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 [1] (1962~1976년) *-

paxlee 2007. 9. 10. 18:41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 [1] 1962~1976년 

 

   * 30년 성장기 거친 한국의 근대등산운동

 

 한국에 있어서 근대적 의미의 등산은 1920년대 중반을 그 시작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1931년에는 일본인들이 중심이 된 조선산악회가 창립되면서 서구적 근대등산의 개념이 전래되었고 이러한 일본인들의 활동에 영향을 받은 한국인들이 모여 1937년 백령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1945년까지는 백두산, 금강산, 설악산 등 국내 명산에 대한 하계 개척등반과 서울 근교의 암장에 대한 초등반이 성행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산악회를 중심으로 남한의 산악지대에서 국토규명 학술조사와 산맥종주가 이루어지면서 일반 등산인구도 점차 확산되었다. 암벽등반도 서울 근교 인수봉, 백운대, 선인봉, 노적봉, 우이암, 주봉 등지의 암장에서 활발히 진행되었다.
60년대에 들어서자 전후 복구사업이 거의 끝나가고 사회적으로 안정권에 접어들면서 국내 등산활동은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학생산악단체는 물론 일반산악단체의 수도 급격히 불어났고 등반 수준도 향상되어 갔다. 도봉산 선인봉에 박쥐코스가 개척되는가 하면(60년 9월) 인수봉 북서면 오버행(60년 9월)이 초등되는 등 새로운 바리에이션루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등지에서의 극한등반이 성행하였다. 서구의 등산사와 비교해 볼 때 60년대 한국산악계는 적어도 국내 산과 서울 근교의 암벽에 대한 고전적 등반활동기에서는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193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국내 근대등산의 발자취는 30여 년에 걸쳐 국내산에 대한 초등기를 거치는 동안 새로운 등반방식과 등반루트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러한 욕구가 해외의 새로운 높이의 산에 대한 갈망으로 변해 갔다. 한국 산의 낮은 높이와 그 좁은 활동범위는 이제 불붙기 시작한 근대등산의 실천무대로서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 한국, 히말라야의 장을 열다.

 

1962년의 히말라야는 1950년부터 시작된 8천미터급 초등정 행렬이 거의 끝나가고 있을 때였다.이미 14좌의 자이언트봉 중에서 죽의 장막에 가려져 있는 시샤팡마(8,027m)를 제외하고는 13좌가 모두 초등정되었던 것이다. 또한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1956년 마나슬루 세계초등정으로 불붙은 히말라야 원정의 열기가 한층 고조돼 매년 10여 개의 원정대가 히말라야를 찾고 있을 때였다. 세계 산악계의 이러한 활동은 당시 고전등반방식에서 탈피하려는 국내산악계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 다울라기리 2봉으로 국내 최초 원정

 

경희대학교 히말라야원정대

 

1960년경 당시 경희대산악회의 주축 회원이었던 박철암은 한국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을 계획하고 네팔의 중부에 있는 다울라기리 산군에서 그 대상을 찾았다. 이때까지 다울라기리 1봉(8,167m)은 미등정인 채로 남아 있어 여러 나라에서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다울라기리 2봉(7,751m)은 일찍이 1905년 영국의 유명한 산악인 롱스탭박사가 서부네팔의 아피(7,132m)와 남파(6,755m)에 이르는 접근로를 찾기 위해 이 산의 북쪽 산줄기를 통과하다가 발견한 산이다.

 

그후 1950년 네팔히말라야가 해금된 직후 프랑스의 모리스 엘조그가 북동 방면으로 정찰한 바 있다. 또 54년에는 영국의 로버츠대가, 55년에는 독일대가, 그리고 55년과 58년에 일본대가 각각 정찰을 한 바 있지만 모두가 북쪽으로만 시도했을 뿐 이 산의 남쪽 내원으로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희대산악부측은 문교부, 외무부 등 관계기관을 찾아 동분서주한 끝에 62년 3월에야 정찰등반만 하기로 약속하고 문교부의 승인서를 받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5월30일에는 고대하던 입산허가서를 네팔정부로부터 얻어냈다. 이리하여 한국 최초의 히말라야원정대는 1962년 8월15일 역사적인 장도에 올랐다.

