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오은선 VS 고미영 [2] *-

paxlee 2007. 9. 4. 21:28

           

          8,000m급 14개봉 완등 레이스 시작! 오은선 VS 고미영

‘셰르파니’고미영
안정된 직장 버리고 클라이머의 길 선택

네팔 고산족 셰르파 여성처럼 강인하다고 하여 ‘셰르파니’라 불리기도 했던 고미영은 67년 전북 부안에서 2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나 고1때까지 살았다. 학교까지 꼬박 30~40분 걸어다녀야했던 이때 기본 체력이 갖춰진 것 같다고 한다. 인성여고 졸업 후 공무원 생활을 하던 89년 우연히 암벽에 입문, 코오롱등산학교 암벽반도 나왔다.


휴일에 자연암장만 찾는 정도로는 암벽 실력을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한 고미영은 실내암장을 찾아 오르기 시작, 스포츠클라이밍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68kg이나 나갔던 체중이 20kg이나 줄어들었다. 결국 97년 서른 살 때 고미영은 12년간 해온 공무원 생활을 접고 프로 클라이머로 변신했다. 92년 결혼했던 남자와의 관계가 소원해졌을 무렵이기도 하다. 프랑스 유수의 등산학교로 유학을 떠나 1년여 클라이밍 훈련 후 돌아왔다.


“물론 주위에서 왜 그 안정된 직업을 버리느냐고 모두 반대했죠. 하지만 젊을 때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었어요. 클라이밍으로 먹고 살 자신이 있었구요. 대개 사람들은 양다리 걸치기를 좋아하는데, 저는 클라이밍을 택하고 다른 것은 버리겠다고 마음 먹은 거죠.”


▲ 올 봄 에베레스트 북릉을 오르던 중 쉬고 있는 고미영.

이후 고미영이 스포츠클라이밍 분야에서 쌓은 경력은 화려하다. 95년부터 2003년까지 전국선수권대회 9연패, 1997년~2003년 아시아 선수권 6연패, 98년 월드 X게임 준우승, 99년 프랑스 베상송 월드컵 4위, 2000년 미국 유타주 5.13d/14a(캅킬러) 여성 초등, 2002년 아이스클라이밍 세계선수권 4위 등 발군의 기량을 보여왔다.


그러면서 장담한 대로 먹고 살 만큼은 클라이밍을 통해 벌었다. 98년 고미영이 외국 대회에서 받은 상금만 총 2만달러가 넘었다. 당시 한화로 2,500만 원 정도 되는 그 돈으로 고미영은 직장 다닐 때처럼 쓸 데 다 쓰며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


국제 대회에서 만나 친하게 된 외국 클라이머들은 고미영을 두고 ‘멘틀 스트롱(Mental Strong)’이라 부른다. 언제나 여유롭고 시합 때도 남달리 차분했기 때문이다. 늘 단전호흡과 요가를 해왔으며, <정신력 강화훈련>이란 책을 닳도록 읽기도 한 고미영은 이렇게 말한다.



외국 클라이머들 “멘틀 스트롱”이라 불러


▲ 2004년 아시아등반경기선수권대회에서 경기중인 고미영.

“언제나 눈앞의 목표에 최선을 다했어요. 대회 때도 상대방을 이겨야지 하는 생각보다는 이 루트를 어떻게든 단시간에 완등해야지 하는 쪽으로 마음을 집중시켰어요. 그렇게 국내 대회에 1등 한 다음엔 아시아대회 1등이란 목표로 다가갔을 뿐이고, 그 과정이 즐거웠어요.”


1등에 대한 집착 아닌 ‘좀더 빠른 완등에 대한 집중’을 선택했으므로 고미영은 대회 전날에도 늘 잠을 잘 잤다고 한다. 다만 3년 전 집착으로 1주일이나 밤잠을 설친 적이 있다. 자신의 팬이던 6살 연하의 한의사와 혼담이 오고갈 때다. 시부모 될 분들을 만나기로 날을 잡은 이후부터 ‘어떻게 그 날 잘 보일 수 있을까’하는 궁리에 잠이 오지 않았다. 나중에 자신이 집착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양가 대면을 마치고 고미영은 한 달 간 스페인 암장 순례길에 올랐다. ‘너무도 재미있고 너무도 자유스러운 나날’에 자신이 결혼 약속을 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문득 꼭 결혼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브로드피크를 등반중인 고미영.

