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백수의 일상 - 604. <세상의 속도와 달라도, 나는 내 갈 길을 간다>

paxlee 2022. 7. 26. 06:40

세상의 속도와 달라도, 나는 내 갈 길을 간다

 

청년 작가 500인, 작품 1200점 전시,\하는 ‘2022 아시아프’ 1부 오늘(07,26일) 개막한다. 
살아있는 달팽이 라이브쇼부터 그림·조각·미디어아트까지 풍성하다. 

 

이리저리 치이면서 끝까지 목적지로 나아가는 것, 작가적 인생을 은유하는 사실적 컨테

이너박스 그림 연작을 오현주씨가 전시장 벽에 걸고 있다. /고운호 기자

 

멈추지 않는 한 길이 끝나지 않는다.

 

달팽이 한 마리가 계속 꿈틀거린다. 투명 원통 속에서 이 연약한 살덩이는 벽면에 맺힌 습기를 온몸으로 밀며 투명한 길을 개척한다. 김주영(28)씨는 “인간의 인식에서 느릴 뿐 달팽이는 자기 속도로 꾸준히 살아가는 존재”라며 “누가 인정해주든 아니든 자기만의 걸음을 흔적으로 남긴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가 10년째 달팽이에 몰두하는 까닭이자, 축축한 테라리엄(terrarium·식물 재배용 상자)을 꾸며 그 안에서 달팽이의 오체투지를 보여주는 작품 ‘달팽이의 퍼포먼스 공간’을 제작한 이유다. 전시 기간 내내 달팽이는 천천히 추상의 궤적을 완성해나갈 것이다.

 

국내 최대 청년 미술 축제 ‘2022 아시아프(ASYAAF)’ 개막을 하루 앞둔 25일, 전시장은 청춘의 물류 센터 같았다. 짐을 나르고, 벽에 직접 못질까지 하고, 완성된 그림을 벽에 걸고 나서도 못내 아쉬워 붓을 꺼내고 물감을 덧대는 작가가 여럿이었다. 전날 경북 김천에서 올라왔다는 이주연(22)씨는 자칫 감상에 방해가 될까 벽에 난 구멍까지 손수 메우고 있었다. “생애 첫 전시라 많이 긴장된다”면서 “그림이 팔릴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숱한 이사 경험, 적응으로 인한 정체(停滯)의 시간을 사실적 컨테이너 박스 그림 연작으로 옮긴 오현주(23)씨는 “운송 과정이 아무리 험난해도 짐은 끝내 목적지에 간다”고 말했다.

 

일상의 고단함을 담은 인터넷 밈(meme)과 만화 ‘에반게리온’ 한 장면을 합쳐 그린

김경모씨의 ‘I see’.

 

섭식이 가능한 투명 원통 속 달팽이. 김주영씨가 구상한 작품 '달팽이의 퍼포먼스 공간'

을 확대한 사진이다. 이 달팽이는 습기 찬 벽면을 온몸으로 기어다니며 구불구불 드로

잉을 그리는 행위예술가다. /고운호 기자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소고기를 둥글게 겹쳐 그 마블링으로 하여금 제복 군인의 형상

을 불러내는 권은산씨의 ‘나, 소고기 아니다-전쟁 환영’. /고운호 기자

 

조선일보사·홍익대학교가 공동 주최하는 이번 행사는 공모로 선발된 평면·입체·미디어 작가 500명의 작품 1200여 점을 서울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에서 선보인다. 2008년 첫 회 이후 관람객 40만명, 작품 판매 8700여 점을 기록하며 청년 작가를 위한 대표적 등용문 역할을 하고 있다. 작가를 꿈꾸지만, 작가로 살아남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길에서 유행과 답습, 손쉬운 대중 영합의 유혹이 기다리고 있다. 심사를 맡은 서울대 신하순 교수는 “작가로 막 화단에 발을 내디딘 이들이 부디 자기만의 방향을 찾게 되길 바란다”고 했다.

 

만 36세 이상 작가들이 참여하는 ‘히든 아티스트’ 부문도 비장했다. 책·액자·꽃병 등을 미니어처로 제작해 거대한 책장(‘전통과 예술 사이’)을 꾸민 황지영(47)씨는 10년 전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었다. “만신창이로 살았다”고 했다. 그러다 하늘로 떠난 딸의 편지를 2년 전 뒤늦게 읽었다. 딸은 화가를 꿈꾸고 있었다.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다발성경화증을 앓느라 1년에 두 달은 입원해야 해 어디서든 작업이 가능한 미니어처 작업을 시작했다”며 “집중의 시간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했다. 홈페이지(asyaaf.chosun.com)에서 출품작을 확인할 수 있고, 행사 종료 후 구매도 가능하다. ‘아시아프’ 1부는 8월 7일까지, 2부는 8월 9일부터 21일까지 열린다. 월요일 휴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관람 가능. [입장료 성인 6000원, 아동·청소년 4000원.]

 

정상혁 기자. 조선일보 / 2022.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