 

대원은 박철암대장(38), 주정극(38), 송윤일(27), 김정섭(27·당시 우석대 전신 국학대생) 등 4명으로 구성되었고 원정경비 약 110만원은 학교측의 지원과 동아일보사의 후원으로 어느 정도 마련되었다. 일행은 일본에서 고산장비와 식량을 구입하고 방콕을 거쳐 8월22일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8월초에 미리 선박편으로 보낸 300킬로그램의 장비를 우여곡절끝에 통관하고 8월27일에야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찰대는 이곳에서 4명의 셀파와 1명의 쿡을 고용하고 9월4일 30명의 포터와 함께 네팔 제2의 도시 포카라를 출발하여 카라반을 개시했다. 여기에서 다울라기리의 남쪽 계곡 마양디강을 거쳐 정글지대를 헤치고 수차례 협곡을 건너 2봉의 남쪽 산록 460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것이 9월 22일. 카라반을 시작한 지 19일째 되던 날이었다.

 

베이스캠프에서 관찰한 다울라기리 2봉의 남면은 하단부에 급경사의 암부가 가로막혀 있어 마양디빙하에서는 등반이 불가능하게 보였다. 오직 다울라기리 5봉쪽으로 그 단애를 우회하여야만 등반이 가능하리라 판단되었다. 이곳에서 정찰대는 20일간에 걸쳐 5,100미터(10월2일)와 5,950미터(10월10일) 지점에 2개의 캠프를 설치하면서 마양디빙하와 다울라기리 2봉 등반루트를 탐색했다.

 

그리고 10월11일에는 마양디빙하 상단 6300미터 지점에 3캠프를 설치하고 박대장과 송대원이 2명의 셀파를 데리고 그날로 6700미터의 무명봉을 등정하고 돌아왔다. 이들이 등정한 무명봉은 독립봉이 아닌 다울라기리 1봉의 주능선 북동쪽의 한 봉우리였으나 정확한 자료는 없고 일본판 <외국산명사전>(1984년 삼성당 간)에는 ‘6,599미터의 무명봉 등정’으로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후에 박대장은 무명봉의 높이에 대해 ‘고도계가 고장나서 정확한 고도는 알 수 없었고 셀파와 의논해서 6700미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한국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은 다울라기리 산군의 남쪽 접근로의 발견과 6천미터급 무명봉 등정이라는 성과를 얻고 막을 내린다.
 
  * 네팔 해금 후 재개된 본격 히말라야 원정
 
다울라기리 2봉 정찰이 있은 후 경희대산악부는 본원정을 시도하지 못했다. 정찰 결과 2봉 남쪽으로는 등반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다시 원정경비를 마련한다는 것도 당시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네팔정부가 중국과의 국경분쟁으로 인해 65년부터 네팔히말라야에 외국인의 입산을 잠정적으로 중단한다는 조치를 발표했다. 당시 한국산악인의 유일한 히말라야의 관문이었던 네팔히말라야가 봉쇄됨으로 해서 당연히 후발 원정도 이어지지 못하게 되었다. 네팔정부의 입산금지 조치는 4년 뒤인 69년에 가서야 해제되었다.

 

해외 원정에 있어서는 일본의 북알프스나 대만의 옥산 원정이 잇따랐으나 유럽이나 히말라야의 고봉 원정은 지리적으로 멀고 그에 따른 경비 조달의 어려움 때문에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내 훈련등반대나 일본, 대만 원정을 떠나는 단체들은 그 최종 목표를 만년설의 고봉등정에 두고 있어서 히말라야 원정에 대한 욕구는 점차 달구어져 가고 있었다. 69년 2월 한국산악회 히말라야 원정훈련대가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로 10명의 대원을 잃는 사고가 있었으나 ‘하얀산’에 대한 동경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 등정 시비에 휘말린 추렌히말 세계초등정

 

한국 추렌히말원정대

 

1969년 네팔히말라야가 해금되자 국내 여러 단체가 원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원정대를 꾸린 것은 한국산악회였다. 1970년 창립 25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히말라야원정을 추진하기로 한 한국산악회는 이를 위해 69년 9월 김정섭(34·하켄클럽)과 오인환(24·동국대, 양정산악회)을 네팔로 보내 추렌히말(7,371m)과 푸타히운출리(7,246m)의 등로를 정찰하고 돌아오게 했다.

