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에베레스트 30주년 헌정 등정 (10) *-

paxlee 2007. 5. 17. 21:35

 

               코리안 신루트 개척 꿈 설산에 묻히다
 

                            

 ->고(故) 오희준(왼쪽) 부대장과 이현조 대원이 에베레스트 남서벽 루트 개척에 나선 모습. 뜻밖의 눈사태에 희생된 이들은 결국‘코리안 루트’ 개척의 꿈을 날 선 남서벽에 묻어야만 했다. 박영석 원정대 제공 

 

 

                      

 

'세계의 정상'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한국 최초의 새 길을 열고자 했던 산 사나이들이 불의의 사고로 귀한 목숨을 잃었다. 에베레스트 등정 30주년 기념 원정에 나섰던 박영석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한국일보ㆍ대한산악연맹ㆍSBS 후원)의 오희준(37ㆍ골드윈코리아) 부대장과 이현조(35ㆍ골드윈코리아) 대원은 16일 정상을 눈앞에 두고 안타깝게 산화했다. 박 대장과 나머지 대원들은 날이 밝자마자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 두 대원의 시신을 수습했으며, 17일 오전까지 베이스캠프(5,460m)로 옮길 예정이다. 시신은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까지 헬기로 옮겨진뒤 서울로 운구된다. 원정대도 철수한다.

 

오 부대장과 이 대원은 이날 오전 1시 50분(현지시간)께 에베레스트 남서벽 공격캠프 4(C4ㆍ해발 7,800m)에서 머물던 중 갑작스러운 눈사태에 캠프가 휩쓸리면서 사고를 당했다. 두 사람은 17일로 예정됐던 1차 정상 도전을 위해 이날 C4를 출발해 해발 8,300m인 C5에 오르기 위해 대기중이었다. 에베레스트의 여신은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정상을 향하던 두 한국 산악인의 투혼은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영원히 아로새겨질 것이다.

 

박영석 원정대는 "지난 밤 폭설이 쏟아져 곳곳에서 눈사태가 일어났다"며 "C4에 머물던 오 부대장과 전진베이스캠프(ABCㆍ해발 7,400m)에 있던 박영석(44ㆍ골드윈코리아) 대장이 폭설에 따른 진퇴 여부를 놓고 무전으로 통화하던 중 새벽 1시 50분께 갑자기 '콰과광' 큰 눈사태 소리가 난 직후 교신이 끊겼다"고 전했다. 당시 C4 텐트에는 오 부대장과 이 대원만 남아있었다.

 

고 오희준(37ㆍ골드윈코리아) 부대장과 이현조(35ㆍ골드윈코리아) 대원이 목숨을 잃은 에베레스트 남서벽은 히말라야에서도 손꼽히는 난코스다. 정상까지 수직의 벽 높이만 2,500m에 달한다.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첫 도전때 추락사고를 당했던 박영석(44ㆍ골드윈코리아) 대장은 그 이후 반드시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단 루트를 뚫겠다고 다짐했다.

 

오 부대장도 “히말라야 14좌 완등보다 남서벽 도전에 더 큰 의미를 둔다”며 “히말라야에 코리안 루트를 내는 것은 필생의 꿈”이라고 강한 의지를 보여왔다. 박영석 원정대의 계획은 15일 전진베이스캠프(ABC)인 공격캠프 2(C2ㆍ해발 7,400m)에서 오 부대장과 이 대원 조가 C4(7,800m)로 출발, 16일 해발 8,300m에 C5를 구축하고는 다음날 1차 정상(8,848m) 공격에 나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박 대장을 뒷받침해 팀을 이끄는 최고의 베테랑들. 결국 정상 공격의 임무는 그들에게 맡겨졌다. 15일 밤 에베레스트 정상 부근에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자정을 넘긴 이른 새벽 여기 저기서 크고 작은 눈사태 소리가 들려오자 오 부대장은 C2에 있는 박 대장을 무전으로 찾았다. 박 대장과 철수 여부 등 향후 대책을 숙의하기 위해서 였다. 눈사태가 오 부대장과 이 대원이 머물고 있던 텐트를 덮쳤다. 갑자기 교신이 끊긴 무전기에선 암연 같은 침묵만 전해졌다.

 

에베레스트 등정 30주년 기념으로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코리안 신루트를 개척하려던 박영석 원정대의 도전은 처음부터 크고 작은 난관에 부딪혔다. 기상 불안으로 캐러밴 출발지인 루크라(해발 2,840m)까지 오는 비행기가 뜨지 못해 하루 늦게 도착했고, 베이스캠프까지 원정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예약해놓은 야크를 다른 원정대가 가로채는 바람에 애를 먹기도 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해서는 이재용(36) 대원이 갑자기 몸이 나빠져 결국 귀국해야 했고, 대원들은 셰르파들의 잦은 파업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남서벽 도전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는 셰르파들은 돈도 싫으니 그냥 내려가겠다고 시위를 벌였고, 몇 명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철수해버렸다. 결국 박 대장이 “길은 우리가 앞에서 뚫을 테니 셰르파들은 밑에서 짐만 올려주면 된다”며 몇 번을 달래야 했다.

 

본격 정상공격에 나선 7일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셰르파중 2명이 또 내려가, 원정대원 6명과 셰르파 4명만 남은 채 나머지 공격에 임했다. 남서벽 루트 개척에 성공했던 1975년의 영국 크리스 보닝턴대는 108명의 대원이, 82년 구소련대는 27명의 대원과 엄청난 물량공세가 성공의 밑거름이었다. 박영석 원정대 홈페이지에 남긴 원정대 일기는 “다른 원정대는 셰르파가 앞에서 길을 트고 짐까지 다 들어주는 반면, 우리는 대원이 직접 20~30kg의 짐을 지고 직벽에 로프를 치며 앞장서 나가야 한다”고 적고있다.

