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넘버3' 산악인 한왕용 *-

paxlee 2007. 2. 1. 14:36

‘넘버3’ 산악인 韓王龍씨

 

7월 15일 오전 11시30분(파키스탄 현지시각) 산악인 한왕용(韓王龍·37·에델바이스 소속)씨가 히말라야의 난봉 브로드피크봉(8047m)을 등정, ‘8000m급 봉우리 14좌 완등’이라는 대기록 달성에 성공했다. 이는 세계적으로는 11번째이며, 한국인으로서는 2000년 엄홍길(嚴弘吉), 2001년 박영석(朴英碩)씨에 이어 세 번째다. 이로써 한국은 8000m급 14좌를 완등한 산악인을 3명 배출한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한왕용씨의 완등 소식을 전해 들은 산악인들은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인이 얼마든지 역경을 헤쳐나갈 저력을 갖고 있음을 안팎으로 일깨워준 쾌거”라고 기뻐했다.

 

2002년까지 12개 봉 등정을 마친 한씨는 남은 2개 봉인 가셔브룸2봉과 브로드피크봉 동시 등정을 노리고 5명의 대원과 함께 출국했다. 먼저 지난 6월 26일 가셔브룸2봉(8035m) 등정을 무난히 마친 데 이어 곧바로 브로드피크봉로 향했다. 한왕용씨는 김웅식·나관주 대원, 셰르파 2명과 더불어 203년 7월 12일 1차 시도에서 정상 밑까지 갔다가 악천후로 후퇴했고, 15일 오전 1시쯤 재차 도전해 10시간30분에 걸친 분투 끝에 감격의 14좌 고봉의 완등을 이뤄냈다. 등정 후 본지와의 위성전화에서 한왕용 대장은 “감격스러워 잠시 울었지만 조금 허탈하기도 하다”고 등정 소감을 밝혔다.

 

먼저 14좌 완등을 이룬 엄홍길과 박영석은 아직도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새로운 기록을 위해 히말라야의 위성봉우리 얄룽캉봉(8505m)을 올랐거나 혹은 남극점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이 ‘세 번째’ 산악인 한왕용은 좀 태평이다. 그를 충동질했을 때 “삶에서는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고 반응했다. “14좌 완등은 내가 좋아서 했고 스스로에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줬으니 몇 번째든 상관없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 속으로 돌아갈 때라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계속하려면 결혼은 왜 했고, 아이는 왜 낳았는가. 시간이 좀 지나면 나는 잊혀진 산악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런 그가 2006년 히말라야의 K2봉(8611m)을 다시 찾아갔다. 하지만 기록 경쟁의 도전과 무관하다. 쓰레기 청소를 위한 '클린마운틴 원정대' 등반이다. 그는 “내가 히말라야의 등반 과정에서 저지른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2002년 K2봉의 베이스캠프에 있는 일본 원정대의 텐트로 놀러갔을 때였다. 식사 대접을 받았는데, 한국산 깻잎·마늘·장아찌 통조림이 나왔다. 일본팀은 ‘캠프1에서 다른 원정대가 버리고 간 것을 주워 왔다’고 했다. 그 내용물은 한국 원정대들이 버린 것이었다. 나도 내게 짐이 되는 것을 그렇게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산을 떠나 왔지만 산은 남아 있다. 나는 과거의 흔적을 지우는 마지막 원정을 하고 싶은 것이다.” 14좌 완등을 추구한 선배 산악인들이 명성에 힘입어 기업체의 후원을 받을 때, 그는 직장에 다니며 후배들과 원정 경비를 모았다. 그의 원정대는 2~3명으로 늘 빠듯했다. 그는 “산을 타는 것은 누구에게 고용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행위인데 남에게 도움을 바라는 것이 싫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10년에 걸쳐 14좌 완등을 이뤄냈다. 그 과정에서 단 한 명의 동료도 잃지 않았다. 이는 10여명의 대원을 잃은 다른 완등자들과는 비교되는 점이다.

 

그는 “가장 능력이 떨어지는 대원과 보조를 맞추었고 그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그냥 내려왔다. 정상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포기했다”고 말했다. “산악인에게 등정(登頂)의 욕심은 강렬한 것이지만 산은 늘 그 자리에 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올라갈 기회는 언제든지 있다. 이번에 실패하면 원정 경비를 벌어 다시 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설령 못 올라간들 어떤가. 산 정상에 올라간다고 인생이 바뀐 적이 있었는가. 꼭 정상을 밟아야겠다는 욕심이 화를 불렀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그는 이렇게 삶을 이야기 하였다.

 

한씨는 전주 개척산악회원으로서 1994년 초오유봉(8201m)을 오른 이후 매년 한두 개씩 8000m급 고봉을 등정, 남다른 고산 체질을 과시했다. 그는 등반 과정에서 여러 희생적 일화로도 유명한 산악인이다. 1995년 10월 14일 오후 2시30분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그는 촬영을 마치고 동료 대원, 셰르파와 서로 연결한 로프를 풀었다. 모든 산악인들이 늘 그랬듯 한 명의 실수가 전원 추락으로 이어지지 않게끔 ‘각자 살기’로 하산을 시작한 것이다. 얼마 후 무전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뒤를 이어 하산하고 있던 한 대학산악부원이 8750m지점에서 탈진해 주저앉았다는 전갈이었다.

