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 철의 여인' 오은선님 *=

paxlee 2007. 2. 7. 22:09

 

“산이 자꾸 오라 하네요”  철의 여인, 오은선님.

  

     200611240029.jpg    311153_29553_5957.jpg

  -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산악인 오은선(40·영원무역·수원대 산악부 OB) 씨. -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국내 정상급 여성 산악인 오은선은 키 155㎝, 몸무게 50㎏의 가냘픈 체구로 지난 2002년 8월 유럽 최고봉 엘브루즈(5642m)를 시작으로 2003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 2004년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6959m), 아시아 최고봉 에베레스트(8850m),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5895m), 호주 코시어스코(2천228m)를 잇다라 오른 후 같은해 12월 20일 남극 최고봉인 빈슨매시프(4897m)까지 2년4개월만에 빠른 속도로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올랐다. 국내에서 여성 산악인이 세계 7대륙 최고봉을 완등한 것은 그녀가 처음이며, 세계적으로는 12번째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다베이 준코, 남바 야스코에 이어 세번째이다. 특히 2004년 에베레스트 단독 등정 성공은 오은선을 단번에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단독 등반으로는 한국 여성중 최초의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 했으면 만족할 법도 한데 그녀의 산행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올해 히말라야 8천m급 2개봉에 연속 도전했다. 10월14일 히말라야 시샤팡마(해발 8천27m)를 무산소로 오른 그녀는 곧바로 이동해 11월2일 초오유(8천201m)도 무산소로 도전했으나 불과 100m를 앞두고 기상 악화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아쉬운 정도가 아니라 너무 속상하고 억울했어요. 돌아서는게 나약한 것은 아닌가 갈등을 했지만, 욕심내지 않고 돌아서는게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며 그 당시를 회상하던 그녀는 “다음에 다시 도전해 정상에 꼭 태극기를 꽂고 말겠다”고 강한 의지를 표시했다. 사실 그녀가 시샤팡마에 도전했을 때도 상황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등반 도중 얼음 덩어리에 맞아 왼쪽 갈비뼈 2대가 부러지고 1대가 금이 가는 부상중이었던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을 정복했다. 그녀가 이번 초오유 등정마저 성공했다면 8천m급 거봉을 연속으로 등반한 아시아 최초의 여성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도전에서 오씨는 8천m급 거봉 연속 등정의 성공 가능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는 올 가을 인명 사고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나쁜 기상상태에서 시샤팡마에 오른데 이어 초오유 정상 코 앞까지 이른 것은 그녀가 남자 산악인도 오르기 힘든 8천m 정상을 연속으로 오를 정도로 강한 체력과 정신력을 가졌다는 걸 증명한 것이다. 지난달 9일 귀국한 그녀는 최근 또다시 인도네시아 뉴기니섬 서쪽에 자리잡은 오세아니아 최고봉 칼스텐츠(4천884m)에 도전하기 위해 출국길에 올랐다.

 

그녀는 노르웨이, 러시아, 루마니아 등에서 온 전세계 산악인 10여명과 함께 칼스텐츠를 등반한 뒤 이달 중순께 귀국할 예정이다. 칼스텐츠는 호주 대륙과 떨어진 인도네시아 이리안자야 섬에 있어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의 경계에 위치, 국제 산악계는 오세아니아의 최고봉으로 코시어스코와 칼스텐츠를 함께 인정하고 있다. 그녀는 출국 직전 “이번 등반은 세계 7대륙 최고봉 완등 계획을 마무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며 “인류의 손길이 거의 미치지 않은 이리안자야의 원시림과 현지민들의 생활에 접할 생각에 벌써부터 흥분된다”고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칼스텐츠 행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올해 1월말 동계 훈련중 부러졌던 다리에서 철심을 빼내자마자 칼스텐츠로 떠났던 그녀는 반군 출몰을 이유로 당시 입산이 금지되는 바람에 산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되돌아와야 했다. “칼스텐츠하곤 인연 맺기가 쉽지 않네요. 이번에 꼭 올라야 속이 후련하겠어요.” 그녀는 한번 실패했다고 해서 그냥 넘어 가거나 포기하는 법이 없다. “한번 실패했으면 다음엔 꼭 성공해야지 다짐하면서 내려와요. 그리고 다시 가서 꼭 올라야 직성이 풀려요.”

