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백수의 일상 - 626. <'헤어질 결심',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다>

paxlee 2022. 8. 2. 05:00

“사랑이란 말없이,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다”

 

‘헤어질 결심’ 정서경 작가 인터뷰

 

영화 ‘헤어질 결심’의 정서경 작가.

 

서울 용산구 작업실에서 지난달 27일 만난 정서경 작가(47)는 “사랑이라는 말없이 가장 근본적이고도 원초적인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 작가의 답변에는 서래와 해준이 남긴 사랑의 단서가 담겨 있다.

6월 개봉한 영화 ‘헤어질 결심’ 각본에는 “사랑해”라는 대사가 단 한 번 나온다.
형사인 해준(박해일)이 살인사건 용의자 서래(탕웨이)를 만나 서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인데,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서로에게 “사랑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정작 그 대사를 뱉는 인물은 서래의 남편 임호신(박용우).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 반대로 해준과 서래는 단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서로가 서로를 사랑했음을 깨닫는다. 영화 속에는 두 사람만 아는 사랑의 언어로 빼곡하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들의 사랑이 시작됐는지, 어떤 대사가 사랑 고백이었는지를 재확인하고 싶은 욕망 때문일까. 지난달 18일 사전 예약판매를 시작한 ‘헤어질 결심 각본’(을유문화사)은 교보문고 인터넷 판매량 순위에서 ‘파친코’ 개정판을 제치고 깜짝 1위에 올랐다.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이 드러나는 장면을 꼽으라면.

“‘나는 붕괴됐어요’라고 고백하는 해준의 대사가 아닐까. 그전까지 서래와 해준이 느꼈던 감정은 설렘과 끌림이었다. 하지만 이 대사 이후 서래는 해준이 자신에게 느꼈던 감정의 깊이를 그제야 제대로 깨닫게 된다. 서래는 이전까지 해준을 범죄에 이용할 수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그 대사가 서래에게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감정을 처음으로 느끼게 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완전히 무너지면서까지 자신을 지켜준 거다.”

 

―형사인 해준은 서래의 범죄 혐의를 밝히면 형사로서 자기 자신을 지킬 수도 있었는데도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어째서 해준은 붕괴될 결심을 한 걸까.

“이번 작품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사랑에 관해 쓰고 싶었다. 결국 사랑이란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버리면서까지 상대방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지켜주는 게 아닐까. 형사인 해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직업인으로서의 윤리의식이다. 그런 해준이 서래를 만나고 사랑하게 되면서 자신을 존엄한 인간으로 만들어줬던 그 직업정신을 버린다. 서래가 살인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서래는 생존을 위협받는다. ‘나는 붕괴됐다’는 말은 곧 당신의 생존을 위해서 내가 무너지겠다는 고백이다. 자기 자신이 무너진 이후의 삶이 아득할 텐데도 그마저 감수하는 사랑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 ‘헤어질 결심’


―해준은 서래의 범죄 사실을 알고도 수갑을 채우지 않는다. 대신 서래에게 “아무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바다에 던져버리라”고 말한다.

“그 대사에서는 ‘아무도 모르게’라는 말이 중요하다. 두 사람에게 바다는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의 사랑이 존재하는 곳이다. 가루가 되어 사라진 게 아니라 (이들의 사랑은) 바다에 있다. 결국 그 대사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우리의 사랑이 존재하게 해요’라는 뜻이다.”

―대사뿐 아니라 해준와 서래의 행동에도 사랑한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영화 속에 드러나지 않지만 해준이 직접 서래의 범죄 증거를 인멸해주는 대목을 뽑고 싶다. 형사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던 해준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그런 자기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해냈을 일이다. 마찬가지로 서래는 해준이 살인사건 현장에서 죽은 사람의 피를 견디기 어려워 한다는 걸 알고 자신이 직접 살인사건 현장의 핏물을 치운다. 코를 막아가면서.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 사랑 고백을 주고받았는데 서래는 왜 해준과 헤어질 결심을 한 건가.

