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 [2] (1977~1978년) *-

paxlee 2007. 9. 10. 19:06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 [2] 1977~1978년 

 

   * 한국,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다.

 

대한산악연맹 에베레스트 원정대

 

75년과 76년 두 차례에 걸쳐 에베레스트 지역 정찰을 마친 대한산악연맹은 77년 6월 11일 발대식을 갖고 공식적으로 ‘77한국 에베레스트원정대를 출범시켰다. 원정대장은 당시 대산련 회장직을 맡고 있었던 김영도(53) 공화당 국회의원이 맡았고 등반대장에 장문삼(35), 등반부대장에 박상열(33·경북산악회), 그리고 이윤선(36·강원연맹), 김명수(33·양정산악회), 곽수웅(33·부산대륙산악회), 고상돈(29), 한정수(29·하켄클럽), 이상윤(29·명지대),

 

김병준(28·한국외국어대), 조대행(31·카톨릭의대), 이기용(28·설령산악회), 이원영(27·한국등산학교 강사), 도창호(26·동국산악회), 김영한(30·대전쟈일클럽), 전명찬대원(25·부산청봉산악회)과 보도대원으로 한국일보사에서 파견한 김운영(44), 이태영기자(36)가 참가해 총인원 18명이었다. 이 원정대의 예산은 모두 1억 3천여 만 원이었는데 정부에서 6천만 원을 지원받고 나머지는 한국일보사가 나서서 11개 기업체의 협찬을 받아 충당했다.
 
한국은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도전하는 10번째 국가이자 원정대로는 25번째 팀이었다. 1953년부터 77년에 이르는 24년 동안에 초등루트인 남동릉 외에 북동릉(60년 중국)과 서릉 혼바인 꿀르와르(63년 미국),그리고 남서벽(75년 영국)에 새 루트가 추가되어 있었다. 그중 한국대가 택한 루트는 53년 영국대가 오른 사우스콜을 경유한 남동릉이었다. 원정대가 카라반을 시작한 지 21일 만인 8월 9일, 1진이 5,400미터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이때는 아직 몬순기가 끝나지 않았으나 원정대는 등반기간을 벌기 위해 8월 11일부터 등반에 들어갔다.

 

이로부터 26일만인 9월 6일 8천미터 지점의 사우스콜에 네 번째 캠프가 설치되었다. 극지법 등반치고는 빠른 전진이었다. 9월 8일에는 남동릉 8,510미터 지점에 5캠프가 설치되었고, 다음날 새벽 6시 30분, 1차 공격조로 지명된 박상열 등반부대장과 앙푸르바 셀파가 정상을 향했다. 그러나 깊은 눈을 헤치며 나아가자니 예상 외로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눈은 올라갈수록 깊어져 10미터를 전진하는 데 40분이나 걸리는 곳도 있었다. 오후 1시 50분에 간신히 남봉(8,763m)에 도착한 공격조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정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두 사람의 몸은 고소에서의 러셀로 체력소모가 커 거의 탈진상태에 있었다. 시간 감각마저 흐려져 산소통의 잔량을 체크할 판단력도 잃었다. 여기에다 설상가상으로 8,800미터 지점에 있는 일명 힐라리 스탭이라는 수직 침니를 막 올라섰을 때 산소까지 바닥나버렸다. 정상을 거리상으로 불과 100여 미터 놔두고 체력의 한계점에 도달한 두 사람은 오직 살기 위해서 돌아서야 했다. 이때는 오후 5시가 넘어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탈진한 두 사람은 남봉으로 겨우 돌아와 데포해 놓았던 산소통을 발견했으나 벨브를 열 기력 조차 없었다.

 

8,600여 미터의 고도에 이르렀을때 앙푸르바가 하산을 포기하고 누워버렸다. 혼자 힘으로는 더이상 움직일 수 없는 상태까지 이른 것이다. 여기서 박부대장은 비박을 결심했다. 거의 탈진상태에서 비몽사몽간에 하룻밤을 버틴 두 사람은 다음날 새벽 날이 밝아오면서 200여미터 아래 있는 5캠프를 발견했다. 만 하룻만에 구사일생으로 되돌아오게 된 것이다. 비록 등정은 못했지만 두 사람의 비박은 당시까지 등반사상 가장 높은 곳에서의 무산소비박으로 기록되었다.

