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 [3] (1980~1982년) *-

paxlee 2007. 9. 10. 22:23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 [3] 1980~1982년 

 

비정의 마나슬루, 드디어 등정되다.


동국산악회 마나슬루원정대

 

80년대의 첫 히말라야 진출이라고 할 수 있는 동국산악회의 원정은 그 대상이 한국산악인들에게는 비운의 산으로 기억되는 마나슬루(8,163m)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71년부터 76년까지 3차례에 걸쳐 6명의 국내산악인을 앗아가고도 끝내 정상을 허락하지 않은 산, 그 험난한 마나슬루에 일개 대학 단일팀이 도전장을 낸 것에 대해서 우려의 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동국대는 76년의 토왕성빙폭 하단부 초등정과 희양산 암벽에서의 개척등반 등에서 얻은 기술과 조직력으로 마나슬루원정대를 꾸렸다. 대원은 이인정(35)대장을 비롯해서 이영진(33), 김광진(30), 유태원(28), 양명수(27), 서동환(27), 이종량대원(25) 등 7명이었다.
 
원정대가 12명의 셀파와 123명의 포터를 고용하여 13일의 카라반끝에 3,780미터의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것은 3월 19일이었다. 이틀 뒤에 등반을 개시하여 3월24일에 1캠프(4,880m), 4월 1일에 2캠프(5,500m), 10일에 3캠프(6,350m), 20일에 4캠프(6,900m), 그리고 22일에는 이종량대원과 3명의 셀파가 7,500미터 지점에 설동을 파서 5캠프로 삼았다.

 

이어서 4월 23일에는 이대원과 파상노르부, 락파텐징 셀파 등 3명이 정상공격을 시도하려 했으나 때마침 불어닥친 강풍과 혹한 때문에 공격을 단념하고 일단 후퇴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원정대는 4월 27일 서동환대원과 아지와 셀파를 2차 공격조로 지명, 마지막 캠프를 출발시켰다. 새벽 6시 30분에 정상을 향해 출발한 세 사람은 그러나 이번에도 마나슬루 특유의 강풍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섰다.

 

마나슬루 특유의 강풍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섰다.


다음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3차 정상공격이 시작되었다. 서대원과 아지와, 앙파쌍 셀파 등 3명은 아침 7시 20분에 캠프를 떠났다. 이날은 요행히도 날씨가 쾌청했다. 서대원은 피나클을 지나 산소통을 교체하고 등반을 계속했다. 조금 더 가자 오른쪽으로 전위봉이 보였다. 고도계가 8,100미터를 가리키는 곳에 이르니 정상 암봉이 보였다. 오후 1시 30분에는 정상 암봉 아래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기다시피 암벽을 오르니 티베트쪽에서 맞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정상이었다. 바람 때문에 도저히 몸을 지탱할 수가 없어 하켄을 박고 사진을 찍었다. 이들은 갑자기 악화된 날씨 속에서 8시간이나 걸려 마지막 캠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서동환대원은 이때 발가락에 동상을 입어 귀국 후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로써 한국인에게 16명의 생명을 앗아간 비정의 산 마나슬루는 4번째 원정에서 마침내 정상의 문을 열어주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인이 오른 두 번째 8천미터급 등정기록이며 국내 최초로 단일 산악회팀이 이룩한 개가였다.

 

역부족으로 패퇴한 닐기리 북봉 원정


한국 히말라야 닐기리 북봉원정대

 

1980년 프레몬순의 마나슬루 원정이 성공리에 끝나고 포스트몬순기에는 닐기리 북봉(7,061m)원정이 있었다. 대장을 맡은 오인환(34·동국산악회, 양정산악회)은 69년에 김정섭씨와 함께 추렌히말 정찰을 다녀왔고 75년에는 한국산악회에서 파견한 안나푸르나 1봉 정찰대에 참가한 적이 있는 산악인이었다. 그는 80년 봄에 김도섭(29·에코클럽), 이종수(26·성북산악회), 조정술(34·부산 경남공고 OB)과 함께 닐기리 북봉을 정찰하고 귀국해서 곧바로 원정대를 꾸려 9월에 출국했다. 대원은 정찰에 참가했던 김도섭과 새로 합류한 이영태(24·YMCA등산클럽)대원을 합쳐 단지 3명뿐이었다.