 

그 결과 대상지는 이때까지 미등인 채로 남아 있던 추렌히말로 결정났고 다음해 3월 본원정의 결실을 본 것이다. 원정대는 김정섭대장을 비롯해서 김호섭(27세·김정섭의 동생), 전병구(26·어센트산악회), 한이석(26·연세대), 김기섭(23·김정섭의 동생) 등 등반대원과 후원처인  조선일보사에서 파견한 이규태기자를 포함해 총 6명으로 구성되었다.

 

추렌히말은 네팔 중부에 위치한 다울라기리 산군의 서쪽 7번째 봉우리로 같은 높이의 동봉, 중앙봉, 서봉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추렌히말(Churen Himal)의 ‘추렌’은 티베트어로 ‘내(川)의 원류’, 그리고 ‘히말’은 ‘눈(雪)’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산은 다울라기리 산군의 여러 봉우리 중에서도 가장 독립봉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어 54년 영국의 로버츠 일행이 최초로 정찰한 이래 62년에 일본대가, 69년엔 이태리대가 등반을 시도했지만 세 개봉 중 어느 것도 등정되지 않고 있었다.

 

62년 경희대의 다울라기리 2봉 원정이 정찰이 목적이었던 것에 반하여 등정을 목적으로 한 국내 최초의 원정대인 한국추렌히말원정대는 70년 3월 선, 후발대로 나뉘어 네팔로 집결하였다. 그리고 4월7일 5명의 셀파와 40명의 포타를 거느리고 포카라를 떠나 9일간의 카라반끝에 카페빙하 말단부 4,10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4월16일 등반을 개시한 원정대는 그날로 1캠프(4,700m)를 설치하고 19일에 2캠프(5,230m), 22일에 3캠프(5,650m), 25일에 4캠프(5,980m)를 구축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26일엔 5캠프(6,400m)를 설치했고 이틀 뒤인 4월28일 마침내 추렌히말 동봉을 초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새벽 5시 30분 마지막 캠프를 출발한 김호섭대원과 린진 왕겔셀파는 11시간 동안 고도차 971미터를 극복하고 등정에 성공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 최초의 히말라야 7천미터급 고봉 등정인 동시에 세계 최초의 추렌히말 등정으로, 이 소식을 접한 국내 산악계는 물론 일반국민들까지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이 등정은 같은해 가을(포스트몬슨기) 이 산의 서봉과 중앙봉을 초등정한 일본 원정대에 의해 강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일본대도 동봉 등정을 시도했으나 루트의 어려움으로 인해서 계획을 변경해 서봉과 중앙봉만을 등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러가지 자료를 제시하며 한국대의 동봉 초등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일본인들의 이와 같은 의혹을 접한 한국산악계에는 커다란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산악계와 온 국민의 성원 속에서 전국순회 사진장비전시회까지 마친 역사적인 세계초등정의 기록이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일본대의 의혹에 대해 당사자인 한국원정대에서도 여러 차례 반박을 했지만 해명이 미흡해 수차례의 공방전만 거듭되다가 등정 진위를 확인하지 못한 채 해를 넘기게 되었다. 이렇듯 한국 최초의 히말라야 등정은 한국 최초의 등정 시비를 남긴 채 끝나고 말았다.

 

  * 대원 추락사로 끝난 1차 마나슬루 원정

 

서울신문사 마나슬루원정대

 

구미 산악인들이 8천미터급 자이언트봉의 초등정을 앞세워 히말라야로 진출한 것과 같이 한국산악계도 1971년부터는 8천미터급 산 등정을 목표로 원정대가 결성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국내의 히말라야 원정은 62년 다울라기리 정찰과 그로부터 8년 뒤인 70년에 추렌히말 원정이 있었을 뿐 아직 개척 초기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세 차례의 원정경험을 가지고 있는 김정섭은 74년을 에베레스트 등정의 해로 잡고 그에 앞서 8천미터급 등반경험을 쌓기 위해 마나슬루 원정을 추진한다.
 