 

김영도대장은 절박한 심정으로 2차 공격조로 고상돈대원과 펨바노르부 셀파를 지명했다. 이제 올려진 산소는 단 한번의 정상공격만을 할 수 있는 7통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좀더 철저한 작전과 지원계획을 세워야 했다. 9월 15일, 2차 공격조로 선발된 고상돈대원과 펨바노르부 셀파는 5시 30분 마지막 캠프를 떠나 정상을 향했다. 이들은 1차 공격조가 만들어 놓은 러셀 자국 덕분에 비교적 순조롭게 전진을 거듭한 끝에 오전 9시 30분 남봉(8,763m)을 통과했다.

 

1차 때보다도 3시간 20분이나 빠른 운행이었다. 두 사람은 힐라리 스탭을 넘고 박상열대원이 후퇴한 그 지점을 통과하여 오후 12시 50분 마침내 지구의 용마루에 올라섰다. 등반개시 36일 만의 일이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8번째 에베레스트 등정국가가 되었고 고상돈대원은 58번째 등정자가 되었다. 한국대가 세운 9월 15일 등정은 포스트몬순기에서는 가장 빠른 날짜로 이 기록은 15년동안 깨어지지 않았다.

 

   * 한산, 안나 1봉에서 4봉으로 변경하여 등정

 

한국산악회 안나푸르나 4봉원정대

 

한국산악회는 75년 안나푸르나 원정을 계획했었으나 몇번의 연기 끝에 78년에 4봉으로 목표를 바꿔 원정대를 파견했다. 최종 선발된 대원은 전병구(36·어센트산악회)대장의 지휘아래 함탁영(39)부대장, 유동옥(31), 변유근(29), 이명호(29), 전두성(26)대원 등이었다. 이들은 3월 24일 8명의 셀파와 78명의 포터만을 고용해 2.2톤의 물자를 가지고 포카라에서 카라반을 개시했다. 대원들은 해발 3,720미터의 카라반 지점에서부터 엄청난 폭설로 고생을 거듭한 끝에 4월 5일 4,00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했다.
 
안나푸르나 4봉(7,525m)은 네팔 중부의 안나푸르나 산군 주능선 상에 있는 봉우리로 55년 슈타인메츠가 이끄는 독일의 소규모 원정대에 의해 북서면으로 초등정되었다. 그로부터 영국(57년), 영국-인도-네팔합동대(60년), 체코(69년), 유고(69년), 일본(70,73년), 서독대(74년)가 모두 북서쪽으로 등정했고 76년에는 독일대가 최초로 남면 모디콜라를 통해서 등정, 모두 6개국에서 9개대가 올랐다. 한국대는 이 산의 10번째 등정을 노리고 초등정루트인 북서면을 택해 등반을 개시했다.

 

4월 7일에는 1캠프(5,050m)가 설치되었고, 10일에는 400미터의 암벽지대를 돌파해 2캠프(5,640m)를, 그리고 15일에는 3캠프(6,000m)를 설치하고 폭설 속에서도 등반을 계속하여 6,690미터 지점에 4캠프를 설치했다. 원정대는 여기서 5캠프를 설치할 계획을 바꿔 곧바로 정상공격을 감행했다. 공격대원은 유동옥과 파쌍노르부, 펨바라마 셀파 등 3명이었다. 이들은 4월 22일 6,800미터까지 올라가 비박을 하고 다음날 폭풍설을 뚫고 오후 3시 50분에 정상을 밟았다.

 

곧이어 하산을 시작한 일행은 도중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밤늦게야 겨우 4캠프로 돌아왔다. 다음날에는 하산길에 눈사태를 만나 150미터가량 미끄러지면서 카메라가 들어 있던 배낭을 잃어 정상 사진조차 가지고 내려오지 못했다. 또한 등정자 유동옥대원은 심한 동상을 입어 귀국 후에 발가락 7개를 절단해야만 하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 출처 / www.himalayaz.co.kr / 월간 마운틴에서 -