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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수성구 수성4가는 대구은행 본점을 비롯해 제법 커다란 빌딩들이 들어선 거리다. 그 화려한 거리 뒤편에 위치한 3층 건물 지하에 사뭇 기하학적인 구조물에 칙칙한 분위기, 땀 냄새도 느껴졌다. 박본현(朴本鉉·45)-이정옥(李貞玉·36) 부부는 이곳 대구파워클라이밍센터 실내인공암장에서 8년째 꿈을 가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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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파워클라이밍센터는 36평의 좁은 실내인공암장에 불과하지만, 그곳에서 뛰어난 클라이머들이 여럿 배출됐다. 국내 최고수로서 국제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 손상원(코오롱스포츠)과 손창현(노스페이스), 2005년과 2006년 국내 빙벽대회를 석권하다시피 한 신윤선(노스페이스)과 같은 탁월한 클라이머들이 이 암장 출신들이다. 게다가 현재 박씨 부부를 포함해 심판이 6명이나 되고, 루트세터도 4명이나 된다. 대구·경북의 스포츠클라이밍을 대표하는 실내암장으로 자리잡아가고, 부부의 꿈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어린 시절의 꿈과 건강 위해 등산에 입문 -
박본현-이정옥씨 부부는 당연히 클라이머다. 산을 시작한 배경은 다르다. 중학교 시절 박본현씨는 TV에서 혼을 쏙 빼앗길 만큼 짜릿한 장면을 봤다. 외국 클라이머가 거대한 수직벽을 홀로 오르는 모습이었다. 이후 그에게 클라이머는 가슴 깊이 간직해온 꿈이 됐다.
그 클라이머의 모습은 고교시절뿐 아니라 군복무를 마치고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경북 군위 태생인 그가 90년 서울의 모 전자회사에 근무할 때였다. 휴일에 다른 직원들처럼 술 마시는 것도 마음에 와 닿지 않고, 할 일 없이 지내는 게 너무나 무료했다. 혹시 하는 마음에 북한산을 찾았다. 예상했던 대로 인수봉을 오르는 클라이머들이 눈에 띄었다. 즉시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꿈을 실현하기로 마음먹었다.
1,000명에 이르는 직원 가운데는 의외로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직장산악회 회원도 150여 명에 이르렀다. 그중 바위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찾아냈다. 그리곤 10여 명이서 ‘노둣돌’이란 암벽등반클럽을 만들어 북한산 일원의 바위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바쁜 일과는 그를 산에 몰두하게 놓아두지 않았고, 결국 1년쯤 다니다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 개척등반의 열정을 쏟아부은 연경 도약대
“노적봉에서였습니다. 선배 누나가 김동칠씨가 가르쳐준 대로 펜듈럼을 하다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 모습을 보곤 왜 저러나 싶어 웃고 말았죠. 그런데, 저 역시 똑같은 상황을 겪고 말았답니다. 수십길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해지면서 정말 겁이 났습니다. 얼마 뒤에는 슬랩에서 하강하다 카라비나에서 자일이 빠져나가는 황당한 상황을 겪었답니다. 그것도 두 차례나 말이죠.”
그는 적당히 해서는 안 되는 게 암벽등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에 띄는 등반기술 서적은 몽땅 구입했다. 그리곤 등반기술과 장비 다루는 법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다. 훈련을 제대로 하고 자연암장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실내암장도 찾았다. 그가 문을 두드린 노량진클라이밍스포츠센터는 당시 내로라하는 클라이머들이 많이 훈련하는 곳이었다. 때문에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힌 클라이머들을 통해 그의 등반 열의도 더욱 달궈지고, 기량도 급속도로 향상됐다.
암장에서 인연 맺은 김동현씨(국제루트세터)의 권유로 코오롱등산학교 암벽반에 들어가 기초를 또다시 다지고, 그 해 겨울에는 동계반도 마쳤다. 거의 산에 사로잡혀 지내던 시절이었다. 설악의 바위를 마음껏 오르고픈 마음에 설악산구조대에 들어가야겠다는 마음도 먹었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고민이 생겼다. 직장생활의 한계를 느낀 그는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그게 목수였다. 생활터전도 고향 가까이 대구로 옮겼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당시 유일한 인공암장인 대구클라이밍센터를 찾았다.