마나슬루원정대는 김호섭대장과 김인식, 한이석(26·연세대), 최창돈(25·전남대), 김기섭(24), 김정심(여·30·대구 청산회) 등 6명의 대원에 서울신문사에서 파견한 이종기기자가 추가되었고, 김정섭은 사무장으로 원정대를 지원하기로 했다. 71년 1월 26일 선발대 출국에 이어 2월 26일 본대가, 그리고 3월 1일 김정섭이 속속 네팔에 도착했다. 3월 20일에는 나머지 대원들이 50여 명의 포터와 함께 카트만두를 떠나 3월 31일 해발 4,300미터의 베이스캠프에 합류했다. 이때는 이미 선발대에 의해 1캠프(5,000m)가 설치된 뒤였다.

 

전력이 보강된 원정대는 4월 7일에는 2캠프(5,940m)를, 그리고 4월 10일에는 3캠프(6,700m)를 설치했고 이어서 4월 15일에는 7,100미터 지점까지 진출, 설벽을 깎아 4캠프를 세웠다. 이곳에서 날씨가 악화되자 더이상 전진하기가 어려웠다. 4월 20일에는 잠시 날씨가 호전된 틈을 타서 김기섭대원이 셀파와 함께 1차 정상공격을 감행했지만 7,800미터 지점에서 기상악화로 후퇴했다. 그리고 2차 정상공격을 위해 김기섭, 김인식, 김정심대원이 베이스캠프를 떠났지만 5월 1일 눈사태로 제4캠프에서 다시 후퇴하고 말았다.

 

김호섭대장은 마지막 기회로 자신과 동생 김기섭대원을 정상 공격조로 정하고 5월 3일 4캠프로 올라갔다. 두 대원은 산소를 사용해 하룻밤을 지낸 후 다음날 7,600미터 지점까지 올라가 5캠프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불의의 사고가 발생했다. 대원들이 텐트를 설치하고 잠시 머무르는 사이 갑자기 일기가 급변하여 돌풍이 몰아쳤다. 이 순간 김기섭대원이 돌풍에 휘말려 40미터 아래의 크레버스에 추락, 사망하고 말았다.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상 최초의 조난으로 기록된 이 사고로 인해 정상등정은 좌절되고 4개월에 걸친 마나슬루 원정은 마감되었다.

 

  * 8천미터에서 돌아선 로체샤르원정대

 

대한산악연맹 로체샤르원정대

 

한편 대한산악연맹의 로체샤르원정대는 3월 17일 서울을 출발하여 원정길에 올랐다. 정부 보조(8백만원)와 한국일보사의 후원(2백만원)으로 꾸려진 이 원정대는 62년 다울라기리원정대를 이끌었던 박철암대장(47)을 비롯해서 강호기부대장(31·대산련 이사), 하세득(30·경희대), 최수남(30·하켄클럽), 김인길(29·설령산악회), 장문삼(29·반도산악회), 권영배(27·전북연맹), 박상열(27·경북산악회), 양승혁(52·대산련 전무이사), 김초영(48·서울시련 이사)대원과 한국일보사에서 파견된 김운영(38)기자 등 모두 11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팀이었다.

 

로체샤르는 1921년 영국의 1차 에베레스트원정대에 의해 발견된 이래 60년 힐라리가 이끄는 뉴질랜드대에 의해 6,700미터까지 시등된 후, 1965년 일본대가 남동릉으로 8,150미터까지 올라섰으나 예기치 못한 200미터의 암벽을 만나 후퇴하고, 70년 5월에야 오스트리아대에 의해 초등정된 산이다. 로체샤르(Lhotse Shar)의 ‘로체’는 티베트어로 ‘남쪽‘을 의미하는데 ‘샤르’는 다시 동쪽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결국은 에베레스트를 중심으로 ‘남동쪽에 있는 봉우리’란 뜻을 가지고 있다.