닐기리 북봉은 안나푸르나 산군에 속한 산으로 안나푸르나 1봉에서 불과 11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이 산은 북봉, 중앙봉(6,940m), 남봉(6,839m), 남동봉(6,765m)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북봉이 이 산의 주봉인 셈이다. 산명 닐기리(Nilgiri)는 산스크리트어로 ‘니르’는 푸르다라는 뜻이고 ‘기리’는 산이라는 뜻이어서 ‘푸른 산’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닐기리 북봉은 1962년 10월에 네덜란드의 테레이 3형제가 북면쪽에서 북벽을 이용해 초등정한 후 79년 가을에 일본대가 남쪽으로 등정을 시도했으나 5,700미터에서 돌아서고 말았다.

 

그 이듬해인 80년 가을 한국대는 이 봉의 남쪽으로 루트 초등을 노리고 닐기리빙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불과 3명의 대원과 2명의 셀파만으로 이 봉의 남쪽 대암벽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9월 27일 4,300미터의 베이스캠프에서 등반을 개시한 원정대는 2캠프(5,500m)까지 진출한 후 6,200미터까지 올라갔으나 그곳에 있는 대암벽을 돌파하지 못하고 폭설과 인원 부족으로 10월 10일 철수했다. 등반개시 불과 13일 만의 패퇴였다.

 
최초의 카라코람 진출과 안나푸르나 남봉 등정

 

81년에는 한햇동안 모두 37개 팀이 해외로 진출했는데 이것은 26개 팀을 기록했던 80년도의 원정대 수보다도 11개나 증가한 것이다. 81년의 해외원정대 중에는 일본의 북알프스 등지를 목표로 한 원정이 18개 팀으로 가장 많았다. 그 다음이 히말라야를 목표로 한 팀이 전부 9개 팀이었다. 그중에서 악우회의 바인타브락과 성균관대의 안나푸르나 남봉을 제외하고는 7개 팀은 마나슬루(피톤클럽), 고줌바캉(대전자일클럽), 파빌(부산학생산악연맹), 눕체(한국음반산악회), 람중히말(선경여자산악회), 안나푸르나2봉(영남대산악회), 에베레스트(양정산악회)로의 정찰을 목표로 한 팀이었다.


바인타브락에서 이정대대원 조난사

 

악우회 카라코룸 바인타브락원정대

 

80년대에 들어서 나타난 국내의 해외원정 광역화 현상은 히말라야 원정에도 영향을 주어 81년에 국내 최초로 카라코룸으로 진출하는 원정대가 나왔다. 79년부터 알프스 3대 북벽 등정을 성공시키는 등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오던 악우회가 이번에는 카라코룸의 처녀봉 바인타브락 2봉(6,960m)에 도전장을 낸 것이다. 한국대가 네팔 이외의 히말라야 지역으로 진출한 것은 이 팀이 처음이며 이것은 히말라야 원정을 시작한 지 20여 년 만의 변화였다.
 
카라코룸 지역에는 동쪽으로부터 시아첸, 발토로, 비아포, 히스파, 바투라 등 5개의 커다란 빙하가 흐르는데 그중에서 비아포빙하에 있는 바인타브락(Baintha Brakk)은 날카로운 암봉과 빙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사람 잡아먹는 귀신’이란 뜻의 ‘오거(Ogre)’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 주봉(7,285m)은 77년 7월에야 크리스 보닝턴이 이끄는 영국의 정예등반가들에 의해 초등정되었고 2봉(6,960m)만이 미등인 채로 남아 있었다.


