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산악인 남상익 *-

paxlee 2007. 4. 12. 22:02
“모든 역경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게 산악정신”

소속
경기도산악연맹 부회장
대한산악연맹 이사
경기도등산학교 강사
돌비알산악회 고문
   등반경력
91년 매킨리 등정(웨스트립)
92년 천산산맥 칸텡그리 등정
93년 엘브루즈 동봉 등정
94년 매킨리 등정(웨스트버트레스)
프랑스스키등산학교 연수
몽블랑 등정
95년 킬리만자로 등정
96년 엘브루즈 서봉 등정
05년 가셔브룸2봉 등정
9월27일 저녁, 수원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경기도산악연맹 가셔브룸1·2봉 연속등정 보고회장에 들어서면서 과연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그런데, 뜻밖에 남상익(南相翼·53) 대장은 환한 표정으로 참석자들을 맞아주었다. 단지 양손 검지와 중지에 붕대를 감고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그는 지난 2005년 8월7일 오전 7시30분 53세의 적잖은 나이에 8,000m급 고봉 정상에 올라 가셔브룸2봉(8,035m) 한국 최고령 등정기록을 세웠지만,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했다.

8월6일 남상익 대장은 파키스탄 히말라야의 가셔브룸2봉 C4(7,350m)에서 네번째 정상 공격을 앞두고 있었다. 이 날 등정을 목표로 전날 C3에서 올라왔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었다. 해가 뜨면서 날씨가 급속도로 좋아지자 남 대장은 내일은 틀림없이 성공하리라 자신했다. 그 날 밤 10시30분, 김병권, 송하민 대원, 셰르파 2명과 함께 정상으로 한 발씩 다가섰다. 다섯 명 모두 안자일렌한 채 등반했다.

 

수원 지역 고산등반계의 대부

오십 중반의 나이에 젊은 후배들과 고봉을 등반한다는 게 쉬울 리 없다. 높이를 더할수록 체력은 점점 떨어졌다. 그렇지만 포기하면 후배들도 따라 내려서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아무 말 없이 한 발씩 올랐다. 특히 맨 뒤에서 올라오는 송하민 대원은 C2 아래서 10여m 추락 이후 컨디션이 뚝 떨어진 상황이었기에 후배의 기가 꺾이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대장님, 먼저 올라가세요.”

기나긴 시간이었지만, 결국 정점은 다가왔다. 마지막 캠프를 출발한 지 9시간이 지난 이튿날 오전 7시30분경 정상을 한 발 앞두고 앞장서 오르던 김병권 대원은 남 대장에게 경기도산악연맹 가셔브룸2봉 초등의 영광을 돌렸다. 건강이 확신 서지 않는 상황에서도 원정대를 이끌어준 남 대장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정상이 칼날 같더군요. 그래서 양다리를 벌린 채 걸터앉았죠. 정말 파노라마가 멋있더군요. 한데 태극기를 펼치려고 하니, 손에 잘 잡히지 않지 뭐예요. 당연히 이상하다 싶었죠. 셰르파가 장갑을 벗긴 뒤 제 손을 보더니 등정 사진이고 뭐고 빨리 내려가자고 하더군요.”


 

▲ 53세에 해발 8,035m인 가셔브룸2봉 정상에 오른 남상익씨.

손이 점점 굳고 감각이 무뎌졌다. C4, C3를 거쳐 C2로 내려선 다음 수프를 끓여 먹고는 곧바로 C1으로 향했다. 1분 1초라도 빨리 밑으로 내려서야 한다는 초조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설원지대까지는 고정로프에 하강기를 걸고 억지로 내려섰지만 이후 몇 발짝도 걷지 못해 주저앉곤 했다.

“억지로 내려선 게 오히려 피로를 가중시키고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게 한 것 같았습니다. C1에 도착하자 후배들이 준비해놓은 미지근한 물에 담가 동상기를 조금 가라앉힌 뒤 내화를 신은 채 잠들었으니까요. 그 바람에 오른쪽 발가락도 동상이 걸린 것 같아요. 하루 더 빨리 하산할 수 있다는 정보에 따라 곤도고로 패스를 하행 캐러밴 루트로 잡는 바람에 빙하를 거슬러 해발 6,000m 가까이 되는 패스를 넘고, 또 1,000여m 절벽을 내려서느라 발에 무리도 많이 갔을 겁니다. 베이스캠프에서 주사를 놔주고, 하행 캐러밴 중 복용할 약까지 지어준 이탈리아팀 여자 의사와 또 이튿날 만난 스페인 의사도 괜찮을 거라 해서 마음 놓았던 것도 잘못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게 운명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 가셔브룸 BC에서 이탈리아 여의사의 지시에 따라 치료를 받는 남상익 대장.
남상익씨는 경기도, 특히 수원 지역에서는 고산등반의 대부격인 산악인이다. 91년 매킨리(6,194m)를 시작으로, 92년 천산산맥 포베다(7,439m)-칸텡그리(7,010m), 93년 엘브루즈 동봉(6,621m), 96년 엘브루즈 서봉(5,642m) 등 수원 지역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원정을 대장으로서 이끌었다. 그러나 97년 에베레스트와 2000년 K2(8,611m) 등 히말라야 고봉 원정을 추진했으나, 재정적인 후원이 이뤄지지 않아 끝내 무산되곤 했다.