 

          

               -  06년 4월 주왕산 산행시 오은선님과 함께 - 

 

그녀의 원정 계획은 계속 이어진다. 국내에는 등반 준비로 잠시 들어왔다 산으로 곧바로 출발하는 것. 그녀는 이미 칼스텐츠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히말라야로 떠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에베레스트 남쪽에 있는 `히말라야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아마다블람(6천812m)에 후배 여성 산악인 4명을 이끌고 도전할 예정이다. 그녀의 목표는 ‘순수 여성 원정대’를 이끌고 에베레스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히말라야의 K2를 오르는 것이다. 아마다블람은 가장 등반하기 어려운 산으로 알려진 K2 정복을 위한 초석을 다지는 셈이다.

 

앞으로 여성 등반대를 꾸려 낮은 산부터 8천m대 고산까지 단계적으로 등반한다는 계획이다. 그녀는 “뛰어난 여자 후배가 참 많은데 아직 히말라야를 경험할 기회가 없어 안타까워요”라며 “여성 산악인의 선구자로서 여성 후배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게 내 역할이 아니겠냐”고 웃었다. 이어 그녀는 “이번 원정이 잘 마무리되면 다음엔 브로드피크(8천47m) 그리고  K2(8천611m)에도 여성 등반대와 함께 도전할 예정”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올해 굿모닝신한증권 전문가 모델로 섭외돼 TV광고에도 출연한 그녀는 케이블TV에서 '세계 위에 선 한국 여성'편에 소개되기도 했다.

 

세계 각지의 산을 다녀본 그녀지만 무엇보다 우리 산의 아름다움이 최고라고 극찬했다. “세계 각지의 이름난 고산들을 가봤지만, 한국의 산만큼 아름다운 곳이 없어요.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진 나무와 바위, 시내는 우리 산에서만 볼 수 있죠. 얼마 전 금강산에 다녀왔는데, 오르면 오를수록 산 전체에서 여성적인 아리따움이 풍겨나와 정감을 주더군요.” 하지만 그녀에게 산이 항상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 있는 곳 만은 아니었다. 97년 히말라야 가셔브룸(Gasherbrum) 등정 때 대원 한 명이 크레바스(얼음의 갈라진 틈)에 빠지는 사고를 목격했다.

 

산에 오르면서 그가 목격한 최초의 죽음은 99년 브로드피크 등정 때. 연세대 재학생이었던 허승관 대원이 밤 사이에 실종됐는데 결국 그가 입었던 빨간 재킷만 발견됐다. 2001년 K2 등반 때는 오씨 자신이 벽면에서 50m 아래로 추락했으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에베레스트 등반때도 동료였던 계명대 산악부 박무택 대장의 시신과 마주쳤고, 그녀 역시 하산길에 저체온증으로 쓰러져 죽음 직전에 이르기도 했다. 이처럼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맞닥뜨리는 산에 왜 가냐고 묻자 오씨는 “산은 내 삶 자체”라며 “왜 산에 오르냐고 묻는 것은 왜 사냐고 묻는 것과 같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전북 남원 출신인 오은선은 초등학교 5학년때 북한산 인수봉에서 암벽 등반하는 사람들을 보며 산에 대한 열정을 처음 마음에 품었다. 본격적인 산과의 인연은 1985년 수원대 전산학과 입학후 산악부에 들어 가면서부터이다. 그녀는 대학생활 4년 내내 집과 학교, 산을 오가는 생활을 계속하며 자신의 꿈에 천천히 다가갔다. 1989년 대학 졸업후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도 산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그녀는 1993년 대한산악연맹에서 주고나한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뽑히자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전문 산악인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부모와 주위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3년 고 지현옥 대장, 김순주 대원 등과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섰지만 그녀의 1차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에베레스트는 그녀가 ‘산악인’의 길로 들어서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등산용품 제조회사, 학습지 교사생활 등으로 생계를 꾸리며, 히말라야 산맥의 브로드피크(Broad Peak 8천m, 파키스탄)와 마칼루(Makalu)에 올랐다. 2001년에는 K2 등반에 성공했다. 그렇게 산에 빠져 살다보니 그녀는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결혼에 대한 질문에 “서른 넘어서면서 ‘결혼도 해야 되지 않나’ 싶었지만 산이냐, 결혼이냐 하면 결론은 언제나 ‘산’이었다”며 수줍게 미소지었다. “`이 사람이다’ 싶으면 산을 잠시 접어둘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는 그녀는 “그런데 여성등반대 꾸리고 해야할 일이 많아 과연 결혼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라며 오히려 반문했다. 아직 그녀의 꿈은 끝나지 않았기에 당분간 결혼은 생각하기 힘들 듯하다. 그녀는 “남성 대원들보다 여성 대원들끼리 떠나는 산행이 업무 분담이 잘 되고 팀웍도 좋아져 훈련성과가 더 좋다”며 “실력있는 여성 산악인들이 많아 히말라야 등정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자신했다.                           - 경인일보 2006년 12월 09일 (토) -
  -------------------------------------------------------
   