 

대한산악연맹에서 히말라야 원정계획을 수립하던 70년은 이미 8천미터 14좌는 모두 등정된 뒤이고 위성봉 취급을 받고 있던 로체샤르와 얄룽캉만이 아직 미등인 채로 남아 있었다. 대산련은 이 중에서 로체샤르쪽으로 목표를 정하고 원정준비에 들어간 것인데 불행히도 그해 5월 12일에 이 봉우리마저 오스트리아대에 의해 초등정되었다. 로체샤르의 두 번째 등정을 노리고 네팔에 도착한 한국원정대는 경비행기편으로 루크라(2,800m)까지 물자를 수송한 후 4월 3일 8명의 셀파와 3명의 쿡, 그리고 2명의 메일런너와 함께 74명의 포터를 고용해 카라반을 개시했다.

 

원정대가 셀파의 본고장인 남체바잘(3,440m)을 거쳐 로체샤르의 초입이라고 할 수 있는 추쿵(4,730m)에 이르렀을 때 권영배대원이 급성고산병으로 혼수상태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래서 다음날 5명의 대원이 권대원을 후송하기 시작해 4월 10일 남체바잘에서 헬기편으로 카트만두의 병원으로 후송해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머지 대원들은 등반을 속개, 4월 12일에 1캠프(5,700m)를 설치했다. 그러나 짙은 개스와 눈보라가 전진을 지연시켜 4월 22일에야 2캠프(6,200m)를 건설할 수 있었다.

 

이곳부터는 톱날 같은 설릉이 동남릉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눈과 얼음이 혼합되어 있어 등반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원정대는 이 구간을 ‘검룡능선’이라 명명하기로 했다. 3캠프는 5월 3일 전년도에 오스트리아대가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설동의 30미터 위에 있는 75도 경사의 급사면에 2시간의 작업 끝에 겨우 설치됐다. 이곳에서 박상열, 강호기대원이 다음날의 4캠프 루트공작을 위해 묵었는데 기온이 영하28도까지 내려가고 초속 30미터의 강풍이 불어대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5월 5일에는 눈사태가 3캠프를 덮쳤으나 두 대원은 다행히 설동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다음날 박대원은 최수남대원과 교체되었고 루트공작은 계속되었다. 드디어 5월12일 7,200미터 지점에 4캠프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최대원과 상게셀파가 정상공격에 앞서 피크 38봉(7,589m)을 오르기로 하고 출발했다. 그러나 막상 플라토로 올라서 보니 피크 38봉은 거리가 멀어 등정이 불가능하게 보였다.

 

두 사람은 로체샤르의 정상을 향해 올라가 보았다. 약 8천미터 지점에 이르자 깊숙한 갭(Gap)이 전진을 가로막았다. 과거 65년에 일본대가 돌아선 곳이었다. 여기서 원정대는 계속되는 악천후와 몬순을 바로 앞둔 상태에서 더이상 등반이 어렵다고 판단, 철수할 결정을 내리게 된다. 등반을 개시한 지 50여 일 만의 후퇴였다.
 
 * 히말라야 등반사상 두 번째 대조난

 

72 제2차 마나슬루원정대

 

마나슬루에서 동생 김기섭을 잃은 정섭, 호섭 형제는 71년 5월 귀국 즉시 2차 원정대를 결성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총대장은 김정섭(39)이 맡기로 하고 등반대장에 동생 김호섭(29), 고 김기섭대원의 유해 운구를 맡을 구조대장에 서충길(35·동국산악회, 김대장의 매부), 그리고 등반대원에 최석모(36·국회산악회), 구신회(32·고령산악회), 송준행(32·부산청봉산악회), 연응모(31·반도산악회), 오세근(28·조선대), 김예섭(22·경기대, 김대장의 막내동생) 등과 기록영화 촬영을 위한 카메라맨에 박창희(41)와 일본인 야스히사 가스나리(70년 일본 에베레스트원정대 참가)를 포함시켰다. 뒤에 후원처인 조선일보사에서 파견된 윤병해기자가 추가되어 총 대원은 12명으로 늘어났다. .
 