 

원정대가 이 모든 난관과 맞서면서도 험난한 남서벽을 올랐던 힘은 한국 산악인의 독기와 근성이었다. 대원들은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오르자”며 “ 남서벽 신루트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산을 떠날 때 가슴에 맺힌 모든 것을 다 털어버리자”고 서로를 격려했다. 그러나 대자연은 무심했다. 가늠할 수 없는 신의 의지 앞에서 대원들은 가슴에 동료를 묻을 수밖에 없었다.

 

 제주 출신의 오 부대장은 1999년 네팔 초오유 등반을 시작으로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0개를 올라 박영석, 엄홍길(48), 한왕용(41) 등이 기록한 14좌 완등을 눈 앞에 두고 있던 세계적인 산악인이다. 전남 영광군 출신의 이 대원은 2005년 낭가파르바트 루팔벽을 등반, 세계 산악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인물이다. 루팔벽은 에베레스트 남서벽과 함께 난코스로 이름 높은 곳으로 1970년 라인홀트 메스너가 오른 이후 35년 만에 이 대원이 처음 등정에 성공했다. 오 부대장과 이 대원은 박 대장과 2003년 북극점, 2004년 남극점 도달에도 함께 했다.

 

          * 故 오희준 부대장은

 

1970년 8월 16일 제주 서귀포 출생, 서귀포 토평초, 서귀포중, 서귀포고, 제주대 에너지공학과 졸업 골드윈코리아 소속이다.  고 오희준 부대장은 2006년 한 해에만 해발 8,000m급 봉우리 4개를 연거푸 오를 정도로 걸출한 산악인이었다. 평소 산악계에서 ‘항우장사’ ‘적토마’ 로 불리던 그는 1989년 제주대 산악부에 들어가면서 산과 첫 인연을 맺었다. 히말라야에 첫발을 딛은 것은 이후 10년이 지난 1999년 제주산악연맹 원정대와 함께 오른 초요유(8,201m)였다.

 

오 부대장이 신예 산악인으로서 주목을 받은 것은 ‘박영석 사단’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2000년이다. 이 해 7월 브로드피크(8,047m)를 시작으로 2001년 7월 K2(8,611m)까지 연속해 4개의 8,000m급 고봉에 오르면서 한국 산악계의 차세대 리더로 떠올랐다. 박영석 대장과 함께 남북 극점 원정에도 성공, 에베레스트를 포함한 ‘지구 3극점’ 도달 기록도 갖고 있다. 지난해까지 8,000m급 고봉 14좌 중 10좌 등정에 성공했다. 박영석 대장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산악 그랜드슬램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고봉(高峰)에 도전한 지 7년여 만에 이 같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둔 그의 집념을 보여주는 일화가 많다. 1991년 여름 울산암 등반 중 추락해 발목이 부러진 그는 이후 설악산 장군봉, 한라산 등지에서 같은 발목이 네 차례나 부러지는 사고를 거듭 당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계속 산으로 향한 당찬 산악인이었다. 평소 신조는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였다. 집념으로 가득찬 산악인의 풍모를 지녔지만 지인들을 위해 요리를 해주는 다정다감함도 잃지 않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타계는 분명 국내 산악계의 크나큰 손실이다.

 

             * 故 이현조 대원은
 
1972년 2월 4일 전라남도 영광군 광주 서광고, 전남대 불문과 골드윈코리아 소속이다. 고 이현조(35ㆍ골드윈코리아) 대원은 2005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낭가파르밧(8,125m) 루팔벽을 등정, 세상을 놀라게 한 한국 산악계의 신성이었다. 라인홀트 메스너가 초등한지 35년만의 쾌거 였다. 평소 그는 주변 산악인들로부터 ‘강철 같은 체력을 바탕으로 무슨 일이든 덤덤하게 받아넘기는 산꾼’이자 진한 동료애의 소유자라는 평을 받았다.

 

2001년 시샤팡마 남벽 등정 후 하산 길에 크레바스에 추락했으나 극적으로 빠져나온뒤 해발 7,850m 설벽에서 비바크를 하고도 체력이 떨어진 선배 대원을 구하기 위해 다시 100m를 거슬러 올라간 일화는 유명하다. 2005년 낭가파르밧에서는 두시간 남짓 비바크로 눈을 붙인 것 외에는 휴식 없이 48시간을 등반했는데도 베이스캠프에 내려와 이틀동안 해외 클라이머들과 파티를 벌이며 강철체력을 과시했다. 이 대원의 산악 인생은 전남대 산악부에서 시작했다.

 

주말이면 인근 무등산이나 월출산 바위에 매달려 지내고, 방학이면 설악산 지리산에서 살면서도 적십자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졸업 후 학사장교로 임관해 해병대 수색대 소대장을 맡으며 키운 리더십은 한국 산악계의 대들보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이 됐다. 많은 산악인들은 낭가파르밧 루팔벽 등정 축하연에서 “로체 남벽, 다울라기리 서벽, 마카루 서벽 등 거벽들이 곳곳에 솟아있는 히말라야가 있어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던 이 대원의 당찬 포부를 아직도 기억한다. 진지한 산사람이자 휴머니스트였던 고인의 죽음은 한동안 한국 산악계의 큰 슬픔이 될 것이다.

 

               -/ 한국일보 2007, 05, 17. 이성원 기자. 사진 조영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