남상익씨가 산에 맛을 들인 것은 77년 제대 직후였다. 충북 증평 출신인 그는 제대 직후 가정 형편상 대학 복학을 포기하고, 수원의 진한상호신용금고를 다니던 중 친구들과 지리산을 찾았다. “뱀사골을 거슬러 올라 연하천에서 하룻밤 묵었습니다. 그 때는 뱀사골이 길기도 길었지만 정말 호젓하고 아름다웠던 것 같습니다. 아마 첫날 잔 곳이 연하천 부근이었을 겁니다. 그때는 대피소가 없었으니까요. 하루 자고 났더니 세상이 확 바뀌어 있더군요. 안개 속 무릉도원에 들어선 기분이었으니까요.”

▲ 94년 매킨리를 2회째 등정한 남상익씨(오른쪽). 왼쪽은 93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최오순씨.
그 날 이후 남상익씨는 산에 흠뻑 빠져 지냈다. 그의 도보산행은 자연스럽게 암벽등반으로 이어졌고, 또 자연스레 흰 산을 머릿속에 그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주변에 공장이 많아 외지 사람이 많이 사는 수원 지역에서 향토 의식을 고취시키며 재정후원을 이끌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차례나 히말라야 원정이 무산되자 그는 적은 비용으로도 나설 수 있는 산들을 찾았다. 그게 91년에 나선 매킨리였다. 첫 원정이었지만, 당시로서는 그가 아는 매킨리 최난 루트로 정상을 노렸다.

“능선길이가 5km에 이르는 캐신리지를 노렸지만 원정 직전 일어난 지진으로 크레바스가 생기는 바람에 기점인 재패니스 쿨와르로 접근조차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마침 며칠 전 헤어진 서울대 미대팀이 등반하는 웨스트립으로 방향을 틀었죠.”안개와 구름 속에 오른 뒤 안개가 걷히자 엄청난 고도감에 긴장하기도 했지만, 사흘 앞서 등반에 나선 서울대팀을 추월하는 등 빠른 속도로 등반, 남상익씨는 후배 4명과 함께 정상에 올라서는 데 성공했다.

 

한 해 걸러 본인은 뇌수술, 아내의 혈액암 수술

이듬해 92년에는 돌비알산악회를 비롯한 6개 산악회로 이루어진 수원연합팀을 이끌고 천산산맥의 고봉에 도전했다. 그 때도 자금 때문에 갈등이 많았다. 열심히 훈련했지만 막판에 계획한 경비가 마련되지 않아 각 산악회에서 1명씩 제외해야 했다. 대장인 남상익씨도 당연히 빠지는 쪽이었다. 그렇지만 원정에 참가할 수 없다는 통보에 충격을 받은 후배들이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남상익씨는 결심했다. 자신의 명의로 발행한 2,000만원짜리 어음을 할인해 경비를 마련했다. 그리곤 후배들을 이끌고 앞서 출국한 팀을 쫓아갔다. 그런데 현지에서는 황급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 94년 매킨리 웨스트버트레스 루트 마지막 캠프인 데날리빌리지에서. 맨 왼쪽부터 박영석, 남상익, 한상국, 고 강준호, 기자.

“포베다 C2에 올라서니까 오후 4시경 태원이가 후배인 임영택과 정상에 올라섰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더군요. 그래서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등정사진 찍고 빨리 하산하라 일렀죠. 이후 나흘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답니다.”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시간이었다. 기다리다 못해 국제캠프를 운영하는 카자흐스탄 산악인들에게 구조를 요청했다. 나흘째 되는 날 7,000m 지점에서 더 이상 기다리는 게 무리다 싶어 마지막 캠프에서 등정조를 애타게 기다리던 최오순 대원에게 하산을 지시했다.

“다행히 부근에 있던 카자흐스탄 산악인들에게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배를 데리고 내려올 때까지 멀쩡하던 태원이가 C3 설동에서 잠깐 쉬고 나더니 탈진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발가락은 이미 동상으로 엉망인 상태였고요. 그런 상태에서도 후배를 안전하게 하산시켜야한다는 책임감이 태원이를 견디게 해주었던 거죠. 그래도 지금 생각해봐도 멋진 등반이었습니다. 두 산 모두 알파인스타일로 해냈으니까요.”