바인타브락 2봉에 도전한 악우회팀은 심의섭대장(41) 지휘하에 알프스 3대 북벽에서 맹활약을 했던 윤대표(29), 허욱(29), 유한규(27), 임덕용(27)대원을 비롯해서 임종옥(40), 유근하(33), 이정대(30), 조상현(27)대원 등이 참가했고 한국방송공사에서 파견된 민상기(33), 김홍(30)기자가 추가되어 모두 11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자금 조달 문제로 출국이 늦어져 예정보다 1개월이 지연된 7월 1일 베이스캠프에서 등반을 개시했다. 늦은 일정으로 조급함을 느낀 원정대는 빠른 속도로 캠프를 전진시켜 7월6일 1캠프, 8일에는 2캠프, 그리고 14일에는 약 750미터의 고정로프를 설치한끝에 6,300미터의 커니스 위에 마지막 캠프를 설치 완료했다.


그리고 다음날 곧바로 이정대, 유한규대원이 중앙벽으로 정상공격을 감행했다. 새벽 4시 20분 3캠프를 나선 두 대원은 12시경에는 6,700미터 지점의 설원을 트레버스해 오후 1시 30분에는 정상 암부에 다달았다. 그러나 6,900미터의 마지막 정상벽에 도달했을 때 이정대대원이 심한 고소증세를 보였고 유대원도 지쳐 있었다. 그리고 거의 오버항에 가까운 중앙벽의 상단부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장비와 체력으로 도저히 돌파할 수 없게 보였다. 오후 4시, 두 대원은 정상을 불과 60여미터 남겨놓고 통한의 후퇴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들이 6,700미터 지점의 꿀르와르를 안자일렌한 채로 하산하던 중 이정대대원이 실족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런데 연결된 매듭이 풀려 있었고 그는 온데간데 없었다. 다음날 몇 명의 대원이 수색작업을 펴보았지만 그의 우모복만 발견하는데 그쳤다. 이 사고가 이정대대원이 유한규대원을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자일을 풀고 추락한 것으로 메스컴을 통해 국내에 알려지자 그의 살신성인의 행위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감동해 마지않았다.

 
 안나푸르나 남봉 등정과 그 보고서


성균관대산악회 안나푸르나 남봉원정대

 

바인타브락에서 비보가 전해진 직후 이해 가을에는 안나푸르나 남봉(7,219m)을 목표로 한 히말라야원정대가 네팔로 떠났다. 이 원정은 성균관대산악회에서 대학 단일팀으로서는 동국대에 이어 두 번째 성사시킨 것으로 5명의 대원만이 참가했다. 한상국대장(34)의 지휘아래 정해경부대장(29), 원종태(27), 김홍기(26), 김창선대원(21) 등 모두가 히말라야는 초행길이었다.

 

성대산악회가 이 원정을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된 것은 80년 6월경 네팔관광성으로부터 입산허가를 통보받고서부터였다. 이들은 원정 경비 일체를 자체적으로 충당하기로 하고 그때까지 통례로 되어 있던 사전정찰도 생략하고 곧바로 원정대를 조직했다. 안나푸르나 남봉은 안나푸르나 주봉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지능에 솟은 7천미터급 봉우리로 일명 모디체라고도 불린다.

 

안나푸르나 성역의 안쪽에서 시작되는 모디콜라의 근원지에 솟아 있는 이 봉우리는 남북으로 이어진 능선상에 북봉(7,010m), 중앙봉(7,070m), 히운출리(6,441m) 등 3개의 위성봉을 거느리고 있다. 남봉은 64년 일본의 교또(京都)대학팀에 의해 중앙봉과 함께 초등정되었고 그 후 프랑스(70년), 일본(72, 78년), 영국(76년), 폴란드(79년)대에 의해 6차례 등정되었다.


성대팀이 7명의 셀파와 92명의 포터를 거느리고 4,09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건설한 것은 9월 17일. 그로부터 22일 후인 10월 9일에는 3캠프(5,850m)까지 전진한 후 전대원이 베이스캠프로 하산하여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10월 24일 한상국대장과 원종태, 김창선대원, 앙핑조 셀파 등 4인은 6,650미터까지 전진해 5캠프를 설치하고 다음날 새벽 정상공격을 감행했다.