박본현씨는 서울과 달리 대구 일원에는 자연암장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휴일에는 차례를 기다려야 할 적이 많았다. 해결방법을 찾았다. 그게 새로운 암장 개척이었다. 우선 연경 도약대부터 찾았다.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극등회를 비롯한 여러 팀들이 개척한 루트가 있었지만, 개척 여지가 많은 암장이었다.
이곳에서 박본현씨는 권종국씨와 함께 97년 봄부터 그 해 추석 전날까지 반 년 넘게 심혈을 기울여 40여 개를 추가했다. 박씨는 난이도가 너무 높아 찾는 이가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 초보자들도 시도할 수 있는 쉬운 루트를 개척하는 데도 주력했다.
상주에서 태어나 4살 때부터 대구에서 생활한 이정옥씨는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했다. 때문에 건강을 위해 고교를 졸업한 90년부터 산을 찾았다. 어느 날 금정산을 찾았을 때였다. 금정산은 부산 클라이머들에게 메카나 다름없는 산이지만, 그런 지식이 전혀 없던 터였다.
그런 이정옥씨는 대륙암에 다가서는 순간 황홀한 광경을 목격했다. 여성 클라이머가 멋진 자세로 바위를 오르는 모습이었다. 그 날 은 그것으로 끝났지만, 몇 해 뒤 팔공산 바윗골에서 클라이머들이 바위를 타는 모습을 보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 역시 등산전문지를 뒤졌다. 그리곤 책에 소개된 실내인공암장인 대구클라이밍센터를 찾았다.
당시만 해도 스포츠클라이밍 인구는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운동하고 있으면 누군가 다가와 가르쳐주려니 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이 지나도 누구 한 명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대부분 ‘저러다 제 풀에 지쳐 그만두겠지’ 하는 표정이었다. 오기가 발동했다. 어떻게 오르는 게 제대로 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그렇게 석 달쯤 지날 무렵 한 명 한 명 다가왔다. 그녀의 끈기를 높이 샀던 것이다. 하나 하나 배울 때마다 신이 났다. 기량도 부쩍 부쩍 향상됐다. 그런데 한창 재미가 붙기 시작할 즈음 어이없게도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루프를 돌파하다 추락하고 말았죠. 등으로 떨어졌으면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발이 먼저 떨어지면서 발목이 부러지고 말았답니다. 한동안 목발 신세를 져야 했죠. 정말 답답했답니다. 눈만 감으면 암장이 떠오르고 홀드가 손에 잡히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래서 깁스를 풀자마자 암장으로 달려갔어요.”
그녀는 체격은 작지만 뛰어난 힘과 꾸준한 노력 덕분에 한 해 훈련으로 97년과 98년 대구산악연맹 회장배 암벽등반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 사이 틈틈이 암장 식구들과 자연암벽도 찾았다. 그녀의 자일파트너는 ‘바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멤버 중 한 명이 이정옥씨였고, 또 한 명이 박본현씨였다.
부부 모두 부상 이겨내며 등반활동 -
박본현씨는 도약대에서 길만 낸 게 아니라 사랑도 얻었다. 이정옥씨와 사랑이 싹튼 것은 개척등반을 하는 사이 잦은 만남 덕분이었다. 등반에 대한 열정을 서로 이해할 기회가 주어졌고, 그렇다면 백년해로도 가능하다고 두 사람은 생각했다. 98년 1월 결혼식을 올린 그들은 결혼기념으로 삼을 만한 계획을 짰다.
“96, 97년은 개척등반에 몰입해 지내는 등 바위에 한창 빠져 지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체계적으로 훈련할 마땅히 장소가 없었습니다. 결혼한 지 다섯 달쯤 지날 무렵 결심했죠. 우리 암장을 만들자고 말이죠. 좋아하는 선후배들이 함께 모여 훈련도 하고 꿈에 대한 얘기를 나눌 장소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당시 두 사람 모두 직장생활을 할 때였다. 때문에 암장을 꾸리려면 동료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벽에 구조물을 설치한 다음 합판을 덧대고, 칠을 하고, 거기다 홀드를 하나 하나 붙이기까지 암장을 만드는 데에는 ‘바위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멤버인 권종국씨와 황성기씨의 도움이 컸다. 이렇게 낮에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야했지만, 해가 떨어진 뒤에는 두 사람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때문에 퇴근하자마자 암장으로 달려가 새벽 한두 시까지 작업을 해야했다.