      

                  - 시샤팡마 등정길에 오른 여성 산악인 오은선 -

 

초등학교 5학년 때 북한산 인수봉에서 암벽등반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산악인의 꿈을 키운 그는 1985년 대학 입학 후 산악부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산과 인연을 맺었다. “세계 각지의 이름난 고산들을 다녀봤지만, 한국의 산만큼 아름다운 곳도 없어요.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진 나무와 바위, 시내는 우리 산에서만 볼 수 있죠.

 

며칠 전 금강산에 다녀왔는데, 오르면 오를수록 산 전체에서 여성적인 아리따움이 풍겨나와 정감을 주더군요.” 오씨는 앞으로 여성으로만 팀을 꾸려 낮은 산부터 8000m대 고산까지 단계적으로 등반하고 싶다고 했다. “여성 산악인의 선구자로서 여성 후배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게 내 역할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 (신동아 통권 546호/2005 년 03 월 01일) 이지은 기자. -
 
한국여성으로는 최초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50m)를 단독등정하고 돌아온 산악인 오은선씨(38·영원무역·수원대 산악회 OB)는 만나자마자  “미안합니다.” 이 말부터 꺼냈다. 조난 사고로 목숨을 잃은 계명대 산악부 박무택 대장(36)의 시신을 발견하고도 그대로 놔두고 돌아와야 했던 게 두고두고 가슴 아프다고 하였다. 오씨는 지난달 20일 에베레스트 북동릉 루트 중에서 가장 어렵다는 해발 8750m의 세컨드스텝을 올라서자마자 박 대장의 시신을 발견했다. “다가갈 수 없는 암벽 위 로프에 숨진 채 매달려있는 박 대장을 보는 순간 울컥 눈물이 쏟아졌어요. 그래도 얼굴은 편안해 보였습니다.”

 

오씨는 이 사실을 베이스캠프에 알린 뒤 계속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그냥 내려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정상에 오르는 것이 산악인의 도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씨가 박 대장 일행의 조난소식을 들은 것은 지난달 18일 오후 3시경 이었다. 당시 마지막 캠프인 해발 8300m 지점의 캠프5에 있던 그는 설맹(눈에서 반사되는 햇빛으로 각막이나 결막에 염증이 생겨 앞이 안 보이는 현상) 때문에 캠프까지 내려갈 수 없다는 박 대장의 무전연락을 받았다. 2차 공격조로 캠프에 함께 있던 백준호씨(37)가 정상 도전을 포기하고 박 대장을 구하러 간다고 나섰다.

 

오씨는 2차 사고가 날까봐 말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어서 자신의 산소통 등 장비를 백씨에게 내줬다. 이틀 동안 캠프5에 대기하고 있던 오씨는 20일 혼자 정상 도전에 나섰다. 강추위에 산소가 희박한 곳에서 이틀 동안 지샌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 개당 10kg씩이나 되는 산소통을 두개나 짊어지고 오르던 오씨는 끝내 산소통 한 개를 버렸다. “나중에 어떻게 되든 너무 무거워 어쩔 수 없었다”고 하였다. 출발 11시간 만에 정상에 올랐다. 10분간 정상에 머물다가 내려왔지만 30분도 안돼서 산소가 바닥나 버렸다.

 

정신이 아득한 상태에서 내려 오느라 보통 3∼5시간 걸리는 캠프 5까지 11시간이나 걸렸다고. 멀리 캠프5 불빛이 보일 무렵 기진해 주저앉고 말았지만 다행히 타국 원정대 셰르파의 눈에 띄어 텐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를 기다리기로 했던 셰르파는 기상 악화를 이유로 하산해버린 뒤였다. 이번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오씨는 세계 7대륙 최고봉 중 4개째 정상에 올랐다. “며칠 전 인수봉에서도 사고가 나 생명을 잃었잖아요, 인생이란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어려운 상황일수록 용기를 내야죠.”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오씨는 산에서 인생의 의미를 터득한 한국 최고의 여성 산악인이다.

                  - 스포츠 동아 2004-06-28  / 전 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