 

그는 동행한 셰르파와 더불어 그 대원을 앞뒤로 로프 연결을 한 뒤 20여 시간에 걸친 탈출을 감행했다. 주저앉으면 달래기도 하고 피켈로 엉덩이를 후려치기도 하며 다음날 오전 3시가 넘어서야 그 자신도 초주검이 된 상태로 캠프까지 하산할 수 있었다. 2000년 K2봉(8611m) 등정 때는 ‘나이 든 선배가 언제 또 이런 고산 등정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겠나 싶어서’ 선배에게 산소 마스크를 벗어준 일이 있다. 그는 산소마스크를 넘기고도 세계 제2위 고봉이자 ‘마(魔)의 산’이란 별명을 가진 K2봉 정상을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하산 중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탈진, 눈밭에 주저앉았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울다가 돌도 채 지나지 않은 아들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용기를 냈고, 결국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귀국 직후 네 차례에 걸친 뇌혈관 수술을 받아야 했다. 8000m급 14좌 완등자들은 그 과정에서 누구든 여러 명의 동료와 셰르파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한왕용씨는 놀랍게도 등반 도중 동료가 목숨을 잃은 경우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정상을 코앞에 두었더라도 날씨가 나빠지면 단호히 되돌아서는 뛰어난 자제력 덕분이다. 지구상에는 8000m가 넘는 거대한 산봉이 모두 14개 있으며, 1986년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가 최초로 14좌 고봉의 완등에 성공했다.

 

―정상에 섰을 때의 감흥은 있지 않는가?

 

“정상에 서 있으면 어떻게 살아 내려갈지를 걱정했다. 히말라야 14좌에서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브로드피크봉(8047m)의 정상에 올랐을 때, 베이스캠프에서 무전기를 통해 소감을 물었다. 내가 말주변이 없어 그런가, ‘아무 생각없다’고 답했다. 물론 기뻤다. 앞으로 더 이상 높이 올라가지 않아도 되니까.” 그는 2000년 K2봉의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죽음의 순간을 맞은 적이 있었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눈보라로 하산 과정에서 길을 잃었다. 올라오면서 남긴 발자국은 지워졌다. 언제라도 낭떠러지를 향해 발을 잘못 디딜지 모른다. 결국 7000m쯤에서 하산을 포기하고 주저앉았다.

 

드디어 죽는구나. 의식을 잃어갈 즈음 바로 앞에 노란 오줌자국이 보였다. 하산하던 누군가가 오줌을 누었던 모양이다. 그걸 이정표로 삼았다. 방향을 놓치지 않으려고 왼쪽 대각선으로 50발자국 다시 반대쪽으로 50발자국씩 걸으며 더듬더듬 내려왔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한 발 헛 디딤은 곧 죽음의 길로 이어지는 길이므로 그는 추위와 싸우며 긴장을 멈추지 않고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눈과 눈 속을 걸으며 한 발자국 옮길 때 마다 발 디딤을 확인하면서 진정으로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가족을 생각하면서 죽음의 길을 넘어서 돌아 올수 있었다.  

 

―그럼에도 왜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했는가?

 

“자기가 좋아해 마음먹은 것을 한 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0년간 취미로 그림을 그려온 사람에게 왜 그리는지를 따질 수 없지 않은가. 다만 14좌 완등의 영광이 내게만 집중돼 대원들에게 미안했다. 혼자였다면 그걸 못했을 것이다. 나는 동료들의 힘을 많이 빌렸다. 쉬운 산도 혼자 가면 어렵고, 어려운 산도 함께 가면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 묻기를 “산을 안 탔다면 무엇을 했을까”라고 하자, “식당 주인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그는 요즘 한 등산장비업체의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산과 사회, 어느 쪽이 더 힘든가?

 

“산소가 희박한 고산을 오르는 것보다 사회 생활 적응이 더 힘들다. 사람들은 온통 무엇인가 잡으려고 날뛰는 것 같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다. 파벌을 짓고 거짓말 하고, 무엇보다 자기에게 손해보는 일은 절대 안 하려고 한다. 처음 산을 다닐 때는 나도 급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유로워졌다. 오늘 어려우면 내일을 기다리고, 정녕 안 되는 것의 한계를 받아들일 줄도 알게 됐다.”  “앞으로 아내에게 내 인생을 투자하려 한다. 아내는 노인복지시설을 하려고 요즘 공부 중이다. 섬진강변에 복지시설을 지을 장소도 봐 놓았다. 거기서 아내의 일을 도우면서 보낼 작정이다."

 

출처 : 조선일보(2003.07.17) 安重局기자 와 [최보식의 인물기행](2004.05.07)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