“무너져 본 적 있는 사람만이 붕괴의 깊이를 상상할 수 있다. 붕괴라는 말을 서래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그 단어가 사랑을 뜻하는 줄 몰랐을 거다. 서래는 중국에서 어머니를 잃고 국경을 넘으면서 완전히 무너져 내린 적 있는 사람이다. 무너지고 부서서지는 아픔을 알게 된 순간 서래의 사랑이 시작됐을 것 같다. 진정 나 때문에 어떤 사람이 무너져도 되나, 내가 그럴 자격이 있나. 이런 생각에 도달하면 마침내 내가 저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다시 살게 할 수 없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서래는 모든 범죄 증거 그 자체인 자신이 사라져야 해준을 붕괴 이전으로 되돌릴 거라고 믿었다.”

영화 ‘헤어질 결심’


―서래는 해준에게 “미결사건이 되고 싶다”고 한다. 이 말은 어떤 의미인가.

“해준의 집 벽에는 미결사건 사진들이 걸려 있다. 잠도 못 자고 매일 미결사건을 찾아 헤맨다. 서래는 해준의 집에서 그 사진들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무섭거나 두려워하기보다 기뻐한다. 아무도 없이 홀로 남겨진 서래에게 누군가에게 어떤 의심의 시선이라도 받는 것이 오히려 충만한 느낌을 주지 않았을까.”

―마침내 서래는 해준 곁에서 사라지기로 결심하면서 영원히 미결사건으로 남는다. 해준은 서래를 찾으러 다시 바다에 올까.

“해준은 미결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처럼 영원히 서래를 찾아 헤매지 않을까.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마치 신화처럼 느껴졌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헤매는 한 남자, 가만 생각해 보니 오르페우스더라. 마지막 장면을 본 뒤에야 이 영화가 그저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깨달았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길을 잃고 무너진다. 바로 발밑에 진실이, 사랑이 묻혀 있는데 바보처럼 그걸 모르고 평생을 찾아 헤매지 않나.”

영화 ‘헤어질 결심’


―실제로 해준은 “당신이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는 서래의 말에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말했냐”고 되묻는다.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했는데도 끝까지 바보처럼 모른다.

“해준은 행동하는 사람이지,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은 아니다. 자기가 붕괴됐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그 말이 사랑한다는 의미로 서래에게 닿았다는 걸 몰랐을 거다. 서래가 ‘붕괴’라는 말의 의미를 사랑으로 받아들여서 이런 일을 벌일지 상상도 못했다. 그런 해준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붕괴됐어요“라고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미소를 짓는다. 어쩌면 그 미소는 사랑을 발견하는 표정이 아닐까. 해준은 내가 서래를 이토록 사랑했다는 것도, 서래도 내게 그 사랑을 똑같이 답하려고 했다는 것도 그제야 깨닫게 된 거다.”

―배우들의 호연이 사랑한다는 말없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완성시켰다. 가장 완벽하게 완성된 장면을 꼽자면.

 

“처음 경찰서에 들어서는 서래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여느 부인의 모습처럼 황망해 보인다. 등이 굽어 있고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 하지만 해준이 살인사건 용의자인 서래에게 어려운 수사 용어를 하나하나 번역해주며 인간적으로 대해주자, 서래가 점점 허리를 펴고 꼿꼿해지기 시작한다. 침묵했던 서래가 이 사람에게는 나의 이야기를 꺼내도 될 거라고 확신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사랑에서 핵심적인 한 단어를 꼽자면 ‘존엄성’이다. 진정한 사랑의 모습은 해준을 만나 존엄성을 회복한 서래처럼 꼿꼿한 형태이지 않을까.”

―박찬욱 감독과 이번이 다섯 번째 함께 각본을 썼다. 차기작은 어떤 작품이 될까.

“모르겠다. 감독님은 내게 ‘(다음 작품을) 생각해야 된다’는 말씀을 남기고 떠났다(웃음). 감독님이 어느 날 너무 힘이 들 때 내게 메일을 보내면 어쩔 수 없이 써내려가지 않을까. 감독님이 쓰지 못하는 대사를 내가 쓰기도 하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디테일을 감독님이 채워줬다. 함께 각본을 쓰면서 그렇게 서로의 한계를 뛰어넘어왔다.”

 

이소연 기자. 동아일보 / 2022-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