새벽 5시 20분 마지막 캠프를 출발한 네 사람은 중앙봉과 북봉 사이의 콜을 통해 오후 1시에 일단 중앙봉에 올라선 후, 나이프 리지를 따라 등반을 계속한 끝에 오후 3시 정상을 밟았다. 성대팀의 등정은 정찰등반을 생략하고 각종 자료만을 토대로 원정대를 운영한 좋은 선례를 남겼다. 또한 이들은 5명의 대원 중에서 3명이 한꺼번에 정상에 섬으로써 이전까지의 ‘한 팀에 한 명 등정’이란 한국대의 기록을 깨트렸다. 성대팀은 또한 귀국 후 344페이지에 달하는 원정보고서를 펴냈는데 그전의 어느 보고서보다 내용이 충실하여 이후의 원정대들에게 값진 자료로 활용되었다.


 한산원정대, 세계 5위의 마칼루 등정

한국산악회 마칼루 학술원정대

 

82년 프레몬순의 마칼루, 람중히말, 닐기리 중앙봉에 도전한 3개 팀 중 한국산악회가 사단법인 인가 후 첫 사업으로 추진한 마칼루 학술원정은 그 명칭에서 나타나듯이 국내 최초로 학술조사를 겸한 히말라야 원정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산악회가 문교부에 학술단체 법인으로 등록되어 해외 원정에 있어서도 학술목적에 한해서만 추천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취했던 고육책이었다.


마칼루(Makalu)는 네팔과 티베트의 국경을 이루는 중부히말라야에서도 쿰부 산군 동쪽에 위치해 에베레스트의 관문인 남체바잘에서 불과 38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세계 제5위의 고봉이다. 산의 이름은 힌두교 시바신의 화신(化神) ‘마하카라’에서 비롯된 것으로 산스크리트어로 이것은 ‘검은 신’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마칼루의 모습은 1921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정찰대가 북카르마 계곡으로 들어가 웅장한 자태를 촬영하여 처음 알려졌고, 본격적인 등반은 54년 봄 미국대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동남릉으로 등반을 시도하여 7200미터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55년 장 프랑코대장이 이끄는 프랑스대가 북서릉 초등정을 이루었다. 이들은 5월 15일, 16일, 17일 3회에 걸쳐 9명의 대원 전원이 등정해 세계산악계를 놀라게 했다.


82년 봄 한국원정대는 함탁영대장(44)의 지휘아래 신승모부대장(37), 허욱(29), 이찬영(28), 허정식(28), 허영호(28), 남선우(27), 민병국(27), 송병호(27), 신형기(26)대원 등 9명의 등반대원과 이기주(44·의료담당), 이근후(48·민속담당), 성익환(30·지질담당) 등의 학술조사팀, 그리고 민상기(34), 양진수(33), 이은원(26) 등 한국방송공사에서 파견한 보도대원 등 모두 16명으로 구성된 대부대였다.


원정대는 선박편으로 인도 캘커타로 보낸 원정물자의 통관이 늦어져 선, 후발대로 나뉘어 베이스캠프(4,740m)에 도착했다. 그리고 장장 10킬로미터에 달하는 마칼루의 동남릉을 46일간 공략끝에 5월 17일 7,400미터 지점에 5캠프를 설치했다. 그리고 5월 20일 6캠프(7,700m)를 떠난 허영호대원과 파쌍노르부, 앙푸르바셀파 등 3명이 동측 설벽을 통해서 정상을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허대원은 마지막 캠프에서부터 산소를 사용하면서 9시간 30분의 등반끝에 정상에 서는 영광을 얻었다. 한국산악회의 마칼루 등정은 77년 에베레스트, 80년 마나슬루 등정에 이어 한국의 세 번째 자이언트봉 등정기록이며 한국산악회가 78년 안나푸르나 4봉 등정에 이어 얻어낸 두 번째 히말라야 등정성과였다.