남상익 대장은 박태원 대원을 후송시킨 다음 후배들을 이끌고 칸텡그리 등반에 나섰다. 무엇보다 이듬해인 93년 출국한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 최종선발을 앞두고 있는 최오순 대원에게 좋은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그 등반에서 남 대장은 후배 5명을 이끌고 정상에 올라서는 데 성공했다.

▲ 92년 포베다 등반 중 심한 동상을 입은 후배 박태원씨를 후송하다 쉬고 있는 남상익씨(왼쪽에서 두번째.

이렇게 이태 연속 고산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지만, 꿈꿔온 8,000m급 거봉 원정은 멀기만 했다. 그래도 그의 고산등반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93년 엘브루즈 동봉 등정 이후 94년 매킨리(웨스트버트레스), 한국산악회 프랑스스키등산학교(ENSA) 연수, 몽블랑(4,807m), 95년 킬리만자로(5,895m), 96년 엘브루즈 서봉(5,642m) 등 96년에 이르기까지 매년 하얀 산의 정상에 올라서면서 꿈을 이어갔다.

“엔사 교육에서는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현지 산악인들은 생활 자체가 등반이었습니다. 우리 교육이 전수 차원이라면 그들 교육은 원리에 충실한 연구과정이었습니다. 산에 대한 생각과 가치관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 전에는 인수봉 정도 오르다, 원정만 다녀오면 산에 관해 웬만큼 다 할 줄 아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후로는 평생 배워도 모자란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으니까요. 짧은 기간에 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자연의 원리를 습득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니까요. 그런데 참 힘들더군요. 97년에 계획했던 K2 원정은 IMF로 무산되고, 새천년을 맞는 2000년에는 에베레스트 원정을 계획했지만 무산되고 말았으니까요.”

그래도 그는 고산원정에 대한 꿈을 저버리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예상치 못한 병으로 여러 해 동안 등반을 접어야 했다.

▲ 대한산악연맹 창립기념 산행 때 울릉도 성인봉에서.

“지금도 날짜를 잊어먹지 않고 있답니다. 2001년 9월1일, 점심을 먹고 났는데 구토가 나고 머리가 아파 오기에 급체 정도로 생각했죠. 집에 돌아가 이튿날 백두산 산행을 앞둔 집사람이 배낭 싸는 데 도와달라는 얘기를 듣고도 그냥 침대에 쓰러지고 말았답니다. 그래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이튿날 아내를 정류장까지 데려다주었죠. 그런데 차를 모는데 갑자기 머릿속에서 피가 흐르는 느낌이 들지 뭐예요.”

장비점 문을 열고 난 뒤 정신이 몽롱해졌다. 카운터 뒤에 누워 있다 후배의 부축을 받고 부근의 내과를 찾았을 때는 “빨리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의사의 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빈센트병원 응급실을 찾았을 때도 의사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일반 내과 병실에 자리를 내주었다.

“뇌동맥지주막파열이라는 병명이었습니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모습에 황급히 찾아온 뇌 전문의가 확인한 결과 현장에서 30%, 이송 중 30%, 수술 중 30% 사망할 가능성이 있고, 또 수술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한 쪽은 마비될 가능성이 있을 만큼 위험한 상황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8시간의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로 옮겨지자마자 깨어나고 움직였지 뭐예요. 아마 빨리 깨어나지 못했더라면 지금 한 쪽을 제대로 못 쓰는 상태로 지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비되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건강에 관한 한 누구보다 자신했던 그였기에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이후 남씨는 모든 행동을 조심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듬해에는 또 다른 고통을 겪어야했다. 이번에는 아내의 중병이었다. 급성백혈병이라 불리는 혈액암이었다.

▲ 94년 여름 프랑스스키등산학교 교육을 마친 뒤 유학재씨(왼쪽)와 오른 몽블랑 정상.

“수술을 하더라도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지 않다는 주치의 말을 듣는 순간 정말 암담하더군요. 아무튼 주위 사람들이 많이 도와준 덕분에 지금 거의 회복단계에 이르렀답니다. 집 부근의 야트막한 산도 오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니까요.”

남상익씨는 수술 후유증을 염두에 두고 전문 등반은 거의 하지 않고 지냈다. 이번 가셔브룸 원정 역시 함께 나설 생각이 아니었다. 단지 여러 차례의 경험을 후배들에게 전해주고픈 마음에 훈련대장만 맡았다. 그런데 막상 원정이 코앞에 다가오자 후배들은 남상익씨가 대장을 맡아줄 것을 적극 권하는 바람에 뿌리치지 못했던 것이다.