1998년 6월13일 암장 문을 열던 날은 너무도 기뻤다. 자신들과 후배들이 함께 어울려 등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무엇보다 기뻤다. 이튿날에는 유학산 둥지바위 보고회를 갖는 등 꿈에 부푼 날들이었다. 하지만, 한 달 한 달 지나면서 갈등이 점점 심해졌다. 암장만 마련하면 그런 대로 굴러갈 줄 알았건만 매달 백만 원 이상 집세와 운영비로 들어갔다.
“너무 서둘렀다 싶었죠. 이후 한 3년 동안 정말 남들 몰래 운 날이 많았습니다. 남편은 목수여서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 많았고, 저는 직장에서 하루종일 모니터를 쳐다보며 지내다보니 목이 좋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목 디스크가 생겼던 거죠. 한데 그렇게 어렵게 일을 해서 받는 봉급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들어가니 정말 갑갑했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박본현씨는 개척등반에 대한 꿈을 계속 이어나갔다. 암장을 오픈한 이후에는 다부동 유학산 개척등반에 주력했다. 역시 아내와 권종국, 황성기, 손상원으로 이루어진 ‘바위를 사랑하는 사람들’ 멤버들과 함께였다. 최근까지 개척한 루트는 학바위에 48개, 둥지바위에 28개 등 총 76개에 이른다. 또한 2002년 이후 의성 금성산 무지개바위에 28개 루트를 개척하고, ‘석기시대’라 이름 지은 바위는 지금도 개척 중이다.
“돈도 많이 들어갔습니다. 선후배들이 주머니 털어 마련한 돈이죠. 바위 밑에 올려놓은 발전기를 도난당하는 황당한 일도 겪었답니다. 다양한 난이도의 루트를 내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등반을 즐길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산꾼들의 갈증을 해소함과 동시에 놀이터를 넓힌다는 게 보람이라면 보람입니다.”
박본현씨는 새롭게 등반에 입문한 사람들을 위해 99년부터 파워클라이밍학교를 운영하면서 2000년 이후 매년 한 차례씩 등반대회도 열고 있다. 첫 대회는 당시 열린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지 못한 클라이머들의 사기를 올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마련한 축제 성격의 작은 행사였다. 그런데 뜻밖에 국내 최고 클라이머들이 거의 다 출전, 지금은 산악인들 사이에서 전국 대회로 인정받고 있다.
“7회째를 맞는 파워게임은 선수와 관중이 혼연일체가 되는 축제 같은 행사입니다. 올해는 실내 대회에서 벗어나 실외에서 대회를 열고 싶어요.”
그는 실내암장 훈련이 큰 등반을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또한 등반이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주관 때문에 그는 암벽등반에 입문하자마자 겨울철이면 빙벽도 열심히 찾고 있고, 그의 성향 덕분에 암장 식구 가운데 절반 이상이 겨울이면 빙벽등반을 즐긴다.
박본현씨는 2002년 한옥 바닥 공사 중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연골 제거수술을 받은 뒤 한동안 등반을 못했다. 몇 년 동안 재활운동을 하면서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지금도 무리한 등반은 피하고 있다. 대신 파워클라이밍학교 암벽반과 빙벽반 교육에 열중하고, 각종 암빙벽등반대회에서 심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심판이건 루트세터건 간혹 경기에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루트 감각을 유지하고, 선수들의 심리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튼 이틀간 치르는 대회 하나를 세팅하려면 사나흘이 걸립니다. 선수들은 오전 9시부터 경기를 펼쳐 오후 서너 시면 끝나지만, 루트세터들은 새벽부터 벽에 매달려 홀드를 붙이고, 또 경기가 끝난 다음에는 다음날 대회를 준비하느라 밤늦도록 벽에 매달려 있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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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도 쉬운 일은 아니죠. 하루 종일 선수들 경기를 지켜보다 보면 목 디스크가 생기는 게 아닌가 걱정될 만큼 목이 뻣뻣해지기도 하고, 빙벽대회 때는 하루 종일 얼음에 매달려 덜덜 떨 적이 많답니다. 대가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연맹 같은 곳에서 일을 봐달라 하면 거절하기가 쉽지 않답니다. 무엇보다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루트세터도 그렇고 심판도 역시 산악인들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하는 것이니까요.”