 
양정, 은벽과 합동으로 닐기리 중앙봉 등정

양정산악회 닐기리 중앙봉원정대

 

마칼루팀과 같은 시즌에 닐기리 중앙봉에 도전한 양정-은벽산악회합동대는 5명의 대원에 2명의 셀파를 합쳐 도합 7명이 한꺼번에 정상을 등정해 81년 가을 성대팀이 세운 4명의 기록을 갱신했다. 닐기리 중앙봉(6,940m) 원정은 이해 1월에 동계 에베레스트 정찰을 마친 양정산악회의 김기혁(28), 심상돈(28), 임병길(27)대원이 현지에서 입산허가를 받아 급조되었다.

 

정찰을 끝내고 자금 조달이 어려웠던 이들은 마침 안나푸르나 정찰차 네팔에 온 은벽산악회팀에게 합동원정을 제의했다. 그리하여 은벽산악회에서 안창열(32), 김현수(27), 김광(27), 김영자대원(여·29)이 합류하자 총대원은 7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고정로프와 연료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캠프 전진을 강행해 등반 개시 9일 만인 4월 22일에는 3캠프(6,150m)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4월 25일 새벽 4시 30분 김기혁대장과 심상돈, 임병길, 김현수, 최광희대원과 2명의 셀파 등 7명이 동시에 정상공격에 나섰다.

 

40미터 로프 1동으로 안자일렌을 한 일행은 오후 1시부터 불어닥친 눈보라를 뚫고 드디어 전원이 정상에 올라섰다. 그러나 이들은 하산 도중 김광대원이 실족해 발목 골절상을 입자 그를 후송하느라 자정 넘어서야 마지막 캠프로 돌아왔다. 다음날 원기를 찾은 대원들은 계속 하산했으나 심상돈대원은 최대원을 간호하기 위해 제3캠프에 남았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날시가 악화되어 그를 후송하지 못하고 10일간을 버틴 끝에 극적으로 생환했다.

 
국내 최초 여성대 람중히말 등정

선경여자산악회 람중히말원정대

 

한편, 같은 안나푸르나 산군에 있는 람중히말(6,986m)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여성 히말라야 원정대가 도전장을 냈다. 선경에 재직하고 있는 직장여성들로 구성된 선경여자산악회가 회사의 후원으로 꾸린 이 원정대는 76년에 마나슬루 원정을 다녀온 바 있는 김경배(36·피톤산악회)씨가 매니저로 참가했고 문화방송에서도 3명의 기자를 파견했다. 여성대원은 정길순대장(28)을 비롯해 기형희(26), 윤현옥(24), 이원행(23), 소유미대원(21) 등 5명으로 구성되었다.
 
람중히말은 안나푸르나 산군에서는 가장 동쪽에 있는 독립봉으로 74년 봄 영국대에 의해 남동릉으로 초등정되었고 그 뒤 80년까지 3개의 일본대가 동릉과 북릉루트로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대는 남동릉을 목표로 82년 4월 8일 해발 3,80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건설했는데 같은 시즌에 북릉으로 도전한 일본대도 있었다. 한국대는 20여일 만에 3캠프(6,300m)를 설치하고 기형희 부대장과 3명의 셀파를 정상공격조로 지명했다.

 

5월 5일 새벽 남동릉으로 등정길에 나선 이들은 그러나 능선상에 크레바스가 많아 운행시간이 지연되자 6,900미터 지점에서 설동을 파고 비박을 감행했다. 공격조는 다음날 비박지점을 출발하여 5시간 만에 정상에 올라서는 데 성공했다. 한편 2차 공격조로 이날 새벽 5시에 3캠프를 떠난 윤현옥대원과 셀파 1명이 2시간 늦게 정상에 도달하여 한국대는 2명의 여성대원과 4명의 셀파를 올린 셈이 되었다. 두 명의 대원은 국내 최초로 여성 히말라야 등정자가 되었다.