“이런 마음을 갖고 결혼한다는 것은 남자에게도 못할 짓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없던 일로 하자는 이메일을 보냈죠. 미안했지만, 정말 잘한 일인 것 같아요. 지금 홀가분하고 좋아요.”


고미영은 클라이밍이란 역동적 움직임으로 비롯된 강렬한 파장을 순화시키기 위해 차분한 독서, 십자수, 한지공예에도 집중하곤 한다. 그래야 클라이밍이 더 잘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남자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다가 다들 떨어진 새벽녘 곧바로 암장으로 훈련하러 간 적이 있을 만큼 대단한 술 실력은 그러나 매일 됫병으로 하나씩 드시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특이체질인 것 같다며 고미영은 웃는다.


잘 웃는 것도 고미영의 특징 중 하나다. 될 수 있는 대로 뭐든 재미있다며 해야 더 잘 되고, 뭐든 맛있다고 하면서 먹어야 더 맛있다는 것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절대 지겹다는 말을 내보내지 않는다. 그럼 정말 지겨워진다”고 고미영은 말한다.


멘틀 스트롱일 뿐 아니라 고미영은 육체적 파워도 엄청나다. 98년 미국 엑스게임에 아시아에선 유일하게 초청선수로 나가 준우승을 하고 나서 선수들끼리 여러 가지로 내기를 했을 때다. 턱걸이 시합에 나선 고미영이 끊임없이 하자 다들 “네가 일등이니 이제 그만하고 내려오라”고 했다. 96번을 했을 때였고, 고미영은 “앞으로 2시간은 더할 수 있다”며 외국 친구를 기죽였다.


초오유 등반 때는 워낙 잘 먹고 잘 걷자 주위에서 그를 셰르파니(여자 셰르파란 뜻)라 불렀다. 고미영이 시내에서 신고 다니는 작고 가벼워뵈는 스니커즈형 신발은 그러나 무게가 1.7kg이나 되는 특수 신발이다. 물론 다리힘을 평소에도 키우기 위해서다. 스포츠클라이밍에 한창 열중할 때는 남들이 근무하는 시간만큼인 하루 8시간씩 꼭 운동했던 고미영이기도 하다. 

코오롱그룹 전폭적 지원 약속

초오유에서 만나 같이 오르기도 했던, 2004년 자누 북벽을 등반해 황금피켈상을 받은 러시아 등반가인 알렉스는 고미영에게 강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거듭하며, 베이스에서도 캠프에서도 정성을 다해 대접했다. 그는 한 걸음도 뒤처지지 않고 자신을 따라왔던, 강인하고도 내면은 호수같이 차분한 이 동양의 여성에게 강한 매력을 느꼈던 게 분명하다.

스포츠클라이머 고미영이 고산등반가로 변신한 계기는 코오롱등산학교 강사팀 일원으로 동참한 2005년 파키스탄 드리피카(6,447m) 원정이다. 고미영은 김형주 강사와 더불어 말 그대로 바짝 선 이 고난도 봉을 오른 뒤 강사들로부터 “진작에 시작했다면 벌써 8,000m급 몇 개를 했을 것”이란 말을 들었다.


“마침 스포츠클라이밍을 계속 하기엔 너무 많은 나이가 되기도 했고, 이제 폭이 좁은 무대를 떠나서 광대한 무대로 나가보고 싶었어요. 그러던 참에 드리피카 경험을 했는데, 좋았어요. 마음이 넓어지는 것 같았고, 미약한 두통만 잠깐 느낀 정도로 고소순응도 잘 되었고-. 그래서 하산길에 선배 강사분들한테 이렇게 부탁했지요. 저를 이제는 알피니스트라고 불러주세요 라고 말이죠.”


▲ 요르단의 고난도 암벽루트를 오르고 있는 고미영.

