양극화한 우리 정치 지형과 기묘하게 닮았다. “지난 50년간 미국 유권자는 자신이 투표하는 정당은 덜 좋아하게 됐는데, 반대편 정당은 더 싫어하게 됐다.”

 

그는 정치가 라이벌 스포츠팀 서포터스의 대결이 됐다고 본다. ”열성 당원은 열광적인 전사다. 더 큰 선(善)을 위하기보다는 소속 팀의 승리를 위해 뛴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저자는 먼저 ‘정체성’에 목숨을 거는 인간 본성을 주목한다. 저자는 미국인, 유대인, 백인, 남성, 남편, 아버지, 채식주의자, 동물권 옹호자 등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런 정체성이 위협받을 때 사람들은 공격적으로 변한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사람이 동성 결혼을 도입한다는 기사를 읽으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호흡은 가빠지고 동공은 좁아지며 심장 박동은 빨라진다.”

 

문제는 어느 정당을 지지하느냐가 가장 강력한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정치에 관심이 많은 유권자일수록 ‘이 정책이 내게 무슨 이득이 되는가’(이익)라는 질문 대신 ‘이 정책에 대한 지지는 나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정체성)에 관심을 가진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정치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적대시한다. ‘상대편에 대해 얼마나 많은 분노, 경쟁심, 무례함을 느끼는지 떠올려보라’는 질문을 받자 미국 민주·공화당을 가르는 ‘낙태’ ‘동성애’ ‘세금’ ‘이민자’ 같은 사안이나 ‘분배’ ‘성장’ 같은 이념은 덜 중요해졌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한다.

 

2016년 민주당 차기 대선 주자로 확정된 힐러리 클린턴(오른쪽)과 당시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가 지지자들에게 화답하고 있다. 두 사람은 성별도 인종도 배경도 달랐지만 민주당원 대부분은 변함없는 지지를 보냈다. ‘민주당’ 후보였기 때문이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후보의 정체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흑인’ ‘남자’ ‘케냐 혈통’ 오바마, ‘백인’ ‘여성’ ‘상류층 출신’ 힐러리는 ‘민주당’이라는 정당을 제외하면 다른 부분도 많다. 그렇지만 유권자는 민주당이기에 비슷하게 두 후보에게 투표했다. 도널드 트럼프라는 예외적 사례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지적한다. 트럼프는 이전 공화당 후보와는 이질적인 인물이었다. 당 내에서도 ‘병적인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렇지만 한번 그가 대선 후보로 확정되자 과거 공화당에 투표했던 지지자들은 여전히 트럼프를 찍었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당파적 정체성은 강하지만 정당은 힘이 약한 것’이라고 한다. 트럼프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던 미국 공화당이 대표적 사례다. 정당보다 정치인 개인에게 가는 기부금이 많아진 것도 정당 힘을 빼놨다. 풀뿌리 소액 기부 운동은 ‘강성 발언’을 하는 정치인의 돈줄이 됐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오바마케어를 옹호하는 의회 연설을 하며 “불법 체류자는 오바마케어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돌발 사건이 터졌다. 무명의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하원 의원 조 윌슨이 “그건 거짓말”이라고 소리친 것이다.

 

거짓말은 오바마가 아니라 윌슨이 한 것이었다. 법안에는 불법 체류자에게는 의료보험 혜택을 주지 않는다고 명시돼 있었다. 그러나 윌슨은 “거짓말”이라는 거짓말로 스타덤에 올랐다. 몇 주 만에 200만달러나 되는 후원금이 몰려들었다. 우리 편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면 돈이 생긴다는 대표적인 사례다. 유튜브 ‘수퍼챗’, 아프리카 ‘별풍선’이 터지듯 후원금이 쏟아지는 것이다. 한국에서 ‘5·18 민주화 운동’을 폄훼하는 발언을 하거나 ‘천안함 음모론’을 펼치면 지지자가 생기는 현상은 이와 닮았다. ‘돈이 들어오는 길이 정치를 바꾼다’고 클라인은 썼다.

 

책에서는 미국 정치를 개선할 방안으로 ‘대통령 선거인단제 폐지’ ‘필리버스터 폐지’ 등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만 한국 정치와는 결이 다르다. 참고할 만한 조언은 유권자인 개개인이 ‘정체성’에 휘둘릴 수 있음을 유념하라는 당부다. 당파적 정체성에 휘둘리는 순간 양식 있는 시민은 ‘훌리건’과 별 차이 없어진다. 미국의 사례와 상황에 대한 책이지만,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교훈을 주는 독서다. 대변인(press secretary) 대신 ‘언론 비서관’이라고 직역하고, ‘거대한’(great)을 ‘위대한’이라고 하는 등 매끄럽지 않은 번역은 다소 아쉽다.

 

양지호 기자. 조선일보 문화부 : 2022.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