2차 마나슬루원정대가 셀파 22명과 쿡 4명, 그리고 메일런너 3명과 포터 305명을 거느리고 마나슬루 빙하 말단부 4,30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건설한것은 72년 3월 11일. 전년도보다 20여 일 빠른 도착이었다. 3월 14일 등반을 개시한 원정대는 그날로 5,200미터까지 올라가 1캠프를 설치하고 일주일 뒤인 3월 22일에는 2캠프(6,000m)를, 그리고 27일에는 김호섭대원이 2명의 셀파를 데리고 3캠프(6,500m)를 설치했다. 여기서부터 계속되는 폭설과 싸우면서 고전하다가 4월 7일에는 4캠프(7,250m)까지 전진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정상까지의 고도는 불과 900여 미터밖에 남지 않았다.

 

4월 8일 3캠프에서는 작전회의를 열어 정상공격일을 5캠프를 설치한 직후인 4월 13일에서 15일 사이로 정하고 3개 조의 정상공격 대원을 결정했다. 이곳에는 셀파들도 12명이나 집결되어 있어서 날씨만 좋다면 3일내로 정상공격이 가능할 것도 같았다. 그런데 4월 9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폭설로 변해 다음날까지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적설량은 더욱 많아져 1미터가 넘는 눈이 모든 캠프에 쌓였다. 이것은 불행한 사태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날 밤 거대한 눈사태가 3캠프를 덮쳤다. 정확히 4월 10일 새벽 3시, 폭설의 무게를 견디다 못한 눈더미가 6명의 대원과 12명의 셀파가 자고 있는 6동의 텐트를 쓸어가버린 것이다. 그곳에 있던 12명의 인원 중 텐트 밖에서 제설작업을 하고 있던 2명의 셀파만이 100여 미터를 눈사태에 쓸려내려가다가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왔다. 이들은 밤새 깊은 눈을 헤치며 2캠프로 탈출해 다음날 조난상황을 알렸다. 망연자실한 김정섭대장은 2캠프에도 눈사태가 일어날 것을 우려해 그곳에 있던 대원과 셀파들에게 1캠프로 철수토록 지시했다.

 

그런데 3캠프의 대원 중에 생존자가 있었다. 1캠프로 하산하던 대원들이 5,400미터 지점에서 부상당한 채 움직이고 있던 김예섭대원을 발견한 것이다. 김대원은 즉시 대원들에 의해 구조되어 베이스캠프로 후송되었다. 2차 마나슬루원정대를 덮친 눈사태는 5명의 대원(일본인 1명 포함)과 10명의 셀파 등 도합 15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이것은 1937년 독일의 낭가파르밧원정대가 제4캠프에서 눈사태로 당한 16명의 조난사고(대원 7명,셀파 9명) 이후 히말라야 등반사상 두 번째로 큰 조난 참사였다. 특히 김정섭대장은 70년 1차 마나슬루원정에서 김기섭대원을 잃고 또다시 김호섭대원을 잃어 두 동생을 히말라야에 묻어야만 하는 비운을 맞았다.

 

  * 마나슬루,안나푸르나,에베레스트에서 3파전

 

마나슬루에서 대조난 참사가 있은 후 한국산악계의 히말라야 원정은 3년간 공백기를 갖는다. 로체샤르와 마나슬루에서의 잇다른 패배는 산악인들은 물론 원정후원자들로 하여금 보다 심사숙고하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특히 5명의 유능한 산악인을 잃은 마나슬루 조난사고의 후유증은 예상외로 컸다. 74년에 이르러 히말라야 원정의 열기는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한국산악회가 창립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안나푸르나1봉 원정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대한산악연맹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원정을 기획하기에 이른 것이다.