 
한국의 첫번째 초등정을 안겨준 고줌바캉

대전자일클럽 고줌바캉원정대

 

고줌바캉(Ngozumba Kang)은 쿰부히말라야 지역에서도 초오유(8,201m)의 오른쪽 능선상에 있는데 원래 B-782란 기호로만 표기되어 오다가 1933년에 가서 이 산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산은 초오유에서 갸충캉으로 이어지는 능선상에 있어 독립봉의 면모를 뚜렷하게 갖추고 있지는 못했다. 65년에 일본대가 이 봉우리를 초등정했다고 주장했지만 후에 그들이 등정한 곳이 고줌바캉 2봉(7,646m)으로 밝혀짐으로써 여전히 미등봉으로 남아 있었다.


산 이름은 티베트어로 ‘고(ngo)’는 머리, ‘줌(zum)’은 셋, ‘바(ba)’는 지붕, 그리고 ‘캉(kang)’은 설산이란 뜻으로 고줌바캉은 ‘세 정상을 가진 설산’이란 의미가 된다. 실제로 1봉과 2봉, 그리고 3봉 각각 2킬로미터씩 떨어져 있는데 3봉은 뚜렷한 피크가 아니었다. 82년 포스트몬순에 입산허가를 얻은 대전자일클럽은 윤원식(40)단장을 비롯해서 박동규대장(41), 김영한등반대장(37), 양화석(34), 윤건중(30), 서정두(29), 박찬복(28), 김태석(28), 이협우(27), 김영환(26), 임삼균대원(26) 등 11명으로 원정대를 꾸렸다.


10월 16일에는 선발대가 2캠프(6,450m)까지 진출했으나 카트만두에 있는 원정물자의 일부는 경비행기의 결항으로 아직 수송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대원들은 하나둘씩 베이스캠프에 집결했고 남면에서 북동릉을 등반해 10월 27일에는 3캠프(7,000m), 31일에는 4캠프(7,200m)를 설치했다.


그러나 등정에 필요한 기일이 없었다. 네팔관광성의 등산규정에 따르면 포스트몬순기의 등반허가 기간은 9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정대는 정부연락관에게 등반기일을 연장해 줄 것을 요청해 메일런너가 긴급히 카트만두의 관광성 본부로 파견되었다.


다급해진 원정대는 11월 2일 드디어 정상공격을 단행했다. 김영한등반대장과 도르지, 그리고 앙 체링셀파 등 3명은 깊은 눈을 헤치며 오후 1시에 초오유로 이어지는 능선상으로 올라섰다. 여기서 김영한대장은 거의 탈진 상태의 몸을 이끌고 5시간이나 오른 끝에 오후 6시 5분 드디어 히말라야 처녀봉의 정상 위에 섰다.

 

이때는 날이 이미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사진 촬영을 했으나 확실한 정상기록을 남기지는 못했다. 고줌바캉 초등정으로 한국은 비로소 세계초등정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그리고 등정자 김영한등반대장은 37세의 나이로 정상에 올라 국내에서는 당시까지 최고령 히말라야 등정자로 기록되었다.


 부산 최초 원정대 가네쉬 4봉 등정

부산학생산악연맹 파빌원정대

 

한편 82년 포스트몬순기에는 또다른 팀이 네팔로 향했는데 부산 지역에서 최초로 꾸려진 파빌봉(7,102m)원정대였다. 이 원정대는 부산학생산악연맹 회장이었던 김동인(56)단장이 거금 5천만 원을 쾌척함으로써 성사되었다. 대원은 주시정대장(29)을 비롯해서 김두억(31), 권경업(30), 이승렬(28), 이남국대원(26)과 부산일보에서 파견한 이종길기자(45)를 합쳐 7명으로 구성되었다.