아내 이정옥씨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건강 운이 좋은 편은 아니다. 96년 7월에는 등반에 막 열정이 오르려고 하는데 발목 골절상을 당했고, 2001년 1월에는 설악산 100m폭에서 빙벽등반 중 낙빙에 맞아 어깨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했다. 같은 해에는 재발한 목 디스크로 3주간 드러누워 꼼짝 못하고 지내야 했고, 결국 그로 인해 10년 가까이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었다. 그렇지만 등반을 못하는 틈을 이용해 심판 2급 자격을 따내는 등 등반열정을 계속 가꿔 나가고 있다.
지금도 수시로 물리치료를 받고 있는 그녀는 특히 겨울철에는 근육에 무리가 많이 가는 스포츠클라이밍은 삼가고 있다. 대신 빙벽에 몰두, 2004년에는 청송빙벽대회에서 2위, 2005년에는 선수권대회에서 3위에 올랐다. 그 덕분에 노스페이스클라이밍팀에 발탁되기도 했다.
박본현씨가 개척등반과 고전등반을 추구하는 편이라면, 아내 이정옥씨는 고난도 하드프리를 즐긴다. 이런 성향 때문에 뜻밖에 같이 줄을 묶은 적은 거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등반 성향보다는 같이 줄을 묶고 등반하다 보면 서로 마음을 졸이느라 등반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후배들의 앞날에 보탬되는 선배 되고파 -
암장에서 얘기를 나누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5분쯤 떨어진 식당 OK목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4년 봄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섰다 하산길에 탈진사한 후배 박무택씨를 구하기 위해 올랐다 실종된 백준호씨가 운영하던 식당이었다.
“참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운동도 참 열심히 했죠. 로체 등반 중 입은 동상으로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내고도 상처가 아물자마자 암장을 찾아왔을 정도니까요.”
박본현씨는 스포츠클라이머뿐 아니라 정통파 산악인들과도 교분이 많다. 그 역시 알파인 등반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2월 중순 좋아하던 술을 끊었다. 후배 신윤선씨와의 약속 때문이다. 오는 11월 열릴 대산련 선수권대회에서 신윤선씨가 좋은 성적을 올리게 하기 위해 박씨가 함께 술을 끊은 것이다.
“약속을 어길 때마다 어긴 사람이 자일 한 동씩 사주기로 했습니다. 후배들이 멋지게 꽃을 피우고, 좋은 열매를 맺게 하려면 저도 참을 때 참아야겠죠.”
파워클라이밍센터에는 초중등 학생도 많이 온다. 하지만 이정옥씨는 혹독한 훈련이 성장과 학업에 방해가 될까 싶어 너무 깊이 빠지지 않게 하거나 아니면 아예 더 큰 다음에 오라며 돌려보낸다고 한다. 이씨는 “아이들에게 클라이밍의 미래가 밝다는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부부에게는 꿈이 많다. 박본현씨는 언젠가는 거벽에 도전해 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고, 이정옥씨는 5.14급이 꿈이다. 또한 대구파워클라이밍센터가 지금의 하나에 머물지 않고 두세 곳 더 생겨 대구경북 산악계에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바람은 후배들이 잘 되는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꿈꿔왔던 클라이밍인데 제 꿈이 왜 없겠습니까. 워킹할 때 히말라야 트레킹이 꿈이었듯이 등반에 몰입한 이후에는 큰 산도 가고 싶고, 거대한 벽에도 붙어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후배들의 앞날을 위해 보탬이 되는 선배가 되었으면 합니다. 파워클라이밍센터를 만들 때 생각이 그랬듯이 저희 부부는 후배들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좋은 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게 바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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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본 /대구파워클라이밍센터 대표
글= 한필석 기자 / 월간 산 [438호] 2006.04
- [이 클라이머의 삶] 박본현 이정옥 부부
- "좋은 열매 맺으려면 좋은 거름 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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