 

1975년, 한국산악계에 3년간의 침묵을 깨고 히말라야 발길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한국산악회가 안나푸르나 1봉을, 대한산악연맹이 에베레스트를, 그리고 두 차례의 쓰라린 실패를 맛본 김정섭이 다시 마나슬루를 목표로 각기 정찰대를 네팔 현지로 파견했다. 본래 마나슬루대는 75년에 본등반을 계획하였으나 준비가 여의치 않아 1년 연기하기로 하고 우선 김경배(30·피톤클럽), 정병택대원(26·포항제철 산악회) 등 2명만을 네팔로 보내 입산허가 신청을 하고 등로를 정찰케 했다.

 

  * 한국산악회 안나푸르나 정찰대

 

한국산악회 창립 30주년을 기념한 안나푸르나 1봉 정찰원정은 한국방송공사와 공동으로 추진되어 대원들은 75년 4월 16일 서울을 떠났다. 이 정찰대는 이은상회장(72)을 비롯해서 손경석대장(49), 김항원(28), 오인환(29), 변유근(26), 한정현(28)대원과 방송공사의 박춘병(36)기자, 그리고 이홍균(49) 팀닥터를 포함하여 총 8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당초 안나푸르나 초등루트인 북면을 정찰할 예정으로 정식 입산허가까지 받아두었으나 때마침 그 지역 캄파족의 반란으로 대상을 남벽으로 바꿔 5,300미터까지 시등하고 돌아왔다.
 
한편 77년 포스트몬순의 에베레스트 입산허가를 받아놓은 대한산악연맹은 75년 8월부터 11월 초까지 쿰부히말라야 지역을 광범위하게 정찰하고 돌아왔다. 최수남대장(35)을 비롯한 김인섭(32), 고상돈(28), 김병준(29), 이원영(26), 한정수(28), 김운영(한국일보 기자) 등 7명의 대원이 참가한 이 정찰에서 대원들은 아일랜드피크(6,189m)를 등정하고 푸모리(7,145m)의 6,200미터까지 등반했다.
3건의 정찰등반으로 1975년을 넘긴 한국산악계는 3좌의 8천미터급 자이언트봉을 목표로 활발한 본원정 준비에 들어갔다. 그 3좌의 자이언트봉은 마나슬루(8,163m)와 안나푸르나(8,091m) 그리고 에베레스트(8,848m)로, 국내산악계의 관심은 과연 어느 팀이 ‘한국 최초의 8천미터 등정’의 주역이 될 것인가에 쏠려 자못 경쟁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 무기력하게 끝난 3차 마나슬루 원정

 

76한국마나슬루회 제3차 마나슬루원정대

 

한국산악인들이 노리고 있던 3좌의 자이언트봉 중에서 76년 가장 먼저 원정대를 맞이한 것은 마나슬루봉이었다. 전년도에서 1년이 연기되어 성사된 3차 마나슬루 원정은 강신호단장(49)의 후원으로 김정섭총대장(41), 최석모부대장(38·국회산악회), 김경배지원대장(30·피톤클럽), 서충길등반대장(37), 김예섭(25), 이영진(28·동국산악회), 김종욱(26·에코클럽), 정병택(26·타이탄산악회), 박재천(24.서울공대), 최정철(25), 홍건식(26), 김도섭(25), 김운영대원(43·한국일보) 등 13명으로 구성된 대부대였다.
 
그러나 3차 마나슬루 원정은 기상악화와 팀웍 부재로 인해 정상공격도 하기 전에 7,700미터 지점을 최고 도달점으로 와해되고 말았다. 이로써 한국 히말라야 원정의 개척기를 주도했던 김정섭 형제의 세 차례에 걸친 집념의 마나슬루 도전은 16명의 생명을 잃고도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감되었다. 이 마나슬루야말로 한국산악인에게는 집념의 산이자 비운의 산으로 남은 채 한국산악계에 숙제로 던져졌다.

 

한편 안나푸르나를 목표로 원정을 추진하던 한국산악회도 본등반을 실현하지 못하고 다음해의 프레몬순기 입산허가를 받고 76년 8월 2차 정찰대를 파견했다. 이 원정에 참가한 전병구대장(34·한산 이사)과 김종욱대원(26·에코클럽)은 안나푸르나 북면루트를 2개월간 정찰하고 10월 29일에 귀국했다. 
 

             - 출처 / www.himalayaz.co.kr / 월간 마운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