스포츠클라이밍으로 다져진 고미영의 몸은 고산등반에서도 대단한 파워로 작용할 것이다. 이미 드리피카에서 증명된 바 있다. 등정 직전 고미영은 60m를 추락, 척추가 두 마디나 어긋나는 중상을 입었다. 귀국 후 엑스레이를 본 의사가 놀라서 “이 정도면 통증 때문에 꼼짝도 못할 텐데 어떻게 걸어왔느냐”고 묻기에 “아픈 줄은 모르겠다”고 하자 “그럼 그냥 복대만 하고 두고 보자” 했다. 수술해야 한다던 척추의 마디는 6주 후 말짱하게 원상회복되었다. 고미영의 몸 구석구석은 그렇듯 어긋난 척추를 스스로 되돌려놓을 수 있을 만큼 강인하다. 드리피카 정상부에서 통증으로 움직이지 못했다면 그대로 불귀의 몸이 되었을 것이다.


고산등반가로의 변신을 선언한 고미영을 코오롱은 전폭 후원키로 했고, 고미영은 2006년 3월 코오롱이 장비와 등반비를 지원하는 대전팀과 에베레스트 등반길에 올랐다. 그러나 작은 경험 미숙이 등정을 막았다. 암벽화를 딱 맞게 신는 오랜 습관 탓일까. 등반화를 딱 맞는 것을 신고 전진캠프까지 가서 닷새쯤 머물다가 베이스캠프로 하산하는 중 손발이 부어 신발이 꽉 끼는 상태가 되며 동상이 왔다. 베이스캠프에서 열흘간 머물며 통증을 견디다 못해 고미영은 결국 먼저 귀국하고 말았다.


“오기가 생겼죠. 다시 심신을 다졌어요. 혼자서 무겁게 지고 지리산 종주도 하고 일주일에 서너 번씩 청계산을 뛰어오르기도 하면서요. 그러다 이듬해인 2006년 가을 가장 쉽다는 초오유로 갔어요. 혼자서요. 제가 원래 혼자 다니길 좋아해요. 어떤 사람들과 만나게 될까 하는 기대감이 좋아서 외국 클라이밍 갈 때도 혼자 잘 다녔어요.”


셰르파 1명, 쿡 1명만 동행하고 나선 고미영의 초오유 등반은 여유롭고 순조로웠다. 9월28일 ‘소풍 가는 유치원생처럼 설렘을 안고’ 등정길에 나선 고미영은 10월1일 정상에 섰다. ‘정상만이 목표가 아니고, 이런 멋진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차고 행복했던’ 고미영의 초오유 등정 사진은 싱글벙글 웃는 모습이라 어디 만년설로 놀러 나온 사람 같다. 등반 내내 입맛도 좋았고, 하산 때는 답답해서 산소마스크를 벗었지만 고소증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 브로드피크 정상에서 김재수대장과 코오롱 깃발을 들고 선 고미영.

올해 5월의 에베레스트 원정은 세계 최고봉과 K2만 최고로 치는 일반의 인식을 고려해서 일부러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 마침 김해 플라잉점프팀 구성 소식을 들었고, 잘 아는 송귀화 선배도 같이 간다기에 김재수 대장에게 전화해서 동참 허락을 받았다. 공항에서 난생 처음 만나 인사한 낯선 경상도 사나이들과 함께 한 초모랑마(에베레스트 북릉) 등반은 ‘원정을 이렇게 해도 되나 싶게 편했다’고 한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보다는 브로드피크가 한층 더 어려웠다고 고미영은 말한다. “김재수 대장과 더불어 속공으로 공략, 12일만에 등정을 이루긴 했지만 특히 하산 때 다리가 몹시 아파 몇 번이나 주저앉았다”면서 “그간 일부러 몸을 불렸는데 속공등반에 딱 맞는 수준으로 몇 킬로 더 빼야겠다”고 말한다.


김재수 대장은 “앞으로 한두 개 더 하면 고미영은 몸과 근육, 스타일 등이 고산 체질로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고미영은 올 9월 예정인 시샤팡마도 셰르파 2명만 고용, 캠프를 2개만 설치한 뒤 정상까지 고도차 2,000m에 달하는 구간을 속공으로 돌파할 것이라고 밝힌다. 이렇듯 고소형으로 몸 만들기가 마무리된 이후 고미영이 얼마나 폭발적 힘을 보일지 궁금하다.


 글 /안중국 차장 / 월간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