 파빌(Pabil)봉은 네팔 중부의 가네쉬 산군에 있는 네 번째 봉우리로 카트만두에서 북북서쪽으로 불과 75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산이다. 이 산은 네팔정부가 중공과의 국경분쟁으로 입산을 금지시켰으나 78년에 해금되면서 일본대가 남면으로 초등정을 했고 80년에는 프랑스대가 2등을 했다. 그러니까 한국대는 이 산의 세 번째 등정을 노리고 있었다.


원정대가 카트만두를 떠나 12일 만에 베이스캠프(4,225m)에 도착한 것이 9월 20일. 이들도 고줌바캉팀과 마찬가지로 캘커타로 보낸 등반물자의 통관이 지연되어 예정보다 운행이 늦어지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등반을 개시한 원정대는 12일 만에 3캠프(6,370m)를 설치하고 10월 5일 정상공격에 나섰다.

 

공격조는 이승렬대원과 도르지, 아지와 셀파 등 3명. 이들은 이틀 전에도 정상공격을 시도했었으나 이대원의 고소장애로 후퇴했었다. 새벽 6시에 마지막 캠프를 떠난 일행은 8시간 30분이라는 긴 등반끝에 드디어 오후2시 24분 정상에 올랐다. 이것은 고줌바캉팀보다 앞선 것으로 지방팀으로는 최초의 히말라야 등정으로 기록되었다.

 
단지 두 명이 이룩한 국내 첫번째 동계등정

한국 푸모리 동계원정대

 

82년도에는 6개의 원정대가 제각기 새로운 기록들을 수립하며 100퍼센트의 성공율을 보였는데 국내 최초로 동계 히말라야원정대가 등장해 주목을 받았다.
히말라야에서의 동계등반은 80년 2월 17일 폴란드대가 에베레스트를 등정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러한 세계적인 흐름을 타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동계원정을 계획한 것은 이해 봄시즌 마칼루 원정에 참가했었던 남선우(27·중앙대, 양정산악회)였다. 그는 마칼루에서 돌아온 즉시 네팔관광성에 푸모리(7,145m)봉에 대한 입산신청을 해서 허가를 받아놓았다.


82년 10월 말 이 산의 남릉에 대한 동계초등을 목표로 떠난 한국대는 원정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등반대였다. 이 원정을 주도한 남선우대장과 이현수대원(27·은벽산악회)이 대원의 전부였다. 불과 500여 만원의 경비로 원정대를 꾸린 이들은 셀파도 단 2명에 불과 18명의 포터를 고용했다.


동계의 등반 개시일은 12월 1일로 되어 있으나 이들은 11월 23일부터 루트공작에 들어가 28일에 첫번째 캠프(5,950m)를 완료했다. 그리고 6일간의 작업끝에 청빙지대를 통과, 남릉의 암봉 위로 올라서 6,400미터에 있는 비좁은 안부에 2인용 텐트를 설치했다. 여기서 남대장은 세 번째 캠프를 생략하고 정상공격에 나설 것을 결심했다.

 

이곳에서 정상까지의 고도는 약 7백미터, 설릉으로 이루어진 이 구간을 두 명이 알파인스타일로 등반하면 시간상으로 가능하리란 판단에서였다. 12월 11일 새벽 6시, 남대장과 락파겔젠 셀파는 2캠프를 떠나 정상공격에 나섰다. 두 사람은 거센 겨울바람을 헤치며 가파른 정상 설릉에 붙었다. 그러나 설릉은 예상 외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많은 시간을 빼앗기며 정상에 다다른 시각은 오후 4시 12분. 엄청난 바람으로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이미 마지막 캠프로 돌아가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두 사람이 서둘러 서로 확보해 주며 하강했으나 6800미터 지점의 설릉에 이르렀을 때는 날이 아주 어두워져 비박을 감행했다. 82년의 마지막을 장식한 한국 최초의 히말라야 동계등정은 국내산악계에 또다른 영역의 원정 가능성을 제시하게 되었다.

  

                      - 출처 / www.himalayaz.co.kr / 월간 마운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