“머리에 또 이상이 오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BC에서 지휘만 하는 조건으로 원정에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막상 BC에 도착하니 가셔브룸1봉과 2봉 루트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두 산의 루트가 갈라지는 C1으로 올라갔고, 또 1봉 등반 때 위쪽 상황이 어떤가 하는 궁금증 때문에 C3까지 올라가게 됐습니다. 그러다 1봉을 시즌 초등으로 성공하고 난 뒤 나머지 2봉 등반대원들이 세 차례나 정상공격에 실패하자 더 이상 오를 힘을 잃고 말았어요. 허가받은 등반기간이 다 끝나가 열흘을 연장해 놓았는데도 등정이 이루어지지 않자 한 번의 기회밖에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 들더군요. 그래서 체력이 남아 있는 저하고 김병권 대원이 정상공격에 나섰던 거죠. 송하민 대원은 철수중 C1에서 합류했고요.” 

 

“아내와 약속한 건강산행부터 지킬 터”

남 대장에게는 가셔브룸 1봉과 2봉 연속 등정이 목표였다. 그래야만 다음에 경기도와 수원시 차원에서 히말라야 고봉 원정의 지속적인 후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뒤를 이을 후배들이 나올 것 같았다. 때문에 뇌출혈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상까지 올랐던 것이다. 가셔브룸 원정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그의 모습은 처참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양손과 오른발은 붕대를 감고, 평소 73kg의 체중이 60kg으로 13kg이나 빠져 있었다. 두 차례의 수술 끝에 양손가락을 절단했다. 그런데도 보고회 때 그의 얼굴에는 성취감이 배어 있었다.

▲ 85년 처남인 최원식 경기도산악연맹 회장(왼쪽)과 맏아들 광우군과 함께 오른 고흥 팔영산.

“이번에 히말라야를 가보니까 유명하다는 외국 클라이머들도 만나게 되더군요. 그래도 한국팀이 제일 막강한 것 같았습니다. 제일 먼저 들어가 체력이 소진된 순천대팀도 그렇고, 저희 팀도 그렇고 앞장서 길을 뚫고 고정로프를 깔았으니까요. 특히 2봉을 등정한 외국 산악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순천대팀이 길을 닦아놓으면 눈치를 보다 오르곤 했습니다. 분명 산악인답지 못한 행동이죠. 그런 면에서 가셔브룸1봉 시즌 초등을 달성한 우리 팀이 자랑스럽습니다.”

남상익씨는 등산장비 판매업계에서 소문난 경영인이다. 87년 “산에 다니는 사람이 장비점 하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주변 사람들의 우려 속에서 아이거산장을 연 그는 현재 수원 중심가에 3층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는 아이거산장 외에 노스페이스, 트렉스타 등 3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언젠가 3개 매장을 한 건물에 모은 등산장비 전문 빌딩을 세우는 게 꿈이다.

80년 최미자씨(50)와 결혼해 아들 둘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끌어가는 남상익씨는 산에 관한 한 가족들도 동호인이다. 수술 직전까지는 아내 역시 해외트레킹을 즐길 정도로 산에 흠뻑 빠져 지냈고, 이번에 원정단장을 맡아 베이스캠프까지 캐러밴했던 최원식(66) 경기도산악연맹 회장은 손위 처남이다. 최 회장과는 킬리만자로와 엘브루즈 등 대륙 최고봉 정상을 2개나 함께 올랐다.

▲ 암벽등반에 막 맛들인 83년 설악산 천화대에서.

남상익씨는 원정기간 중인 7월9일 BC에서 53번째 생일을 맞았다. 경기연맹팀과 순천대팀 외에도 미국,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일본 등 외국 산악인들이 30여 명이나 축하객으로 참석했으니 국제적인 생일파티를 연 셈이다. 그는 산사람들은 다른 스포츠에서는 보기 힘든 특이한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신체적인 결함에 연연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등산은 다른 스포츠와 판이한 것 같습니다. 그게 앞에 닥친 모든 일에 대범하고,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등산가들의 정신세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발가락 10개를 모두 잘라낸 후배도 어떤 상황에서든 꺾이지 않고 살아가는데, 그보다 나은 제가 힘들고 어렵다고 표현할 수는 없는 일이죠. 오히려 사람들이 저를 안쓰러워하는 게 부담스러울 적이 많답니다. 모든 것을 팔자이려니 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경기도등산학교를 이끌며 후배 양성에도 힘을 기울여온 남상익씨는 이번 원정으로 경기도산악연맹의 고산등반이 탄력을 받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선 원정을 떠나기 전 아내에게 약속한 산행부터 실행할 생각이다.
“아내나 저나 큰 병을 겪어보고 나니까 건강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출국 전 약속했답니다. 집 부근에 있는 청명산부터 차근차근 다시 시작하자고요. 그러다 보면 우리 부부 모두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겠지요.”

- 글 한필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